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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체벌과 고문을 얘기하다

글/충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에 보시라이, 왕리쥔의 충칭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폭로하면서 나는 늘 수련생한테서 노교소에서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지 라는 질문을 받고는 한다. 내가 장시간 벌로 서 있었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을 당했다고 얘기하면 모두 보통 더 물어보지 않는다. 나는 수련생의 생각을 알고 있는데, 나 자신도 이러한 것은 고문의 개념과 아주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장시간 서 있거나 쭈그리고 앉거나 화장실에 못 가게 하는 것은 고문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구세력의 파괴적인 고험의 기점에서 본다면 잔혹한 체벌과 고문은 흔히 아주 분간하기 어려운데, 모두 사람의 심신을 상당한 정도로 피폐하게 만드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수련생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고문의 개념에 대해 나는 일부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되었다. 여기에 써내어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하는데,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진실한 면모를 철저하게 벗기기 위해서이고, 구세력의 대법제자에 대한 일체 박해를 철저하게 부정하기 위해서이다. 타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1강에서 ‘사람의 대뇌가 내보내는 사유는 곧 물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고문을 언급할 때 대부분 수련생이 모두 고문용 의자에 앉거나, 땅고리를 채우거나, 대나무를 박거나, 큰 괘에 올리거나, 사인상(死人床)에 매달거나, 전기 고문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하는 등등을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모두 하나하나 피범벅인 화면들이다. 그러면 다른 공간에서, 그 거대한 물질마당에서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고문에 대해 이러한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틀에 맞추어 놓은 것과 같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면 사악도 탈 틈이 있게 되는데, 당신들 대법제자는 우리들이 고문으로 당신들을 박해한다고 하지 않는가? 너희가 보다시피 우리는 당신들을 서 있게 하거나, 쭈그려 앉게 할 뿐인데 당신은 무슨 근거로 우리가 당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하는가? (주의할 것은 사악은 이미 여기에서 개념을 몰래 바꾸어 놓았다.) 라고 한다. 내가 노교소에 온 초기에 사악한 경찰들은 바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면서 그들은 고문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박해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정돈훈련’에 불과하며, 심지어 경찰들이 ‘정돈훈련’을 받을 때에도 서 있거나 쭈그리고 있어야 하는데 마치 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한다.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미혹과 기편이 있는가.

‘서 있거나, 쭈그릴 뿐이다.’ 표면으로 보기에는 수월한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의 중요한 사악의 요소를 덮어 감추고 있는데, 바로 ‘장기간’이란 것이다. ‘간단한 것’ (자세의 요구가 있다) ‘서 있거나 쭈그리는 것’이 한 사람의 ‘생리극한’을 초과하게 될 때에는 그를 하나의 소위 ‘정돈과 훈련’으로 개괄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는 갑자기 세인들이 부부감정이 맞지 않는 것을 얘기할 때 가끔 사용하던 ‘냉폭력’이란 용어가 생각났다. 이러한 ‘폭력이 아닌 폭력’ – ‘냉폭력’의 부부감정에 대한 살상력은 싸우는 것과 같은 실제 폭력을 훨씬 초과한다고 느껴졌다. 사악이 지금 대법제자를 박해할 때 사용하고 있는 소위 ‘정돈과 훈련’ 수단은 이 ‘냉폭력’과 얼마나 흡사한가.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반드시 구세력은 그들의 소위 대법제자를 고험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대법제자를 박해하면서 절대로 마음이 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똑똑하게 알아야 한다. 그들은 대법제자에 대해 절대로 자비와 자선심이 있을 리 없으며, 정법 후기로 갈수록 그들은 더욱더 온갖 방법을 생각해서 대법제자를 끌어내려고 할 것이다. 장시간 벌을 받아 서 있는 것, 쭈그리고 벌 받는 것, 벌 받아 앉아 있는 것,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는 등등은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새로운 계책, 새로운 수단으로서 게다가 이러한 계책과 수단은 더욱 기만적이고 더욱 은폐되었으며 더욱 잔인하고 더욱 비열하며 더욱 사악하다. 사실 역시 이러하다.

충칭 여자 노교소 예만 들더라도 소위 ‘전향(轉化)’되지 않은 대법제자들은 매일 모두 반드시 아침 6시부터 꼿꼿하게 서 있거나, 혹은 움직이지 않고 쭈그린 채로 저녁 11시까지 있어야 하는데 가끔은 시간이 더욱 길 때도 있다. 꼿꼿하게 서지 않거나 쭈그려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되면 바오자(包夾, 수감된 감시 죄수)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은 물론이고, 단지 서 있거나 쭈그려 있을 뿐이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다리가 아픈 그것은 진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매일 박해가 끝난 후 많은 대법제자의 다리는 모두 푸석푸석해진 만두처럼 부었다. 장기간 이렇게 서 있거나, 쭈그리는 것은 하루하루가 관문을 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매일 반드시 아주 강한 정념과 완강한 의지력이 있어야 비로소 넘을 수 있다. 하루, 이틀은 대부분 수련생이 모두 넘을 수 있지만 15일, 한 달이 되면 일부 수련생들은 넘어가지를 못하며 시간이 길어질수록 넘어가는 수련생들이 더욱더 적어진다. 사악은 대법제자들을 매일 고생시켜 사람을 죽이고도 피를 보이지 않는, 나는 잠시 그를 ‘냉고문’이라고 부르겠는데 이러한 것을 채용하여 대법제자들을 하나하나 구렁텅이에 빠트렸다. 이는 무엇 때문에 노교소에서 적지 않은 대법제자들이 처음으로 박해받을 때 사악이 땅고리를 채우거나, 폭행하거나, 전기 고문을 해도 모두 대법제자의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개변하지 못했지만, 사악의 이러한 장기간의 세워두거나 쭈그려 있게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대법제자가 굽은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명석하게 우리에 대한 사악의 박해목적은 종래로 개변된 적이 없으며, 다만 국제여론의 압력 때문에 사악한 폭행수단과 계책을 바꾸었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치 두꺼운 천을 깔고 사람을 때리는 것처럼 매를 맞은 사람이 내장이 상해도 외관으로는 오히려 조금도 보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특히 해외 수련생들은 고문에 어떠한 틀을 긋지 말아야 하며 우리는 개념을 바꾸어 사악의 박해수단을 철저히 간파해야 한다. 전면적으로 사악의 여러 가지 박해수단을 폭로하여 사악이 빈틈을 타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우리를 계속 박해할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이러한 수단이 바뀐 박해는 사악이 선심을 쓰거나 박해를 경감하거나 고문을 감소한 것이 아니라 더욱 은밀한 고문이고 더욱 사악한 박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근본적으로 이러한 박해를 철저히 부정하고 이 박해를 결속지어 더욱 많은 세인을 구도해야 한다.

문장발표 : 2012년 4월 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4/7/2552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