简体 | 正體 | 대법서적

明慧법회| 고생 속에도 낙이 있는 미묘함을 체득하다

글/ 헤이룽장성 대법제자 안심

[밍후이왕] 나는 법을 얻은 후부터 시부모님을 나의 집에 모셔다 우리와 함께 지냈다. 그때 친구들은 모두 고부 관계는 어려움이 많다면서 나더러 모시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법을 배웠는데 오직 내가 참을 수만 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일은 참말로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나의 집에 오시자 세 시누이도 왔고,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남편은 늘 세 누나와 충돌이 발생했으나 나는 도리어 내내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일도 상관하지 않고 일에 부닥치면 회피하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진정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이집 사람들은 너무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한 수련생은 내가 가정관을 넘지 못했으며, 수련이 너무 차하다고 했다. 나도 몹시 곤혹스러웠고 어떻게 해야만 이 관을 잘 넘을지 알 수 없었다.

—본문 작자

자비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8년 말부터 수련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줄곧 사부님의 정법진행을 바짝 따랐다. 그러나 각종 원인으로 하여 나는 도리어 비틀비틀 걸어왔다. 2000년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불법수감 및 벌금을 당했고, 2002년엔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하여 불법 노동교화를 당했으며, 2010년에는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다 무고당한 데에 연루되어 또 다시 수감과 벌금을 당한 등등이다. 그 과정에서 놀람, 두려움, 증오, 원한, 고생은 있었지만 기쁨과 즐거움은 아주 적었다.

하지만 근 2년래, 사존님의 자비로운 가호 하에 수련이 끊임없이 성숙됨에 따라 나는 심성이 제고되고 경지가 승화된 후의 미묘함을 감수하게 되었으며, 집착심을 담담하게 내려놓고 내버린 후의 개운함과 유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래에 두 개 방면으로부터 근 2년래 대법 수련 중에서의 제고 과정을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부족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1.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

나와 수련생 리 언니는 연분이 몹시 크다. 리 언니는 금년에 62살로 몹시 선량하고 무던하며 관념이 적고 성격은 특별히 느리다. 우리가 서로 알기는 2009년 6월이었다. 리 언니 집은 우리 작은 진에서 백리 밖에 있는 산구 임장에 있다. 그 곳에는 학교가 없어 손녀를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 이 작은 진으로 왔던 것이다. 수련생의 소개를 거쳐 우리는 서로 알게 되었다.

언니는 법을 아주 일찍 얻었지만 ‘7.20’이후 환경의 영향과 각 방면의 압력 때문에 서서히 수련을 포기하였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몇 년이나 법 공부, 연공을 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결코 대법을 포기한 건 아니었으며 시종 파룬따파는 좋고 대법은 좋다고 인정하였다.

그녀의 기본적 상황을 이해한 후 이튿날 그녀의 임시 셋집에 찾아가서 그녀와 함께 법 공부하였다. 리 언니는 1년밖에 학교에 다녀보지 못했으므로 박해 전에는 주로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듣는 방법으로 법 공부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법 공부를 ‘전법륜’ 통독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날마다 한 강씩 공부했는데 한 강을 공부하는데 세 시간 남짓 걸렸다. 언니는 많은 글자를 알지 못하기에 처음에는 한 글자 한 글자씩 밖에 읽을 수 없었으며 구절을 다 읽지는 못했다. 나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인내력을 다 모아서 조급한 마음을 누르면서 하나하나씩 그녀에게 틀린 글자를 바로잡아 주었다. 바로 이렇게 리 언니와 ‘전법륜’을 한 차례 공부한 후 다시는 그녀 집에 공부하러 가지 않았고 그녀더러 혼자 집에서 하라고 하였다. 때때로 그녀를 보러 그녀 집에 다니면서 그녀에게 사부님 신경문이나 밍후이 주간 등 자료를 보내주었고 무슨 단체 활동이 있으면 늘 그녀를 불러다 함께 참가시키면서 그녀를 빼놓지 않았다.

2010년 말 그녀는 우리 아파트 구역에 집 한 채를 샀다. 우리는 가까워서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때부터 그녀가 이전에 살던 임장(林場-산 일 하는 곳)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집은 법 공부 장소여서 그녀는 매 주마다 왔지만 늘 지각하였다. 그녀가 글을 다 알지 못하므로 한 구절을 몇 번씩 중복해야 했다. 어떤 때 수련생들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어도 그녀는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리 언니는 법 공부가 느려서 혼자 집에서 1주일에 한 강을 공부하는데도 몹시 힘을 들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전을 뒤져가며 공부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나는 그녀더러 내 집에 와서 함께 공부하자고 하였다. 서서히 그녀는 읽을 수 있었고 많이 유창해졌다.

한 번은 우리가 함께 법 공부하는데 그녀가 “전화가 오거나 다른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1] 이라는 단락을 읽을 때 두드린다는 ‘敲-치아오’를 북이라는 ‘鼓-구’라고 읽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언니야, 언니도 정말 너무 우둔해, 우리 모두 북을 두드리는 건 알지 않아요? 발음에 따라한다 해도 ‘敲門-문을 두드린다’로 따라 읽어야지 ‘鼓門’이라 읽을 수는 없잖아요!” 언니는 조금도 숨김없이 말했다. “나는 이게 북을 두드린다는 鼓인줄로 알았어.”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대조해 봤다. 만약 나였다면 모른다 해도 절대로 ‘鼓’라고는 읽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읽으면 얼마든지 ‘敲’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도리어 상관하지 않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서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이 일에서 나는 자신의 허영심을 찾아냈고, 자신의 교활한 처세 태도를 보아냈으며, 언니의 몸에서 자신의 부족을 찾아냈다.

날마다 언니와 함께 오전에는 법 공부, 오후에는 거리에 나가 진상을 알렸다. 리 언니의 성격이 너무 느린데다 집안 일 또한 많고, 심성도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 종래로 약정한 시간에 약정한 곳으로 나올 때가 없이 10분, 20분, 심지어 반시간씩 늦게 왔는데 날마다 그랬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참으면서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고 이는 나더러 조급한 마음을 버리게 하는 거라고 여겼다. 사실 나 역시 조급한 마음을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 번은 점심때여서 나는 땡볕아래서 오랫동안 기다려도 그녀가 오지 않기에 이번엔 진짜 화가 동했다. 선후로 두 차례나 전화로 독촉했던 것이다. 그녀는 싱글벙글 걸어오면서 웃으며 “나 또 늦었어.”하는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지만 않아도 괜찮겠는데 이렇게 싱글거리는 걸 보자 나는 그만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야단쳤다. “언니 어느 땐들 일찍 와본 적 있어? 언닌 우리 지역에서 제일 뒤떨어진 사람 중의 하나야. 참, 사부님은 하필이면 나와 언니를 함께 있도록 안배할건 뭐람. 내일부턴 오지 말아요. 난 언니와 함께 하고 싶지 않아요. 난 정말 견뎌낼 수가 없어요.” 리 언니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느릿느릿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오늘 네가 참지 못할 줄 알았어.” 나는 약이 바싹 올라 말했다. “나는 참지 않겠어요. 난 이제까지 1년이나 참았어요.” 리 언니는 웃었지만 나는 도리어 울었다. 나는 정말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한바탕 그녀를 꾸짖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한 아파트 단지에 가서 션윈 시디를 배포하고 진상은 말하지 않은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서 자신이 화를 낸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늘 이렇게 그녀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결함을 보면 지적해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튿날 오전 법 공부할 때 나는 상냥한 말투로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우리는 대법 수련을 하므로 곳곳에서 모두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해요. 언니가 늘 이렇게 남의 시간을 지체시키는 것은 옳지 않아요! 언닌 하루 종일 서두르지도 않고 여유를 부리는데 언니도 일을 분별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부님께서 만일 내일 8시에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하는데 언니는 9시에 온다면 되겠어요?” 그후부터 리 언니는 다시는 지각하는 일이 없었고, 나의 조급한 마음도 많이 옅어졌다.

언니는 자기는 진상을 잘 말하지 못하므로 나가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지역은 대면 진상 돌파가 아주 좋았다. 누구나 다 나가서 진상을 말할 수 있었으며 소책자 진상은 비교적 적었다. 리 언니는 자료 배포를 요구한 후부터 중지한 적이 없었고 설에도 나가서 배포했다. 이전에 나는 종래로 자료 배포를 한 적이 없었다. 원인이란 2002년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남에게 모함당해 불법 노동교화를 당하여 마음속에 장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줄곧 돌파하지 못했다. 리 언니는 낮에는 거리에 나가서 진상을 말하고 밤이면 혼자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였다. 후에 나는 언니와 상의하였다. 밤에는 나가지 말아요. 길이 울퉁불퉁하니 그래도 낮에 나가는 게 좋겠어요. 나도 언니와 함께 배포하겠어요.

이리하여 나는 또 다시 진상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6, 7년 동안 나를 장애하던 두려운 마음을 돌파하였다. 나는 배포할수록 태연해졌고 길은 갈수록 넓어져 나중에는 큰 꾸러미 작은 꾸러미의 진상 자료를 직접 맞대고 공사 현장의 가설 건물에 집어넣었다. 한 번은 우리가 또 공사 현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가설 건물과 대문 사이에 깊고도 너른 도랑을 파 놓아 들어가자면 아주 멀리 돌아야 했다. 나는 좀 두려운 마음이 있어 물러갈 생각을 하고 빙 둘러서 말했다. 그래도 들어갈래요? 언니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넌 뭘 하러 왔지?” 말을 하면서 진상 배낭을 메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도 그녀 뒤를 따라 들어가 준비해 온 진상 꾸러미들을 순조롭게 가설 건물에 집어넣었다.

2012년 션윈 시디가 나온 후 밍후이왕에서는 션윈 시디를 대면하여 세인들에게 주라고 고무하였다. 나는 리 언니와 함께 대면하여 션윈 시디를 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른들에게 감히 주지 못하고 매일 오후 3, 4시면 각 길목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애들에게 주면서 집에 가져가라고 하였다. 서서히 어른에게도 줄 수 있었는데 그러나 여자에게만 주고 남자에게는 감히 주지 못했다. 또 더 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대담하게 줄 수 있었다. 만약 리 언니와 함께 있지 않고 나 스스로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자면 어느 날에야 비로소 될 수 있을지 모르며 절대 이렇게 빠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20년 설법’을 발표하신 후, 리 언니는 사명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의 수련생을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20년 설법’ 열 몇 권과 두 주머니의 진상자료, ‘9평공산당’ 및 션윈시디를 메고 산구로 갔다. 이번에 그녀는 9명의 수련생을 찾아왔고 한 명의 신 수련생을 인도하였으며 아울러 그녀 집에 법 공부팀을 세웠다. 낮에는 모두를 이끌고 법 공부하고 밤이면 수련생을 거느리고 주변 몇 개 임장(林場)에 진상자료를 배포하였다. 20여일 후 언니가 돌아올 때엔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자료점에 기부한 4천5백위안과 몇 십 명의 ‘3퇴’명단이 있었다. 리 언니가 전심전력하여 사람을 구하는데 완전히 빠진 것을 보고 나는 감개하여 말했다. “언니, 언닌 정말 대단해, 정말 잘했어요!” 언닌 도리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모두 사부님께서 펼쳐주신 것으로서 나는 단지 입을 좀 놀리고 다리로 좀 뛰어다녔을 뿐이야.”

리 언니는 돌아 온 후 손녀를 학생 기숙사에 안배하고는 또 임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모르고 있으므로 자기는 돌아가서 사람을 구해야 하며 더 구하지 않다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나와 리 언니의 연분은 잠시 일단락되었다. 리 언니와 함께 있던 나날을 회상해 보면 수확이 엄청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내가 리 언니를 도와 또 다시 대법 수련에로 돌아오게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부님께서 리 언니를 내 신변에 보내어 나의 수련을 돕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사부님의 고심에 감사드리며, 동시에 수련생을 찾아오는 중요함도 심심히 체험하였다.

2. 안으로 찾고 참답게 수련하니 “교활함”이 죽다

나는 법을 얻은 후부터 시부모님을 나의 집에 모셔다 우리와 함께 지냈다. 그때 친구들은 모두 고부 관계는 어려움이 많다면서 나더러 모시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법을 배웠는데 오직 내가 참을 수만 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일은 참말로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나의 집에 오시자 세 시누이도 왔고,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시부모는 모두 월급이 있었는데 모순은 여기서부터 생겼다. 세 시누이는 시부모가 이 집을 위해 돈을 많이 쓴다고 의심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 집을 위해 돈을 적게 쓴다고 의심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이 집에 대해 ‘집’이라는 감각을 잃었으며, 나가서 삯일을 할지언정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늘 세 누나와 충돌이 생겼고 나는 도리어 줄곧 침묵을 지키면서 아무 일도 상관하지 않았고 이 집을 아예 내 집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대법제자이므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녀들과 충돌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간 대법제자의 형상에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일에 봉착하면 회피하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진정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이집 사람들은 너무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한 수련생은 내가 가정관을 넘지 못했으며, 수련이 너무 차하다고 했다. 나도 몹시 곤혹스러웠고 어떻게 해야만 이 관을 잘 넘을지 알 수 없었다.

2010년 83살인 시어머니가 폐암 말기에 걸렸고 그래서 우리 이 집은 더구나 시끌벅적했다. 날마다 세 시누이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그 뒤에 따르는 것은 그녀들의 남편과 애들이었다. 나는 사직하고 시어머니를 보살펴야 했고 또 이 열 몇 명의 밥을 지어야 했다. 세 시누이는 나의 이 집을 어떻게 평형을 이루겠는가는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날마다 시어머니를 에워싸고 저금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으며, 아울러 시어머니 월급을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를 의논하였고 잇따라 오는 것은 하나하나의 모순이었다. 나는 자신이 수련인임을 깊이 알고 있는지라 반드시 심성을 파악하여 이렇게 훌륭한 수련환경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저 참고 참았다.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모두 대꾸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서 무슨 마음이 반영돼 나왔는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닦아 버렸다. 그 때는 나의 귀가 유달리 영민해서 그녀들이 문을 닫고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남편은 듣지 못하나 나는 다 분명하게 들었는데 바로 내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마음이야말로 밀물처럼 높게 솟구쳤지만 그래도 나는 모두 참아버렸다.

드디어 어느 날 모순이 격화되었다. 남편과 세 시누이가 다투기 시작하였다. 원인은 시누이들이 어머니 예금을 옮겼던 것이다. 듣고 난 나는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했고 그들이 너무한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권고했다. 당신의 것이면 잃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것이 아니면 얻지 못한다고. 하지만 남편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도 80넘은 아버지가 계시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데 누나들은 누구도 개의치 않고 또 물어보지도 않고서 뭘 믿고 가산을 나누는가! 바로 이렇게 사흘이 멀다하게 작은 싸움을 벌이고 닷새째는 큰 싸움을 하면서 각자 자기 도리만 말하고 고통 속에 있는 시어머님의 감수는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들이 싸우면 나는 말렸으나 후에는 그녀들이 전세에 아마 빚진 것이 있을 것이고 까닭 없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오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오직 시간만 있으면 나는 어머님 침대 머리에 앉아서 ‘전법륜’을 읽어 드렸는데 아마 열 몇 번은 읽은 것 같았다.

임종 전에 시어머님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만 보면 힘없이 나를 가리키면서 “네가 좋아, 대법이 좋아!”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시누이는 내가 어머님을 신경병에 걸리도록 가르쳤다고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일체 비용은 모두 우리가 지불했지만 시누이들은 그것도 상관하지 않고 어머님의 장례비(부조금)를 나누자고 했다. 이렇게 되자 남편은 정말로 화가 나서 세 누나를 집에서 쫓아내고는 다시는 내 집 문에 얼씬 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의 집은 다시 10년 전의 평온과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나에게는 또 집이 있다는 감각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사부님 사진을 보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사부님, 대법을 배우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 돼야 하고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는데 왜 저의 가정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제가 어디에서 잘못했습니까?” 저녁에 ‘전법륜’ 공부를 할 때 사부님께서 나를 일깨워 주셨다. “당신이 연공하면 당신이 도를 얻는데, 당신이 그렇게 많은 것을 빚지고도 당신은 갚지 않겠단 말인가? 그것은 가만있지 않으며, 그것은 당신을 연마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한 층차 중의 반영으로서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는 이런 현상이 다시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한 몫 빚을 치른 후에는 그것이 다시 와서 교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관은 넘어 갔지만 자신을 찾아보았다. 이 한 동안 엄청 많은 마음을 닦아 버렸지만 그래도 늘 편안하지 못함을 느꼈는데 마치 무형의 물건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고 철저히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애써 생각하고 생각해도 뿌리를 찾을 수 없었다. 뿌리를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나는 또 다른 일종의 곤혹 속에 빠졌다.

사부님께서 ‘20년 설법’을 발표하신 후 나에 대한 촉동이 엄청 컸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특히 형성된 관념, 형성된 사유방식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비자각적인 사람 마음의 표현을 인식함에 있어 아주 어렵게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특히 중국 그 환경에서 사당(邪黨)은 중국전통문화를 파괴해 버리고 한 세트 사당의 것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당문화(黨文化)이다. 그것이 세운 사유방식으로 우주 진리를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심지어는 일부 불량한 사상행위는 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도 서로 저촉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불량한 사상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대법에 따라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더 큰 힘을 쏟아 법 공부하였다. ‘전법륜(권2)’ ‘불성’을 학습할 때 나의 본성은 서서히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다 클 때까지 나를 우둔하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막 다니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나의 부모에게 내가 잔꾀를 잘 부린다고 하였다. 나는 무엇이 ‘잔꾀’인지 몰랐다. 총명하면 총명하다고 할 것이지 뭐가 또 ‘잔꾀’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업에 참가한 후 동료들은 나를 약다고 했으며, 뒤에서는 나를 ‘교활’하다고 했는데 나는 여전히 그들이 왜 나를 이렇게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종래로 남을 깔보지 않았고 남을 해치지 않았으며, 종래로 남의 이익을 가로채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나를 ‘교활’하다 하는가? 결혼 후 시댁 사람들은 나를 ‘심술이 많다’고 하면서 남편 셋이라도 나 하나를 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30대의 내가 40, 50대의 사람이 관리하던 공장을 질서정연하고 상하로 처리가 주도면밀하고 원활하게 하여 상급이든 하급이든 나쁘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스스로는 이를 ‘능력’이라 여겼고, 일에 부닥치면 머리 반응이 유달리 빠르고 응변 능력이 비교적 강하여 접촉해본 사람은 모두 나를 총명하다고 하였고 나 스스로도 우둔하지 않다고 여겼다. 수련 후 수련생도 나를 총명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대법이 준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개지개혜(開智開慧)라 부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찾아보니 또 틀리는 것 같았다. 개지개혜하면 마땅히 더 많은 법리를 깨달아야 할 텐데 난 왜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사부님께서는 ‘2010년 뉴욕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부의 눈은, 당신들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며, 당신들의 한 거동이며, 나는 모두 당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아낼 수 있다. 나는 그런 말만할 줄 알고 가서 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며, 나는 그런 교활한 사람도 싫어한다. 나는 순박한 사람, 착실하고 견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또한 희망하건대 여러분이 이렇게 다년간의 수련 중에서, 바른 방면에서 지혜를 향상시키기 바라며, 처세와 처신상에서 수확(收穫)이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나이다. 내가 바로 그 교활하고 처세와 처신상에서 수확(收穫)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내 법 공부는 진정으로 법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고통스레 사고하면서 내가 왜 이런가를 찾아보았다. 나도 이렇기를 바라지 않는데? 이 모양으로 변하리라고는 누가 알았겠는가?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 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이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사상 중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로 자신의 대뇌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2] 원래 이 모두는 나의 관념이 아니고 이 관념이 너무 강해서 이미 나의 지금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시아버님이 갑자기 온몸이 다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남편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아버님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세요. 아버님께서 자살하신다면 나와 당신 아들은 황하에 뛰어든다 해도 씻지 못할 거구요, 당신의 세 딸은 우리 둘이 아버님을 학대해서 핍박에 못 이겨 죽었다고 할 게 아니에요?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웃기만 했다. 며칠 안 되어 아버님이 또 우리 앞에서 어디어디가 괴로워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약이나 먹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였다. 이번에 나는 농담이 절반 섞인 말로 말했다. 그럼 아버님 공증인에게 가셔서 공증해 달라고 하세요. 아버님이 사망하시면 모두들 아버님께서 왜 사망하셨는지를 알게 될 거 아니에요. 사후에 나는 안으로 찾아보았다. 아버님이 왜 늘 내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나의 무슨 마음을 향해 온 것일까? 두려운 마음? 부담을 지기 두려워하는 마음? 남의 오해를 살까 두려워하는 마음? 자신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하는 마음?……

반나절 찾아도 뿌리를 찾지 못할 것 같아 또 ‘전법륜2’를 들고 ‘불성’이란 문장을 읽기 시작하였다. “업력에는 眞(쩐)·善(싼)·忍(런)의 표준이 없는바, 그것은 그것이 이 관념을 형성할 때의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하며, 사람을 속인들이 말하는 아주 교활하거나 혹은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되게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이 수련할 때 부동(不同)한 사상업력이 작용을 일으키게 하여 수련을 저애한다. 사람이 만약 업력의 저애가 없다면 수련은 아주 쉬운 것이다. 이 업력은 여러 해 전에 어떤 상태 하에서, 어떤 도덕표준 하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곧 이런 표준으로 사물을 가늠한다. 만약 이것이 많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의 일생은 모두 그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형성된 관념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곧 이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며 곧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신은 없다. 그 자신은 완전히 그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선량하지 않은 후천적 관념에 포위되고 가려진다. 그는 진정하게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자신의 표준이 없게 된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온몸이 전율하였다. 찾았다. 나는 찾았다! 나는 철저히 알게 되었다. 나를 몇 년간이나 곤혹스럽게 하던 집착, 드디어 그 뿌리를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교활하고, 총명하고 일을 함에 물샐 틈 없이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진짜 내가 아니며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며, 사상 업력으로서 다시 말하면 그 교활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단숨에 가뿐해졌다.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나는 정말로 그 불변의 것, 선천적인, 순박하고 선량하며 천진무사(無邪)한 자신을 보았다. 동시에 나는 ‘교활한 놈’의 간사하고 교활함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나는 그것을 40여년이나 공양하고 40여년이나 그것에게 기만당했다. 지금 나는 더는 그것을 수양하지 않을 것이며 갖지 않겠다. 나는 그것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즉각 집행하였다. 이렇게 되어 ‘교활한 놈’은 죽어 버렸다.

나는 ‘불성’을 반복하여 읽었다. 읽을수록 사부님이 대단하심을 느꼈고, 읽을수록 지금의 사람이 가련하게 여겨졌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한 후 문제를 보고 문제를 생각하는 나의 기점이 변했다. 하루는 나와 한 수련생이 거리에 나가 진상을 알리는데 그 수련생은 예전의 그의 동료가 발 마사지하는 곳(足療館)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감정을 지니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종전에 나는 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고 아주 존경했는데 생각밖에 그도 이런 곳에 다닐 줄은 몰랐어. 지금의 사람은 정말…… 지금의 사회는 정말……” 그녀는 한바탕 개탄해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와 잘 어울렸고 아울러 그 동료에게 죄를 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은 후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거기로부터 나온 사람은 네가 말한 것처럼 꼭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어쩌면 그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아니면 사람 찾으러 갔을지도 몰라!”

나는 변했다, 참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많은 사람은 이 강당에서 나간 다음, 당신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텐데, 보증코 당신의 세계관마저 전변(轉變)이 생길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알 것이며, 더는 그렇게 얼떨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인데, 보증코 이러하다.”[3] 정말 이러했다. 나는 변했다. 문제를 보고 문제를 생각하는 관점이 변했다. 나는 더는 수련이 고생스럽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고생 속에 낙이 있는 미묘함을 체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위대하신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머리 조아려 감사드립니다. 제자는 어떠한 말로도 사부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정진, 정진, 또 정진하려 할 뿐입니다.

주 :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2권)”‘불성’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 2012년11월8일
문장분류 : 9회법회
원문위치 :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2/11/8/2645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