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시 대법제자
[명혜망]
1. 창춘 제2회 파룬따파 서화사진전
1997년 5월 10일부터 18일까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공법을 전수하고 설법하신 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창춘시 난링(南嶺) 체육관에서 ‘창춘 제2회 파룬따파 서화사진전’이 개최됐다.
이번 서화전은 서화계 유명 인사들이 주도하고 창춘 파룬따파 총보도소가 주최했다. 파룬따파를 널리 알리고 인심을 선(善)으로 이끌며 도덕을 승화시키고 중국의 전통 문화예술을 발양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시관 정면에 있던 사존의 초상화
중앙 전시실에 들어서면 정면에 큰 전시판이 있었는데, 정면 중앙에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대형 법상(法像)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파룬(法輪) 도형이 걸려 있었으며, 도형 아래에는 ‘진(眞)·선(善)·인(忍)’이라는 세 글자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왼쪽에는 서문이 있었다. 앞에는 만발한 꽃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측면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장식되어 있었다. 관람객들은 모두 중앙 전시실 앞에서 소중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시실은 넓고 밝았으며 신성하고 엄숙하게 꾸며졌다.
이번 서화사진전 작품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는데, 가장 멀리서는 하이난(海南)에서 왔고 동북 3성 및 성내 각 지역과 현에서도 작품이 왔다. 창춘의 작품이 가장 많았다. 보도소, 연공장, 법공부 팀 등의 단위로 봉헌한 것도 있었고 가정이나 개인 명의로 표현한 것도 있었다. 작품 대부분은 스스로 만들거나 그린 것이지만 붓 다루는 친구나 지인에게 부탁한 것도 있었다. 작품 양식은 매우 다양해서 서예, 회화, 사진, 목각, 전지(剪紙), 자수, 벽걸이 융단, 깃발 및 각종 수공예품 등이 있었고 접수된 작품은 1천여 점에 달했다. 전시실 공간이 제한돼 있어 작품을 최대한 모두 전시하기 위해 전시실 중앙에 칸막이를 설치해 양면을 모두 사용했으며 복도에도 작품이 가득 걸렸다. 그럼에도 나중에 접수된 작품들은 걸거나 진열할 곳이 없었다.
서예 작품 선정작
회화 작품들
이들 작품의 내용은 주로 사부님 설법 원문을 직접 쓴 것이거나 리훙쯔 선생님의 공덕과 대법을 찬양하는 것, 사부님의 제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 대법 법리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수련 체험을 쓴 것 등이었다. 몇몇 연환화(連環畵, 연재 그림)는 질병 치유와 건강 회복, 가정 화목, 도덕 회복 등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묘사했다. 붓 하나하나가 우주의 특성인 ‘진·선·인’에 동화되고 마음을 닦아 선해지는 것을 나타냈다. 매 작품마다 참가자들의 은사(恩師)와 파룬따파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었으며, 모두 자신의 마음으로 쓰고 그리고 만든 것이었다. 서화전 서문에서 말한 것과 같다. “창춘은 사부님의 고향이자 파룬따파의 발원지입니다. 모든 작품은 창춘 수련생들이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법공부와 마음 닦기, 착실한 수련과 고된 연마[實修苦煉]의 장엄한 모습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전체 전시회는 웅장하고 장관을 이루어 마치 대법제자 수련의 긴 두루마리 같습니다.”
이 연환화는 연공장의 발전, 질병 치유와 건강 회복, 가정 화목, 타인에 대한 선의, 법공부와 법에 대한 깨달음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서화전은 입장료도 없고 요금도 받지 않았으며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사람에게 개방했다. 파룬 배지를 단 사람은 수련생이었고 나머지는 대법과 인연이 있는 지인들이었다. 참관객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는데 특히 베이징과 톈진 및 동북 3성의 수련생들이 많았고 외국인들도 왔다.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외지 수련생들은 밤새 달려왔다.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이끌고 가족 단위로 왔는데 아침 7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전시실 면적이 제한돼 있어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해 긴 줄을 서서 뜨거운 태양 아래, 보슬비를 맞으며 기다렸다. 사람들은 사진 찍고 교류하고 방명록을 남기며 떠나기 아쉬워했다.
사진 찍고 방명록을 남기고 있는 관람객들
2. 리훙쯔 대사 전공(傳功) 설법 5주년 기념 서화 휘호회
전시회 기간에 ‘리훙쯔 대사 전공(傳功) 설법 5주년 기념 서화 휘호회’도 열렸다.
휘호회는 두 차례로 나눠 진행됐다. 첫 번째 휘호회는 서화계의 30여 명의 유명 인사들이 참가해 뛰어난 글솜씨와 그림 실력으로 각자의 풍채를 뽐냈는데 그중 대부분이 수련인이었다. 이들 예술가들은 대법의 인연으로 전시회에 모였다. 그들은 전시회를 관람한 후 흥이 나 붓으로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찬양을 표현했다. 참가자 모두가 감동했고 자신의 서화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작품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높이 들어 관람객들에게 보여준 다음 벽에 걸었다. 명가들이 친히 참석했기에 작품들은 모두 최고 수준이었고 품격이 깊어 일반 서화전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정말 성황을 이룬 전례 없는 행사였다. 휘호회에서 89세의 서화계 원로가 사부님께 축수(祝壽)했고 10세의 어린 제자가 경건하게 ‘진(眞)·선(善)·인(忍)’ 세 글자 진언(眞言)을 썼다. 전문가와 유명인사, 민간 서화 애호가, 스승과 제자, 초보자, 국화(國畵)의 각 유파와 진서(眞書), 초서(草書), 예서(隸書), 전서(篆書) 등 각종 서법이 한 자리, 한 탁자에 모여 마음속 생각을 표현하는 이런 광경은 서화계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파룬따파가 성스러운 인연을 맺어주어 이런 훌륭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휘호회가 끝난 후 한 서화계 명가가 이 서화 작품들을 고가에 사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이 작품들의 진정한 내포와 예술적 가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을 국내외에서 순회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중국공산당의 박해와 정세 변화로 실현되지 못했다.
휘호회 현장
두 번째 휘호회의 주필(主筆)은 서화를 취미로 하는 수련생들과 동북사범대학 예술학과 학생들이었는데, 사부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35미터 길이의 긴 두루마리로 합쳐져 웅장하고 장관을 이뤘다.
이번에 동북사범대 예술학과 수련생들은 정말 행운이었다. 졸업 전에 이 서화전에 참가해 심성 제고와 예술적 실천을 얻었을 뿐 아니라 뜻밖에도 사부님을 뵙게 됐다. 많은 수련생들이 회고 문장을 썼고 아름다운 순간을 남겼다.
그날은 1997년 5월 24일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모두들 학교를 떠나야 할 때였다. 모두 한 수련생의 집에 모였는데 마침 사부님께서 오셨다. 사부님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시고 우리는 바닥에 앉았다. 사부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사부님께서 ‘미술창작연구회 설법’(2003년 7월 2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을 하시기 전에 동서양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 비교적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특히 파리의 예술을 칭찬하시면서 기회가 되면 파리에 가서 보라고 하셨고, 앞으로 이 학생들이 미술 전공에서 발휘할 역할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수련생들이 수련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자 사부님께서 일일이 해답해주셨다. 그 후 사부님께서는 모두와 함께 사진을 찍으셨는데 많은 사람의 얼굴에 눈물을 닦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번에 창춘에 오셔서 대법제자들이 연 서화전을 보시고는 “공덕이 무량합니다, 공덕이 무량합니다!”라고 칭찬하셨다.
제2회 서화전이 이렇게 웅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1회 서화전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서화전은 리훙쯔 선생님께서 공법을 가르치고 설법하신 지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1995년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창춘시 하이테크 빌딩[高科技大廈] 전시홀에서 열렸으며, 서예, 국화(國畵), 유화, 판화, 목각, 수채화, 천 붙이기 그림[布貼畫], 자수, 전지(剪紙), 깃발, 사진 및 각종 수공예품, 그리고 《파룬궁(수정본)》과 《전법륜》을 손으로 필사한 것 등 655점이 전시됐다. 5일 동안 참관객은 6천여 명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왔으며 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제1회 서화전 현장
제2회 서화전과 다른 점은 전시회 기간에 성(省)·시 기공 인체과학연구회 지도자들이 전시회장을 방문해 모든 전시품을 자세히 관람했고, 이번 전시회와 파룬궁에 대해 충분한 긍정을 표시하며, 각각 이번 전시회와 파룬궁을 위해 휘호를 남겼다는 것이다. 휘호 내용은 리훙쯔 선생님께서 사람들에게 심성을 중시하고 덕을 중히 여기라고 가르치신 것을 칭찬하고, 파룬궁이 인민에게 이로운 좋은 공법이라는 것, 인민 대중의 심신 건강에 유익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이미 갈수록 많은 인민 대중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하며 파룬궁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이 참관하고 지도하고 대화를 나누고 휘호를 남긴 사진들은 모두 ‘파룬따파는 창춘에 있다(法輪大法在長春)’(내부 자료) 1995년 7월 18일 제6호 4면에 실렸다. 매우 일찍부터 파룬궁을 이해하고 지지했던 이분들이 이 몇 년간의 사악한 박해 속에서 연루되지 않고 바른 생각을 지켜 평안하고 행운이 깃들기를, 파룬궁과 맺은 이 깊은 인연을 헛되이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파룬궁수련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축원이다.
‘파룬따파는 창춘에 있다’(내부 자료) 1995년 7월 18일 제6호 4면의 일부
3. 대법제자들이 연 서화전은 대법의 내포를 보여주는 것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수련하는 사람을 가장 진귀하게 보기 때문에, 오직 수련하는 사람에게만 움직여 줄 수 있다. 어떻게 움직여 주는가? 만약 사부의 위덕(威德)이 아주 높으면, 다시 말해서 사부의 공력이 아주 높으면 그가 당신에게 소업(消業)해 줄 수 있다. 사부의 공이 높으면 당신에게 많이 없애줄 수 있고 사부의 공이 낮으면 다만 조금 없애줄 수밖에 없다. 우리 예를 들어 말해 보자. 당신의 금후 인생행로 중의 각종 업력(業力)을 모두 집중시켜 그것의 일부분을 없애버리는데, 절반을 없애버린다. 나머지 절반도 당신은 넘지 못하는데, 산보다도 더 높다.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무수한 여러 몫으로 나누어 당신이 수련하는 각개 층차 중에 배치해 놓고, 그것을 이용하여 당신의 心性(씬씽)을 제고하게 하고, 당신의 업력(業力)을 전화(轉化)하여 당신의 공을 자라게 한다.”
한 신수련생이 사부님의 설법을 이해하지 못해 생활 속에서 겪는 시련을 한동안 넘기지 못하자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꿈을 통해 수련생에게 사부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려주시며 수련생이 용맹정진하도록 격려하셨고, 수련의 길에서 어떤 장애를 만나더라도 사부님을 믿고 계속 전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 수련생은 꿈을 바탕으로 천 붙이기 그림을 만들어 법리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했다. 이 그림을 본 수련생들은 모두 깊이 생각하게 됐고 깨우침을 얻었으며, 은사(恩師)의 고심과 제도에 마음속 깊이 감사드렸다.
한 수련생이 꿈을 바탕으로 천 붙이기 그림[布貼畫]을 만들어 법리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중공은 대법 관련 서적과 음향 자료 등을 압수해갔고 서화전 작품과 사진도 가져갔다. 악인들은 이 작품들을 경찰학교에 갖다 놓고 박해가 정당하다는 ‘증거’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그중에서 이 천 붙이기 그림을 첫 번째 줄에 놓고 파룬궁이 얼마나 ‘미신적’인지 보라고 했다. 중공 악당은 무신론을 추종하며 신불(神佛)의 실제 존재를 부정한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불법의 무변(無邊)한 위력과 무궁한 지혜를 알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지 19년, 큰 손을 한 번 휘두르시니 불법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오늘날 사악한 세력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대법제자들이 12년간 박해받으면서 생사를 내려놓고 사악에 맞서 얼마나 많은 어둠을 깨뜨리고 인연 있는 사람들을 구하며 오늘날까지 안정적으로 걸어왔는가? 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바로 눈앞에 있다.
중공이 각 기관을 조직해 경찰학교에 가서 파룬궁 서화 작품들을 참관하고 비방하게 했는데 그 며칠 동안 대법제자들도 갔다. 한 무리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대법 서적과 서화 작품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관람 중이던 대법 수련생들이 가져간 것이었다. 당시 수련생들은 온갖 방법을 다해 이 작품들을 되찾으려 했다. 어떤 이는 여행 가방을 들고 갔는데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 작품들이 잘 보관돼 하루빨리 떳떳하게 인연 있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 중에는 수련생들이 봉헌한 ‘천제(天梯,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라는 제목의 유화가 있었는데 매우 의미심장했다. 그림에는 하늘로 곧바로 통하는 사다리가 그려져 있었고 사다리 꼭대기에는 사부님의 큰 손이 있었으며 손에는 연꽃 한 송이를 들고 계셨다. 이 유화는 우리에게 사부님께서 일찍이 가장 아름다운 과위(果位)를 준비해두셨고, 또 우리에게 대법이라는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를 주셨으니 수련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정과(正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노력해서 올라가라고, 쉬지 말고 정진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이 유화를 촬영할 때 그림 앞에 빨간색 에너지 기둥이 나타났고 화면에 빛 기둥을 통과한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그 빛 기둥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이었다.
유화 ‘천제’를 촬영할 때 나타난 신기한 광경
제1회 서화전에는 또 한 작품이 있었는데 수련생이 천목(天目)으로 본 것을 그린 ‘조회가원도(早回家園圖)’였다. 이 그림에는 신묘하고 기이한 선경(仙境)이 묘사돼 있었다. 험준한 산이 연이어 멀리 이어져 있고 누각은 금벽(金碧)으로 빛나며 금빛 다리와 연꽃, 옥 같은 나무와 흰 구름이 있었다. 따뜻한 에너지가 천국 세계를 이루고 있었고 부처님과 보살이 연화대에 발을 딛고 유유자적하게 있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그곳이 우리의 진정한 집이며 그렇게 아름답고 신묘하니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알려주고 있다.
수련생이 천목으로 본 것을 그린 ‘조회가원도(早回家園圖)’
이 작품은 노년 수련생들이 한 바늘 한 바늘 수놓은 매화인데 10여 년간의 박해 속에서도 눈 속의 매화처럼 찬바람 속에 우뚝 서 있다.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혼탁한 세상에 맑은 연꽃 억만 매화 찬 바람에 자태가 더욱 어여쁘네”(홍음2-매화)와 같다. 왜냐하면 매 한 바늘, 매 한 줄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대한 감사와 대법에 대한 반석같이 굳건한 금강지의(金剛之意), 수련에 대한 용맹정진의 결심이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수련생이 이 작품의 사진을 찍었을 때 매화 한 송이마다 부처님 한 분이 계신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부처님이 계셨다.
자수 매화도 ‘눈과 서리를 이겨내다’
4. 서화전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신기한 일들
작가가 이 목판 낙화(烙畵)를 창작하기 전에는 완숙하고 완전한 구도가 없었다. 창작할 때 먼저 화판 중앙에 주존(主尊)의 법상(法像)을 새긴 후 양쪽에 나한과 보살을 새겼는데 각각 모습이 달랐다. 서화전 기간에 어떤 사람이 이 작품을 보고 화면 배치가 매우 묘하다며 양쪽에 각각 아홉 분의 보살과 나한이 계셔서 불가의 가장 큰 수(9)와 딱 맞다고 했다. 작가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그림을 다시 보니 정말 그러했다.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은 본래 이런 구상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안배가 있었던 것이다. 관람객들은 신께서 붓을 움직이신 것 같다며 감탄했다.
목판 낙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창춘 대법제자들은 7일 밤을 연속으로 작업했는데 이 기간에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한번은 한밤중에 모두가 배가 고프다고 느꼈는데 곧바로 누군가가 옆에 많은 음식과 음료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은 후 서로에게 물어보았지만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한밤중에 아무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는데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결국 근처 가게 주인(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두가 돈을 갚으러 갔지만 주인은 “여러분의 사부님께서 사신 거예요”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이 일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한 여성 수련생이 휠체어를 타고 왔는데, 전시실에 도착해서는 두 남자 수련생이 부축해서 걸어갔다. 전시실에 도착했을 때 한 자원봉사자가 그녀가 파룬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이 이미 파룬궁수련생인데 어떻게 혼자 걸을 수 없나요?”라고 물었다. 이 여성 수련생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부축하던 두 남자 수련생에게 손을 놓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웃었고 계속 걸어 정면에 있는 사부님의 법상 앞까지 갔다. 그녀는 양손을 합장하고 “사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눈물범벅이 됐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녀와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그녀는 출산 때 산후풍을 앓아 하반신이 마비됐는데 그렇게 18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몇 분 만에 그녀는 서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어떤 말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릴 수 있을까!
모두가 서화전 장소의 에너지가 매우 강하다고 느꼈다. 장소 밖 상공에는 큰 파룬(法輪)이 회전하고 있었고 장내 곳곳에 파룬이 있었다. 찍은 사진 대부분에서 이런 신기한 모습이 나타났고, 그림 속 연꽃에서 금빛이 발했다.
서화전 현장뿐만 아니라 오고 가는 길에서도 신기한 일이 많았다. 랴오베이(遼北) 지역의 대법제자들이 새벽에 버스를 타고 랴오베이에서 곧바로 창춘으로 향했는데, 가는 길을 잘 몰라 운전기사가 길을 잃었다. 모두가 매우 초조해했는데 이때 인솔 보도원이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갑자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차 앞쪽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큰 파룬이 방향을 인도했고 체육관에 도착해서야 사라졌다.
전시회가 끝나고 몇몇 수련생이 기차에서 서화전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여성도 호기심에 같이 보았다. 그 여성이 사진을 보더니 어지러워하며 당황한 와중에 수련생이 탁자 위에 놓은 사부님 설법 책을 집어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내 몸에 있는 것(큰 뱀)이 견딜 수 없어 해요!” 그것은 그녀에게 “이 장(場)은 너무 바르다. 여기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큰 뱀 부체(附體)가 붙어 있었는데 이미 20여 년이나 됐다고 한다. 평소에는 늘 그녀에게 ‘신백낭자전기(新白娘子傳奇)’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수련생들이 이 여성에게 이치를 설명하며 그런 부체는 모두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정법을 수련하면 우리 사부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며 “일정압백사(一正壓百邪, 바른 것 하나가 백 가지 사악한 것을 제압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듣고 파룬따파를 수련하겠다며 부체를 떼어내고 싶다면서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청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그녀는 더러운 것을 많이 토해냈고 곧바로 안색이 붉어지고 눈도 맑아졌으며 정신도 좋아졌다. 그녀는 그 큰 뱀이 갔다고 했는데, 갈 때 그녀에게 “양심이 없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부님의 모든 설법 책을 구해 꼭 대법을 잘 배우겠다고 말한 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서화전이 대법 홍전(洪傳)에 미친 영향은 정말 가늠할 수 없다. 참관한 일반인 중에는 그 자리에서 대법에 들어선 사람도 있었고 차례로 인연을 맺은 사람도 있었다. 과거에 정진하지 않던 수련생들이 자극을 받아 용맹정진하게 됐고, 법리에 의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신념을 굳건히 했다.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격려를 받았다. 아래 그림은 수련생이 그린 창춘 파룬따파 연공장 분포도인데 97년 창춘에서의 대법 형세를 반영하고 있다. 이미 도처에 꽃이 피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99년 중공이 박해할 때 통계에 따르면 창춘시에서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수련생이 8만여 명이었다고 한다(실제 인원은 이 숫자를 훨씬 넘는다).
5. 서화전 전시 과정은 대법제자들의 수련 과정
전시회에 참여한 모든 수련생들은 한 번의 단련을 체험했다.
서화전 전에 수련생들이 비를 무릅쓰고 회의실에 와서 밤 새워 작품을 만들고 있다.
대법 수련은 완전히 남을 위한 것이며 서화전의 전 과정은 정말로 수련인의 심성과 경지를 체현해냈다. 기간 중 모든 사전 준비, 현장 조직, 서비스, 그리고 후방 작업까지 모두 대법제자들이 자원해서 맡았다. 차가 있는 사람은 차를 내고,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기술이 있는 사람은 기술을 썼다. 분업이 명확했고 누구나 자신이 마땅히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가리거나 미루는 일이 없었다. 어느 한 고리, 어느 한 세부사항이든 모두 수련생들이 조용히 와서 했고 정말 유기적인 일체가 되어 빈틈없이 원융시켰다. 모두 직장이 있어서 낮에는 출근하고 퇴근하면 이곳에 와서 작품을 정리하고 세고 분류하고, 받침대를 만들고 붙이고 걸고, 작품을 진열하고 방을 청소했는데 한번 하면 밤을 새웠다. 그중 많은 수련생이 연공장 보도원으로 녹음기를 들고 현수막을 거는 일을 맡았다. 모두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 녹음기를 연공장에 갖다 놓고 다시 집에 와서 가족들을 위해 아침을 해주고 출근했다. 근처에 사는 일부 노년 수련생들은 자원해서 서화전 근무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는데, 백여 명분의 밥과 반찬을 집에서 만들어 수레에 싣고 와서 모두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전시대를 만드는 데 합판이 많이 필요했는데 당시 운동장에 합판이 많이 있었다. 모두 그들이 각종 선전을 하고 치운 것이었다. 당시 돈을 조금 내고 서화전에 쓰려고 했는데 수련생들은 또 이것이 낡고 더럽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는데 합판을 실은 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누가 사온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중간에 돈이 좀 더 필요했는데 사람들이 모금할 새도 없이 4천 위안이 든 봉투가 있는 것이 보였고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 돈을 누가 가져온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각종 물품이 부족하면 그것을 본 사람이 가서 보충했는데,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외지에서 참관하러 온 수련생들이 많았는데 모두가 사부님 법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 조별로 찍고 합장하는 모습을 찍었고, 또 가부좌하는 모습도 찍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질서 유지를 맡은 한 수련생이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다른 수련생이 즉시 그녀를 제지하며 “이 수련생들이 사부님 법상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수련생들은 모두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든 안으로 찾을 수 있었고 서로 일깨워주며 제때에 자신을 바로잡았다.
안으로 찾고 자신을 수련하니 환경이 예상치 못하게 더 좋은 방향으로 변했다. 본래 창춘시 난링 체육관과 전시실을 임대하기로 계약했고 수련생들이 밤낮없이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체육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야 해서 이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떡하지?’ 이미 받침대도 다 설치하고 작품도 다 붙여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가 즉시 철수해 그들이 쓸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고 그 후에 다시 밤새워 준비해 서화전을 예정대로 개최했다. 갈등에 직면해 대법은 대법의 선(善)한 해결책이 있었다. 일이 생기면 남을 위해 배려하고 진실하고 선량하게 대하니 상대방이 매우 감동해 무상으로 전시실 한 곳을 더 내주었다. 원래 세 개의 전시실을 임대했는데 나중에는 무상으로 두 개의 전시실을 더 내줬다. 이 일은 서화전의 한 가지 아름다운 일화가 됐고 ‘진(眞)·선(善)·인(忍)’에 따라 수련하는 대법제자의 풍모를 더욱 잘 보여줬다.
당시 서화전을 회고해보면 일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모두 공통된 느낌이 있었다. 수련생들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 사심 없는 헌신, 순수하고 아집이 없는 태도,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했으며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창춘 대법제자들의 전반적인 수련 상태를 대표했다.
서화전이 끝난 후 전체 근무자들이 운동장에서 찍은 단체사진
2002년 ‘5·13’,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지 10주년을 맞아 창춘 두 차례 서화전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부 수련생들이 다시 ‘창춘 파룬따파 제3회 서화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두가 전시 작품 준비를 시작했다. 밤에는 큰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밤새워 만들었다. 한 획 한 획, 한 줄 한 줄에 이런 잔혹한 박해 속에서 대법제자들의 사부님에 대한 그리움,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 정법 수련에 대한 금강불괴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당시 사악이 창궐하던 환경에서 매우 짧은 시간 내에, 그리 크지 않은 범위에서 100여 점의 작품이 모였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중에는 유화, 수채화, 국화(國畵), 소묘, 조각, 도예, 자수, 편직, 그리고 각종 수공예품이 있었다. 전시된 작품에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것, 사악한 박해를 폭로한 것도 있었는데, 더욱 기쁜 것은 진상을 알게 된 일반인의 작품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 수련생은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 제가 서화전을 보러 갔을 때 세 개의 전시실 전체가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역사의 증거이며 피와 생명으로 개척해낸 길입니다. 99개의 종이학을 바라보며 불법 구금된 대법제자들이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는지 생각했습니다… 이때 제 마음속에서 이름 모를 힘이 솟구쳤고 앞으로 아무리 큰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 창춘 대법제자들은 극히 험악한 환경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9년 동안 대법을 굳게 수련하고 사부님을 바짝 따랐으며, 우리는 여기까지 걸어왔다. 12년 동안 사악한 박해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기까지 걸어왔다. 위대하신 사부님의 60세 생신을 맞아 창춘 대법제자들은 사부님께 축수(祝壽)를 올리며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도하시고 우리를 키워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시기를 기다리고 기회와 인연을 만들어 다시 창춘 파룬따파 서화전을 열어 대법의 자비와 위덕을 보여주고, 이 우주 정법의 한 단락 휘황찬란함을 증명할 것이다.
창춘 대법제자들은 사부님을 그리워하며 사부님께서 빨리 돌아오셔서 고향의 제자들과 다시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제자들이 사부님께 축수를 올리며 사부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원문발표: 2011년 5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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