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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에 대한 약간의 사고와 인식(2)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전편에 이어) 현지에 한 여성 수련생이 있는데 우리가 보건대 이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에 대해 아주 열정적이어서 수련생을 위해 책임지며 정체를 위한 책임감이 아주 강하다. 수련생들을 극진하게 도와주는데 특히 검은 소굴에서 나온 남자수련생들을 자상한 배려해주어 그들에게 수련생 간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상호협력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정법 노정을 빨리 따라서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고초를 겪었던 남자수련생들은 장기간 잔혹한 박해를 겪었고 나와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데 정말 걸어 나온다면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박해 받는 중에 부부가 이혼한 경우가 많았으며 갈라선 후 어떤 사람은 줄곧 독신으로 있었다. 잔혹한 환경으로부터 느슨한 환경으로 갑자기 바뀌게 되면 수련인으로써 인식이 견고하지 않으면 쉽게 해이해질 수 있다. 이럴 때 그들에게 그렇듯 관심을 보여주고 선하게 대해주며 알뜰살뜰하게 보살펴주는 여자수련자가 있다면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그 여자수련생에게 감격하고 감탄하다가 다시 호감을 갖게 되고 이어서 다시 흠모의 정을 느끼게 되면서 의뢰심이 일게 되며 나중에는 못하는 말이 없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수련과 관련된 일에 대해 말하다가 나중에는 내심에서 정욕이 일어나 여자수련생에게 분에 넘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여자수련생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수련생은 외지로 간 후 날마다 이 여자수련생의 전화를 기다리며 무슨 일이 있든 모두 이 여자수련생을 찾으려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에 수련생 자신이 청성해져서 그런 사념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일은 진실하게 우리 신변에서 발생했다.

여자수련생은 아마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수련생의 최초 소망과는 어긋난 것이 아닌가? 수련생을 도와주는 것은 공덕이 무량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성 수련생 간에 과분한 관심, 너무 잦은 왕래는 수련생에게 꼭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사악이 쉽게 사람 마음을 확대해 틈을 타고 들어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협력 중에서 반드시 소통과 교류를 해야 할 것을 제외한 다른 일에 대해서는 될수록 적게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반드시 한도가 있어야 하며 간단하게 그치는 게 좋을 것이다.

3. 수련인이 적지 않은 이성으로부터 흠모를 받는 것은 거대한 난

속인으로 말한다면 많은 이성에게서 흠모를 받는다는 것은 꿈에서도 바라는 즐거움으로 사람의 허영심과 욕망을 극도로 만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인에 대해서는 이건 오히려 거대한 마난으로 이는 자신의 마당이 정과 색마로부터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수련인이 적지 않은 이성으로부터 흠모를 받는다면 이때는 반드시 경계해야 하고 안으로 찾아야 한다. 일부 협조 사업을 하는 수련생은 자신의 지불과 능력, 그리고 일에 대한 열성은 아마 주변 수련생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 긍정과 찬양 속에 있을 것인 즉 이럴 때 주의하지 않으면 명리심이 일게 될 수도 있고 부지불식간에 더욱 팽창할 것이다. 만약 주위에 이성 수련생이 많다면 사람들의 떠받들림 속에서 색정의 욕망도 아마 확대될 것인바 이런 경우 갑절의 경계심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상대 이성의 망념, 과분한 생각을 모욕으로 봐야지(관념을 개변할 뿐 화를 내지는 말아야) 음미하거나 아름다운 느낌으로 즐길 가치가 없다. 일단 발견했다면 그 즉시 선의로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단호하게 상대 이성의 과분한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상대 수련생을 위한 것이며 자신의 수련에 책임지는 것이다.

나는 한 번 한 젊은 이성 수련생과 한 집안에서 법 실증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색욕지심이 아주 강렬하게 일어났다. 자신의 사념을 결사적으로 배척했지만 욕망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내 상황을 그 수련생에게 알려주어 교류하면서 우리에게는 과분한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수련생은 말이 없었지만 얼굴은 빨개졌고 부끄러워하는 듯이 몸둘 바를 몰랐다. 순간 광적인 욕망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와 수련생은 모두 태연하고 평화로웠다. 일단 이런 상황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폭로하여 덮어 감추지 않는다면 빨리 없어진다. 상대방의 이른바 ‘감정’을 상할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사실은 정말로 자신이 정에서 벗어나 자비로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면 수련생 간에 모두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 만약 정말로 청성하지 못하여 실망감을 갖고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면서 멀리한다면 그건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중히 보지 말아야 한다. 수련생이 아닌가? 일시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해지면 청성해 질 수 있다.

수련생 간에 이미 정이 생겼는지를 판단하려면 한 가지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몇 년 간 우리가 발견한 바로는 일찍이 남녀관계가 있었고 이후에 실질적인 착오를 범한 수련생, 혹은 협력하는 중에 정이 생긴 수련생은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의 표현은 아주 제멋대로여서 서로 간에 이미 존경어가 없어진다. 이런 표현은 수련생이 이미 정 속에 있으며 이미 자비가 없어졌고 정에 미혹됐음을 설명한다. 이런 상황을 발견하면 경계심을 가져야 하고 안으로 찾아보면서 정념으로 수련생을 도와주어야 한다.

4. 부부간의 충정(忠貞)은 행동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부 인연은 신이 안배한 것이고 부부사이에는 본분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부귀하든 비천하든 모두 갈라지지 않고 버리지 않으면 신마저 다 찬탄한다. 선량한 좋은 사람은 혼인을 한 후 일방에 대해 변함없는 충정과 지조를 다하는데 하물며 대법제자는 더욱 그래야 한다. 어떠한 배신행위도 없어야 하거니와 생각마저도 없어야 한다. 한 부부수련생이 있었는데 아내 수련생이 외지에 가서 한 남성 수련생에게 호감이 생겼다. 남편 수련생은 집에서 꿈에 아내가 그를 배신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야말로 ‘사람에게 염두가 하나 생기자 천지가 다 알고 있다’였다.

우리에게 강렬한 책임감, 전통 도덕관념이 있게 되면 과분한 생각을 억제하고 제거하기는 쉬워진다.

5. 자비로 수련생과 중생을 대하자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 가서 홍법하고 세인을 구도하라”(정진요지-이성)고 알려주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수련생이든 중생이든 모두 자비롭게 대해야지 정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정은 불안정한 것이어서 믿음직하지 못하며, 제한이 있고 순정하지 못하며 고층에서 본다면 삼계 내의 더러운 물질이다. 이 정이란 것은 몸을 불태우는 불길이며 사람의 이지를 흐리멍덩하게 하는 미혼약이다.

정과 색으로 수련생을 대하는 것은 수련생에게 부패된 물질을 주는 것에 해당하며 수련생으로 하여금 이지적인 청성함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주게 된다. 정 중에는 수련은 물론 안으로 찾는 것 역시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정으로 의기투합(情投意合)’하면 곧 협력하고, 정이 상처를 받으면 협력을 잘하지 않는다. 억지로 협력한다 해도 원망과 질책뿐이다.

정으로 수련생을 대하면 수련생에게는 정이 생길 수 있고, 이성 수련생이라면 남녀지정, 색욕, 망념을 억제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정 중에 있는 사람은 흔히 모두 당사자로서 잘 모르고 있으며 이미 자신의 과분하고 과도한 언행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자비로 수련생을 대하면 수련생도 순정하여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고도 밝도다.”(전법륜) 신과 신이 함께 있는데 어찌 사람의 색, 정, 욕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련생 간에는 정을 말하지 말고 자비로 서로 돕고 함께 정진해야 한다.

속인에게는 정이 있어 정으로 수련인을 수호하거나 교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으로 그들을 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으로 가족을 대한다면 가족의 정은 더 심해질 수 있고 한 때 수호해 주면 한 때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으로 세인을 구한다면 세인의 표현은 불안정할 것이다. 오늘은 표면적으로는 명백하다가도 내일이면 또 얼떨떨하거나 심지어 또 와서 박해에 참여할 것이다.

정을 이용하는 것은 사(私)와 구함(求)이며 정은 단지 실망만을 가져올 뿐이다. 기(氣)는 기(氣)를 제약할 수 없는데 정이 어떻게 정을 제약하겠는가? 유독 자비만이 청정순정(淸靜純淨)하고, 무사지혜(無私智慧)는 에너지가 강대함으로 비로소 정을 제약할 수 있고 비로소 중생이 구원됨을 방해하는 사악한 물질을 제거할 수 있으며 비로소 유효하게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

어떻게 자비를 수련해 내겠는가? 개인 인식으로는, 먼저 중생과 생명의 실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모두 천상의 왕과 주로서 세간에 온 것은 구도받기 위해서다. 인간의 사랑과 미움, 정과 원한은 단지 극 중의 바보와 미혹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앞에 있는 보통 속인, 가족 그는 이전에 거대한 우주의 왕과 주였을 수도 있다. 이런 각도로 수련생과 중생을 대하고 진정으로 그들의 생명과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자비는 쉽게 생길 것이다. 우리 앞의 어떠한 사람도 특수하게 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수련생과 가족을 포괄해서다. 누구를 특수하게 본다면 바로 정 중에 있는 것이다. 누구에 대해서든 모두 그의 진정한 생명을 위해 배려한다면 비로소 자비 중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참다운 수련 가운데서 선을 닦아야 한다. 사부님은 ‘전법륜(轉法輪)’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선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다.” 제때에 각종 조급한 마음, 쟁투심, 미워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다시 근본적으로부터 세인의 불성을 깨우쳐 준다면 우리 앞의 세인과 가족도 더는 정에 묶이지 않고 이지적이고 청성해졌을 때 어찌 우리와 협력하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비의 강대한 에너지 속에서 정념이 강하면 정마(情魔)는 해체되고 중생은 구원될 것이며, 마난은 사라질 것이다.(끝)

문장발표: 2012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2/2653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