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사유방식을 버리다

글/ 일본 대법제자

[밍후이왕] 단체 법공부 교류 중, 션윈 항목 교류에서 모두들 왜 늘 협조하지 못하는가, 어떻게 해야만 협조를 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했다. 매 번 나는 이런 문제를 들을 때면 늘 생각한다. 나의 대법 사업은 스스로 임무를 완수한 후 수련생에게 부쳐 보내면 끝나므로 수련생과 무슨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으며 이런 문제는 나와 무관하다. 하지만 어느 날 안으로 찾다가 나는 자신이 위사위아(爲私爲我)하는 한 가지 사유방식을 찾게 됐는데 그것이 나와 수련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비협조를 만들었음을 발견하게 됐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나의 가정관은 매우 컸는데 많은 원인을 찾아냈지만 나중에는 남편은 부정적인 사유가 무척 심한 사람이어서 그를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해버렸다. 어느 날 나는 남편을 한바탕 나무란 후 갑자기 내 사유가 그보다 더 부정적임을 의식했다. 날마다 나는 그가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곧장 나의 눈에 거슬리는 곳을 틀어잡고는 그의 일련의 말을 부정했다. 그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그의 장점을 보지 않지? 내가 속으로 그의 장점을 칭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심의 무거운 물건이 단번에 없어지고 홀가분해 짐을 느꼈다.

이튿날, 나는 사무실에 앉아서 주위 동료들을 보고 내 신변으로 지나가는 동료들을 보았는데 자신의 사유 중엔 전부 이 사람은 뒤에서 나를 깔봤고 아주 음험하다, 저 사람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다, 이 사람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작은 이익을 보기 즐긴다, 이 사람은 재간이 있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승진한 후 요즘은 어쩐지 부하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자신의 머리에 담은 것은 죄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자신이 날마다 이러한 사유 가운데서 지나왔다는데 대해 몹시 놀랐다.

며칠 후 나는 단체 법공부 장소에 왔다. 한 수련생이 발언할 때 내 마음속에는 평가가 나왔다. 이 수련생의 최근 몇 차례 발언은 전부 밖을 향해 찾는데 그녀가 어떻게 수련하고 있는 걸까. 불학회 사람이 발언할 때 나의 사유 가운데 또 그녀는 전혀 안으로 찾지 않는데 어떤 때는 말을 아주 중하게 한다, 발언한다는 게 늘 항목의 중요성만 말하는데 누가 그걸 모를까, 마치 자기만 인식한 것처럼,…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신성한 수련 단체 가운데서 내 머릿속에 담은 것이란 죄다 부정적인 평가였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심 깊은 곳에 숨겨진 비협조로서 무서운 것이며, 의식하기 어려운 비협조였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심 깊은 곳에 간격이 있었고 이 수련생, 저 수련생을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특히 형성된 관념, 형성된 사유방식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비자각적인 사람 마음의 표현을 인식함에 있어 아주 어렵게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려놓겠는가?”(20년 설법)

나는 2004년에 법을 얻었고, 2006년부터 정식 수련을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해를 수련하고서 나는 이제야 겨우 자신의 이런 사유방식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사위아 했기 때문에 자아가 일체보다 컸고, 나의 관념이 바로 남을 판단하는 표준이었으며, 남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아를 긍정하고 자아를 찬양하며, 자아에 만족하여 그로부터 자아를 보호했던 것이다. 남을 부정하는 데로부터 가져온 자아 만족감은 사람 이 층면 생명의 내심 갈구로서 사람의 사유는 자아감수, 자아감각, 자아만족이란 이런 ‘정’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사유방식을 반드시 개변해야 함을 의식하게 됐다. 나는 사부님의 ‘홍음3’ 중의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에서 말씀하신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것은 나다”를 떠올리게 됐다. 나는 자신에게 밖으로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안으로는 자신의 결점을 찾아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회사로부터 시작해 우선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일본 동료부터 시도해 보았다. 그를 만났을 때 내 머릿속에는 그의 장점이 나타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내게 됐다. 신기한 것은 바로 이 때 그가 내 담당 구역으로 전근돼 와서 우리 둘은 유쾌하게 또 몇 달을 합작했다. 바로 내가 그의 수많은 장점을 보아낸 후 이 동료는 승진해 다른 부서로 갔다. 나는 이것이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이며, 사부님께서 나에게 내가 깨달은 후 집착을 버리고 자신을 개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됐다.

내가 밖으로 남의 장점을 보는 것을 배워낸 후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서는 또 나에게 자아를 찬양하는 사유방식을 개변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한 번은 우리 화사의 근 20명 되는 중국 동료들이 회의를 열고 업무 토론을 했는데 매 한 항목을 토론할 때마다 나는 모두 자신의 견해를 한바탕 말했고 나는 내가 회사를 위해 마음을 다 하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개별적인 동료들이 싫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회의를 마친 후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나도 다른 사람처럼 회의 때 말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이는 속인의 교활함으로서 수련인은 이런 심태를 갖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전차에 앉아 사고하는데 갑자기 설법 녹음 중의 사부님 말씀이 귀가에 울렸다. 아, 사부님이시여, 전 알게 됐습니다. 수련 후 지혜가 열렸고 속인의 사업에 대해서는 볼 수 있는 게 관건이지만 이는 속인의 사업이므로 깨달음이 아무리 좋다 해도 ‘기(氣)’에 불과하며 분자 이 한 층차에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나의 관념이 개변되자 나는 더는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게 됐다.

이후에 회사에서 회의할 때면 나는 여전히 발언했다. 하지만 자아를 찬양하는 마음이 없었고 말투도 온화했다. 사후 먼저 번 나에게 싫은 얼굴을 했던 동료들이 내 발언은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가치가 있는지 계속 칭찬했다. 이번 수련을 통해 앞으로 자신이 수련 가운데서 무엇을 깨닫고 승화됐을 때나 남의 찬양을 받을 때나 모두 자신을 크게 보지 말고 다만 이 일체를 우주 중의 하나의 극히 작은 입자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20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전에 당신들에게 우주의 개념을 말한 적이 있다. 얼마간의 은하계가 하나의 범위를 구성하는데 이 범위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소우주이다. 몇 억의 이런 우주가 비로소 제2층 우주를 구성했다. 최종으로 우리 우주 체계는 얼마나 큰가. 일조(一兆) 층의 거대한 우주를 한 범위로 말한다면, 일조를 일조 개의 조로 나열하고, 일조 개의 조를 공기의 한 분자로 형용한다면, 온 극장이 모두 이러한 입자이다. 그처럼 많은 우주가 단지 우주 중의 한 공간 속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

이상의 이런 깨달음과 수련하는 과정을 통하면서 나는 계속하여 부정적인 사유 중의 그런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사고했다. 사부님께서는 ‘20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특히 중국 그 환경에서 사당(邪黨)은 중국 전통문화를 파괴해 버리고 한 세트 사당의 것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당문화(黨文化)이다. 그것이 세운 사유방식으로 우주 진리를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심지어는 일부 불량한 사상행위는 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도 서로 저촉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불량한 사상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대법에 따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부님 이 단락 경문은 나에게 명백해 지게 했는데, 자신의 부정적 사유 중의 그런 관념은 당문화에서 왔던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것이란 예컨대 “그를 땅에 쓰러 눕히고 다시 한 발로 밟아 그가 영원히 일어날 날이 없게 하자”란 따위의 말이었는데 언어 속에는 상대방을 철저히 부정하는 어휘로 충만되어 있으며 우리 머릿속은 너무도 많은 흉, 악, 폭의 언어로 새겨져 있다.

나는 션윈예술단 공연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입으로는 찬미하는 어휘 몇 개도 말하지 못했지만 서방 관중들이 션윈을 찬미할 때의 언어는 그렇게도 풍부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알게 됐다. 그것은 신앙이 있는 그런 나라에서는 신을 찬미하는 어휘가 모두 그들 문화 속에,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됐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쉽게 션윈은 세간 예술을 초월한, 신의 역량이고 신의 예술임을 감수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신을 찬미하는 언어로 그들의 감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륙에서 온 우리는? 어려서부터 신을 찬미하는 이런 아름다운 언어를 배운 적이 없으며, 이 방면은 그야말로 공백이다. 그러므로 션윈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션윈 협조팀은 사람들에게 ‘션윈백과’를 잘 읽어보기를 요구했다. 내가 느끼건대 이 학습 과정에 게다가 ‘션윈 3’중의 가사를 외우고 그리고 션윈 보도 중의 그런 풍부한 어휘를 수집한다면 우리 이 방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본다.

신의 사유 방식을 열어놓은 후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전반 수련 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전법륜)란 이 구절의 내포를 더 많이 체험하게 됐다.

문장발표: 2012년 9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9/5/2623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