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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인(眞善忍)을 동시에 수련함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주샤오(九霄)

[밍후이왕] 한 문제가 장시간 나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다른 수련생이나 단체에 문제가 나타날 때 자신의 법 인식이 옳다고 여기고 마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적하면 흔히 효과가 좋지 않았다. 특히 다른 사람을 자극할 때에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하여 말하는 것이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 해결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비록 내가 문제의 본질을 보았다 하여도 표현할 때 무언가가 부족하여 효과가 좋지 못했다는 것을 최근 줄곧 법공부하면서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대법(大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眞(쩐)·善(싼)·忍(런) 세 글자를 갈라놓아도 마찬가지로 眞(쩐)·善(싼)·忍(런)의 특성을 완벽히 구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미시적 물질은 또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줄곧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진(眞) 역시 眞(쩐)·善(싼)·忍(런)으로 구성되었고, 선(善) 역시 眞(쩐)·善(싼)·忍(런)으로 구성되었으며, 인(忍)도 마찬가지로 眞(쩐)·善(싼)·忍(런)으로 구성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해석(淺說善)]

당시 내가 진실한 상황을 말하였고 참말을 하였지만 眞 중에 善과 忍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眞은 眞, 善, 忍으로 구성되었고, 眞 중에 善과 忍이 부족하면 진정으로 순정무사(純正無私)한 眞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돌이켜보았다. 내가 하는 말이 참말일 때 목적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것인가? 아마 두 가지 다일 것이나 순정하지 않다. 내가 참말을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사념(私念)이 많이 섞인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원망, 질책,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실증하려는 마음,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마음(특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조급하게 일을 해내려는 마음, 최악의 경우 일시적 말다툼에 이기려는 마음이었다.

나는 때로 ‘상황이 명백하고 참말을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상대방을 자극하더라도 말해야 한다. 내가 하려는 것은 참말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장악하고 도덕의 최고봉을 점령하여 대포로 다른 사람을 공격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은 도리상으로는 맞아도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심지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사부님께서는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大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일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정진요지-청성)

도리가 맞다 하더라도 단지 그중의 한 방면일 뿐이다. 眞에 善과 忍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면 관용과 포용이 결여되고 기껏해야 사람 중의 ‘곧음(直)’일 뿐이며 법리 중의 眞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일깨웠다. 내가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감수를 고려했는가? 다른 사람의 감당능력을 고려했는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았는가?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는 차라리 말하지 말아야지 강행하면 안 된다. 목적이 좋아도 방법이 부당하면 좋은 마음이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선의(善意)로 말할 때 어투는 자연히 부드럽고 상대방도 도리를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善에도 眞과 忍이 있다. 때로는 다들 표면상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말할 때 상대방을 생각해주는 것 같지만, 여러 번 에돌아 말하는 가운데 각자의 타산이 있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셨다. “반대로 개별적인 수련생 역시 이러한 사람이 있다. 타인을 대함에 있어 표면상에서 매우 선하지만 말에는 매우 많은 자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타인을 자극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매우 온화하게 말하지만(뭇사람 웃음) 그것은 사람을 놀리는 교활한 짓이므로, 그것은 대법제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절대 아니다.”(각 지역 설법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거듭 말하지만 진정한 善을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사심일 뿐이다. 나는 대법제자의 善은 우주진리에 대한 인식이며 생명의 본성을 귀진(歸眞)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상 다정하고 자상한 것은 내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여전히 위사위아(爲私爲我)이기 때문에 진정한 善이 아니다.

진정으로 善을 해내려면 도량과 인내력이 있어야 하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 선한 자에게 善을 행하기는 쉬우나 선하지 않은 자에게 善을 행하기는 어렵다. 밀라레파(密勒日巴)가 자신을 해쳤던 고모에게 법을 말할 때 그녀는 계속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밀라레파는 고모에 대한 혐오를 참고 여전히 그녀를 깨우쳐 끝내 그녀를 제도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선하고 악하고 좋아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잘 대한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선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대가가 없고, 보수를 따지지 않으며, 완전히 중생을 위한 것이다.”(2009년 워싱턴DC 국제법회 설법) 진정한 善은 무사(無私)하며 일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선하지 않은 자를 제재하고 악행을 제지하는 것이 이 생명에 대한 진정한 善이다.

忍에도 眞과 善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화가 나도 원망하지 않고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반드시 대선(大善)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득실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난(魔難)이 올 때, 대법제자가 선뜻 나서서 큰 난을 감당하는 것은 불법진리에 대한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는 정념이 있어야만 태연하게 해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忍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고 대법에 대해 책임지는 내포(內涵)가 있다. 어떤 때는 수련생 사이에서 다른 사람이 법을 엄중히 빗나간 상태가 매우 강하게 나타날 때, 일부 수련생은 어찌할 방법이 없이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든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와 무엇을 다투는가? 수련생에게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듣기에는 도리가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진정한 忍이 아니다. 이것은 모순을 소극적으로 대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忍을 행한 후과는 어떠하겠는가? 아마 일을 망치고 정법이 사람을 구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우리의 忍은 진리를 견지하는 기초에서 관용하고 포용해야 한다. “참음(忍)은 나약한 것이 아니지만, 온갖 수모를 다 참고 견뎌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정진요지2-더는 참을 수 없다) 우리의 忍은 정법수련의 기점에 서 있기에 위사(爲私)가 아니다. 개인의 수련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대법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시할 수도 없다. 대법제자가 정(正)의 요소에 대해 책임지고 일체의 바르지 못한 상태를 바로 잡으며 사람을 구하는 일도 파괴되면 우리는 어디에서 재차 ‘忍’을 말한단 말인가? 이것은 대법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중생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우리는 바로잡을 때, 반드시 眞, 善, 忍을 동시에 수련해야 한다.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다른 사람더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단점을 대법제자에게 여러 번 언급하셨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지적할 때 받아들이지 않는 이것은 眞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주의를 줄 때 고마워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이것은 善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폭발하는 이것은 忍이 아니다. 다른 사람더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 바로 眞하지 않고 善하지 않으며 忍하지 않는 상태이며, 우주특성을 위배한 상태다. 다른 사람더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개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자신을 眞, 善, 忍을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최근 眞, 善, 忍을 동시에 수련하는 데 대한 약간의 깨달음이다. 眞, 善, 忍은 우주의 법으로서 무한한 내포는 조금도 탐측하기 어렵다. 부당한 점은 수련생이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2011년 11월 3일
문장분류: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3/2486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