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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구하는 마음을 철저히 해체

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명(名)에 집착함은, 유위(有爲)적인 사법(邪法)이라, 만일 세간(世間)에 이름을 날리려면 기필코 말은 착하게 하나 마음에 마(魔)가 있어 중생을 미혹시키고 난법(亂法)하게 된다.”[1] 요즘 명을 구하는 마음이 때때로 부풀어 올라 심하게 나의 정법수련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수련하기 전 자신은 명을 구하는 마음이 매우 심하였는데 얼굴이 얇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수련 후 좀 바뀌었지만 내심으로는 이런 것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구체적 표현은 처세를 위해 체면을 중시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잘못됐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했으며 겉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해 점잖지만 실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존중해주기를 바랐고,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으면, 특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면 흐뭇해하고 되새겨 보면서 그 속에 빠져든다…………….

나는 발견한바 명을 구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피동적으로 명을 지키며 명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사유 중에는 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를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오해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반영되어 나온다……..그러므로 명을 구하는 배후에는 두려운 마음이 숨겨져 있는데 명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명에 더욱 집착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정황을 조성한 원인은 무엇인가? 개인의 각도에서 보면 나는 어려서 성적이 좋았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업신여김을 당했으며 부모는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었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내성적이었고 말재주가 없었으며 비록 성적은 좋았지만 처세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모친의 나에 대한 기대가 높다보니 10여 세 될 때 처세에 있어서 성인처럼 자신을 요구했는데 이렇게 되니 내심은 매우 모순되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기에 나는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관념이 형성됐고 사람을 만나면 아주 긴장하며 부끄러워한다. 이런 정황은 줄곧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을 구하는 마음은 그때 모친의 발묘조장(拔苗助長 – 모가 늦게 자란다고 하여 모를 뽑아 자란 것처럼 보이게 함)의 교육방식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성장한 후에도 명에 더욱 싸매어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웠다. 특히 허영심이 강하며 심하게 다른 사람의 중시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자신은 천성적으로 이런 내재적인 소질이 구비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을 구하기 위해 겉치장을 잘하여 다른 사람의 존중을 얻으려 한다. 사실 내심은 아주 취약하고 착실하지 못하다.

그러면 명을 구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깨달았는데 명을 구하는 근본은 바로 ‘이기심’으로서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지나치게 자신을 마음에 두는 동시에 사람마다 자신에 대해 마음에 두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높게 보고 타인을 초월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이 있게 되면 전력을 다해 자신의 명을 지키고 완전히 명을 위해 기뻐하고 우울해 한다. 실질은 자신의 주의식을 포기하는 것이고 명을 구하는 관념이 마음대로 주재하게 한 것이다.

속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명’은 ‘이익’보다 더 공허하다. ‘이익’은 필경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명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 재간, 재부, 지위, 용모 등등을 실증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 심리상의 감수이고 허무맹랑한 것일 뿐이다. 또한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고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이런 ‘허명(虛名)’을 구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람은 그 속에 미혹되어 버렸다.

수련자로서 마땅히 명을 더욱 더 꿰뚫어 보아야 하고 명을 투철하게 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 명을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명을 구하는 마음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전혀 다른 사람을 위하는 요소가 없으며 일정한 기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잘 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은 것이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잘 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진선인(眞善忍)우주 법리와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명을 구하는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명의 표준으로 자신을 단속하기 쉽다. 비록 어떤 때, 해낸 결과가 법의 표준으로 해낸 결과와 똑같다고 하더라도 출발점이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는 자신의 명을 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한 것이다. 즉 하나는 속인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수련자의 행위인 것이다. 실제로는 차이가 아주 큰데 하나는 사(私)적인 것으로서 타인이 자신에 대해 좋다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사(無私)한 것으로 자신의 감수를 근본 고려하지 않고 오직 타인이 잘 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정법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명을 구하는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실증하는 요소가 섞이게 될 것인데 지나치게 자신을 강조하기에 대법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하게 할 수 없고 자신과 사부님과 대법과의 관계도 바르게 놓기가 아주 어렵게 된다. 이것은 수련자로 말하면 극히 관건적이며 이 관계를 바르게 놓지 못하면 사부님이 배치한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기가 아주 어렵게 되고 중도에서 그만두게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망칠 수도 있다.

이런 각도에서 나는 깨닫게 되었는데 명은 사실 구세력이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 심어 놓은 걸어 나올 수 없게 하는 커다란 족쇄인 것이다. 이 족쇄를 제거해야만 명에서 파생되어 나온 각종 집착심을 해체할 수 있고 이래야만 대법제자는 비로소 더욱 순정한 심태로 중생을 구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하는데 열등감, 뽐내는 마음, 허영심, 환희심, 과시심, 질투심, 쟁투심, 색욕심, 두려운 마음 등등의 사람마음은 어느 면에서는 명을 구하는 마음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명을 구하는 마음은 한 그루의 큰 나무와 같고 위에서 말한 사람의 마음은 큰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와 같다. 단지 가지만 제거해서는 그것은 또 서서히 자라날 것이다. 명을 구하는 큰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그것을 해체해야만 상술(上述)한 사람의 마음이 쉽고도 철저하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층차에서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인바 부적절한 곳은 수련생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수련자금기’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수련자금기’

문장발표:2012년 11월 13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3/2653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