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미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최근 수련생이 사부님의 2002년 3월 ‘북미순회설법’중에서 정법이 10년이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는 과정에 줄곧 내가 고려하고 집착했던 문제였음을 알았다. 먼저 사부님의 설법을 되살펴보자.
사부님은 ‘북미순회설법’에서 “시간이 길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기독교는 박해를 받고 3백년 후에야 비로소 일어섰다. 중대한 사명을 지닌 대법제자가 보통 수련자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관건은 우리가 어떻게 문제를 인식하느냐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중생 구도에 십년이 더 걸린다면, 당신들은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수련생들 일제히 대답: “할 것입니다!”) (박수) 이것이야말로 대법제자이다. (박수) 물론 십년이 더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수명 또한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매번 이 한 단락을 볼 때 2012년은 마땅히 매우 중요한 한 해이다. 2011년 션윈공연에서 또 천문이 열리는 결말이 있고 게다가 마야문명의 천문학예언이 있어 마음속으로 더욱 내려놓지 못한다. 사실 외부를 향해 희망과 집착을 갖고, 큰 환경의 천상변화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점점 약해지지만 아직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
2005년 사부님이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설법’중 제자의 문답에서 고대 예언에 대한 한 단락 말씀이 있었다. “매체의 명성에는 별로 영향을 줄 것이 없는데, 매체는 바로 매체이지 그것은 무슨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에 대하여 대법제자들이 너무 집착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늘 예언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왜 그렇지 않은가? 라고 집착한다. 곧 법으로 간주한다. 정법이 시작된 후에 일체는, 정법 과정 자체를 포함해서, 모두 미래의 수요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예언은 다만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부님의 어떤 말씀은 마치 그런 일 같은데, 때가 되면 왜 그렇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사실 당신은 모두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집착은 집착이 아니란 말인가? 닦은 것이 아무런 누락도 없어야만 비로소 가장 잘 닦은 것이다.”
“정법이 시작된 후에 일체는, 정법 과정 자체를 포함해서, 모두 미래의 수요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 말은 나의 집착심을 일깨워줬다. 우리가 개인수련은 기초이고 중생구도를 하여 창궁을 구하는 것이 우리 조사정법의 진정한 목적이다. 우리는 중생이 구도 받는 것을 고려하고 미래의 창궁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 일체는 모두 중생의 구원과 정법을 위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성과를 수립한다. 우리가 수련해 내야하고 중생을 구해야 하며 법을 바로 잡아야 하고 대궁이 교체되어야 한다. 이 몇몇 방면에서 서로 연결되고 제약되는데 우선 우리 개인 수련이 기초다.
우리의 대법수련은 대도무형의 길이다. 수련에 누락이 없어야 하고 어떤 마음도 유형이며 누락을 생기게 한다. 나는 나무물통 이론이 생각났다. 물통의 수위 즉 물높이는 가장 낮은 나무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수련 중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련해야 하는데, 어떤 누락도 구세력이 틈을 탈 수 있고 구세력이 번거로움을 만들어 중생을 구도하는데 교란을 한다. 우리는 장래의 각 층차의 왕이다. 어떻게 외계의 환경에 의해 자신의 중생을 관리하는가?
예언이든 정법과정에서의 표현이든 목적은 모두 정법을 위한 것이고 대법제자가 집착심이 생겨 나온 것이 아니다. 부합되든 부합되지 않든 대법제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대법제자의 목적은 조사정법하는 것이고 우리의 서약을 완성하는 것이다. 누가 잠을 깨기 전의 한 시각에 깨기 전을 집착할까? 남김없이 집착심을 수련해 내자.
문장발표: 2011년 12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2/25005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