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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5.13] 진귀한 기억, 영원한 見證(하편)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6. 1994년 5, 6월 쓰촨성 청두에서

1994년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쓰촨성 청두(成都)시에서 파룬궁 학습반이 열렸는데 주최측은 쓰촨성 기공 연구회였다. 학습반은 한 초대소 강당에서 거행됐다.

첫날엔 사람이 다 차지 않았다. 하지만 수련생들은 사부님 강의를 듣자마자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소문이 재빨리 퍼져나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8백여 명이 됐다. 학습반에는 충칭(重慶)에서 따라온 수련생이 적지 않았고 또 동북, 베이징, 후베이, 후난, 구이저우, 광둥, 홍콩 등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수련생도 있었다. 모두들 강의가 끝난 후 몹시 흥분해 함께 교류하기만 하면 끝이 없었다. 서로 상대방의 연락처를 남겨 주면서 각자의 친척친구에게 기회만 있으면 꼭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할 것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1994년 6월 2일 오후, 사업인원들이 방에서 수료증을 만들고 있는데 한 수련생이 노크하고 들어와서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요. 사부님께서 옆방에서 당신들에게 천목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눈을 감으니 일시에 온 몸이 뜨거워지고 양미간이 조여 들었는데 사부님께 엄청 큰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사부님께서 들어오셨다. 다롄의 몇 수련생이 다투어 가면서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우린 영원히 사부님을 따르겠습니다. 영원히 사부님을 따르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부님은 꼭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시오. 천상에서도 우리는 사부님과 함께 있으렵니다.” 사부님은 손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자상하게 웃으셨다. “당신, 당신, 당신, 당신, 때가 되면 나를 따르라고 해도 모두 따르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천국 세계가 있을 것이고 당신들은 그곳의 주지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당신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해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자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누군가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따르렵니다, 따르겠습니다.”

1994년 6월 7일, 사부님께서 낙산(樂山) 대불(大佛)을 유람하셨다. 부두에서 강을 사이 두고 바라보니 우룽산(烏尤山)과 링윈산(淩雲山)의 산모양 자체가 바로 크기가 비할 바 없는 천연와불(臥佛)이었다. 부처의 머리, 부처의 몸, 부처의 발은 우룽산과 동쪽 바위가 이어져서 만들어 졌고, 머리는 남쪽에, 발은 북쪽으로, 세 갈래 강을 인접한 곳에 반듯이 누웠다. 사람을 감탄케 하는 것은 이 유명한 낙산대불이 마침 이 ‘초대형 천연와불’ 겨드랑이 오목한 곳에 단정히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당대의 불상 조각가가 ‘심즉시불’(心即是佛)이라고 한 함의와 고대민간의 ‘겨드랑이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전설을 구현한듯 싶었고, ‘부처 중에 부처가 있다’는 기이한 형상을 이루었다.

배가 강에서 한 동안 가다가 섬과도 같은 불상 머리부위를 에돌아 와불산의 다른 한 면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말했다. “빨리 보세요, 낙산대불이 보여요!”하고 외쳤다. 모두들 머리를 돌리고 보니 엄청 큰 불상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위엄스레 앉아 있었는데 조형이 장엄했다.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겪었어도 오늘까지도 여전히 도도히 흐르는 민강 강변에 안좌하고 있었다. 낙산대불을 미륵좌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대불상이다. 원래부터 “부처는 한 개 산이요, 산은 한 분의 부처”라고 일컬었다. 배 위 사람들은 각도를 다투어 가며 사진을 찍었다. 배는 갈수록 해안에 가까이 다가갔다. 많은 유람객들이 놀이터 명소로 여기고 대불의 발가락, 몸을 밟거나, 엎드려서 사진을 찍는 것이 보였는데 사람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이 사람들은 왜 이 모양이지? 이렇게 하는 것은 얼마나 부처님을 불경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내내 난간 곁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계셨다. 배가 낙산대불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 때 어느 수련생은 낙산대불이 우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서럽게 울고 있었다. 눈물이 구슬처럼 줄지어 아래로 떨어졌고 얼굴 근육, 아래 턱 및 전신이 격렬하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낙산대불이 울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수행원들도 의식했다. 속인의 사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낙산대불도 사부님께서 자신을 구도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의 자비와 위덕은 그야말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해안에 닿았다. 좁다란 아주 가파로운 오솔길을 따라 걷게 됐는데 사부님께서는 수행원을 보호하시고자 그들에게 먼저 가게 하시고 자신은 맨 나중에 떠나셨다. 사부님의 일거일동은 모두 우선 남을 생각하는 것이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낙산대불 신변에 이르렀을 때 수련생은 대불이 웃는 것을 보았는데 매우 즐겁게 웃었다.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또 기뻐서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보십시오. 낙산대불이 웃습니다.” 사부님도 웃으셨다.

7. 1994년 6월 정저우에서

다음 학습반은 정저우(鄭州)였다. 겨우 침대차표를 샀다. 기차에 오르는 그 날은 몹시 무더웠고 역으로 들어갈 때 몹시 붐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짐을 들었고 땀이 등으로 흘렀다. 차에 올라서야 연결된 마지막 객차임을 알게 됐다. 이 객차에는 또 다른 일부 수련생도 있었다. 앞쪽 차량은 청두 철도국의 것이고 이 차량은 정저우 철도국 차량이어서, 앞쪽 객차에서는 이 차량에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해 주지 않았고 물조차 없었으며, 앞 차량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있었다. 나는 몹시 초조했다. 수련생 두 명이 주전자와 컵을 하나 찾아내 차가 멈추었을 때 달려나가 앞쪽 차량에 오른 다음 끓는 물을 담았으나 기차가 이미출발했다. 별 수 없이 다음 역에 도착한 다음 다시 이쪽 차량으로 뛰어왔다. 물은 매 끼마다 사부님께 라면 한 사발을 풀어드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차에 오를 때, 청두 수련생이 큰 복숭아 한 봉투를 사부님께 보내왔는데 사부님께서는 모두 우리더러 먹게 하셨다.

사부님께서 중생구도란 이렇듯 위대한 일을 하시면서도 생활은 오히려 이렇듯 청빈하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괴로웠고 무한히 숭배심이 저도 모르게 솟아올랐다.

이 객차는 가장 마지막 꼬리였다. 기차가 화산(華山)을 지날 때 사부님께서는 객차 끝에 오래오래 서계시더니 먼 산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화산입니다”라고 하시기에 우리가 따라서 바라보니 화산에서 수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서 사부님을 보면서 기차를 따라 걸었다. 어떤 수도인은 줄곧 정저우 학습반까지 따라 왔다.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 나의 제자들이 어떻습니까?”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수련했지만 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했다. 이후에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이 일을 말씀하셨다. 어느 수련생은 수많은 수도인들이 고대 옷차림을 하고 산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부님께 절하는 것을 보았다.

정저우 학습반은 지금까지의 매번 학습반 중에서 조건이 가장 나빴다. 기공협회는 ‘풍우축구장’이라 부르는 버려진 체육관을 찾아냈는데 중간 바닥은 낡아빠져 얼룩덜룩 했고, 사면의 관람석은 벽돌로 쌓은 계단이었는데 성한 곳이란 없었으며 오래된 창문들은 유리마저 없었다. 정저우 파룬궁 학습반 주최측은 정저우시 기공협회였다. 1994년 6월 11일부터 6월 18일까지 이 학습반에 약 1500명 사람이 참가했다. 수련생은 전국 각지, 구이저우에서 왔고 동북에서는 팀을 구성해 참가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의 비용이 비싸고 시간이 바쁜 것을 고려해 10일을 8일로 줄이셨다. 이틀은 날마다 두 번씩 강의하셨는데 오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셨다.

며칠 후 주말, 그 날은 오후 4시에 강의가 있었다. 본래 태양이 있었는데 강의를 하는데 갑자기 천기가 돌변하더니 온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이고 하늘이 시커멓게 됐다. 바람이 불더니 뒤이어 큰 비가 억수로 퍼붓고 우박이 내렸다. 우박은 천정을 콩 볶듯 두드렸고 기와 틈 사이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학습반 조명등이 꺼졌고 장내는 어둠 속에 잠겼다. 빗물이 천정에서 새어 들어와 강의하는 책상에 떨어졌다. 사부님께서 책상을 한편으로 옮겨 놓으면 빗물은 따라가며 떨어졌다. 수련생들은 술렁대며 불안해서 모두 사부님만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책상을 옮겨놓으면서 유머 있게 말씀하셨다. “때마침 여러분을 시원하게 해 주는군요.”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이어서 사부님께서는 석가모니 제자들이 마가 그들 사부가 설법하는 것을 교란할 때 오히려 안정되고 조용해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수련생들은 재빨리 평온을 되찾았고 장내는 비할 바 없이 장엄했다. 사부님께서는 강단에 앉으셔서 대연화 수인을 하신 다음 책상 위의 생수병 뚜껑을 열고는 오른손을 공중을 향해 꽉 틀어 쥐셨다. 내가 보니 잡은 것은 굉장히 큰 괴물이었는데 하마 같았다. 가죽이 아주 거칠고 아주 늙었는데 잿빛 얼굴, 목에는 주름이 가득 했다. 사부님께서 수인을 하시면 그 괴물은 쭈그러들고 작아져서 사부님에 의해 생수병 안으로 들어갔고 뚜껑을 닫았다. 이 때 사부님께서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도가 한 자 높으면 마가 한 장 높다는 말입니까. 그런 설법은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아주 큰 일을 해 주었는데 많은 것들을 떼어 주었습니다,” 전 장내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일시에 바람이 멎고 비가 그쳤으며 불이 켜지고 태양이 다시 나왔다. 또 다시 정상적으로 수업할 수 있게 됐다.

수업이 끝난 후 보니 체육관 주위에는 물이 가득 고였고 거리의 가로수들이 적지 않게 부러졌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할머니가 수련생을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방금 있던 일은 자네들을 겨냥한 것이 아닌가?” 수련생은 깜짝 놀랐다. 백성마저도 이런 일을 알고 있다니. 현지 텔레비전, 신문들도 이번에 돌발성 재난을 보도했다. 광풍폭우가 휘몰아쳐 나무가 넘어지고 지붕이 날아갔다고.

매일 8, 9시 수업이 끝난 후에야 사부님께서는 라면을 드셨다. 하루는 신변에 있는 수련생들이 수고하는 것을 보시고 사부님께서는 작은 식당으로 가셨다. 각자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한 젊은이가 입구에서 서성거리다 사부님 앞으로 걸어와서 꿇어앉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저를 받아 주십시오. 저는 사부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즉시 일어나시더니 반 걸음 물러서서 젊은이를 부축해 일으키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형식을 차리지 않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연마를 잘하고 수련을 잘하십시오. 나는 수련생을 모두 제자로 여깁니다.”

학습반을 마칠 때 주최측 책임자가 대회에서 전체 수련생들에게 격동해서 말했다. “첫 날 오전 설법하실 때 마이크 소리가 잘 조절되지않아 수련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후에는 소리가 아주 똑똑해 졌습니다. 이건 당신들 사부님께서 점심 휴식시간을 이용해 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부님은 그날 점심도 드시지 못하고 휴식도 못했으며, 또한 우리에게 알려주시지도 않고 본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묵묵히 하셨습니다.”

정저우 학습반이 끝날 때 많은 수련생들이 금색 기를 드렸는데 제일 큰 깃발에는 커다란 ‘불(佛)’자가 씌어 있었다. 이는 후베이 수련생이 드린 것이다.

한 젊은 도사는 1993년에 파룬궁을 배웠고 이번 학습반에 참가해 직접 사부님 설법을 듣고 직접 사부님 위덕을 느꼈으므로 꼭 사부님과 단독 사진을 찍을 것을 청했다. 학습반을 마친 그 날, 사부님께서는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도사는 새 도포를 입고 긴 머리를 정갈하게 빗고 나서 격동해서 말했다. “정말 행복합니다!”

8. 1994년 6월, 지난(濟南)에서

정저우 학습반 이후 사부님께서는 뒤이어 1994년 6월 21일 지난(濟南)에서 학습반을 열고 대법을 친히 전수하셨다. 장소는 지난시 황팅(皇廳)체육관이었고 참가인원은 약 4천 명이었다. 주최측은 산둥성 청소년 과학기술 문화 서비스센터였다. 외지에서 반을 따라다니는 수련생이 엄청 많아 첫 시작부터 입장권을 살 수 없었다.

한 수련생이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강의장으로 들어가실 때마다 다른 통로로 지나가시는데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신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어떻게 일일이 다 악수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 얼마나 힘드실까.”

1994년 6월 28일은 지난 학습반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부님께서는 학습반에서 재삼 여러분에게 당부하셨다. “내일 다롄에 가서 강의를 들을 수련생이 있다면 절대로 비행기를 타지 말고 기차를 타든지 배를 타든지 하십시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 항공편은 큰 폭우를 만났다고 한다. 회의 후 사부님께서는 줄곧 대문 입구에 서서 수련생을 기다리시면서 당일 기차표를 사서 돌아가는 수련생을 기사에게 기차역, 버스역으로 실어다 주게 자세히 알려주셨다.

6월 30일, 많은 수련생들은 쾌속정을 타고 다롄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쾌속정이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물 위에서 나는 것이 아주 편안하게 보였는데 정작 앉으니 감각이 달랐다. 그네를 뛰듯 흔들거리면서 공중으로 올라갔다가는 갑자기 떨어지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두 멀미하고 토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정말로 해상에서 날고 있는 감을 느꼈다.

9. 1994년 7월 다롄에서

1994년 7월 1일 아침, 다롄(大連) 수련생은 다롄항 부두에서 사부님을 맞이했다. 우리가 부두에 도착하니 많은 수련생이 이미 조용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사부님을 환영한다는 족자를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꽃을 들고 있었다. 점심 때쯤 되어 사부님께서 쾌속정을 타고 도착하시자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두 줄로 서서 사부님을 환영했다. 사부님은 미소로 답하시면서 차에 오르려 할 때 수련생들이 열정적으로 몰려들면서 꽃을 드리고 인사했다. 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부두에서 구경하던 일부 관리자와 노동자들은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 당신들은 이렇게 성대하게 환영합니까!”

학습반 수련생이 갈수록 많아져 수료증을 만드는 노동량이 아주 컸다. 당시에는 이튿날 아침 7시에 뤼순(旅順)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방안에는 먹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단지 라면 한 봉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사부님 아침 식사로 남겨둔 것이었다. 아침 6시 남짓해 사부님께서 노크하고 들어오셔서 아직 물에 담그지 않은 라면을 들고서 웃으시면서 여러 사람을 둘러보시고는 낮은 소리로 물으셨다 “온 밤 못 잤습니까?” 한 수련생이 “예”하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라면을 책상 위에 가볍게 놓으면서 말씀하셨다. “얼른 먼저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드십시오!” 말씀을 마치고는 나가셨다. 4,5명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 사람이 한 입씩 다 먹어 버렸다. 그러자 온 밤을 지새운 피로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사부님께서는 이날 식사할 틈이 없어 빈속으로 사업인원들과 함께 뤼순으로 가셨다.

10. 1994년 12월 다롄 마지막 회 전수반과 마지막 보고회

1994년 12월 21일부터 29일까지 광저우 제5회 학습반이 광저우 체육관에서 열렸는데 참가인원은 약 6천명이고, 주최측은 광저우시 인체과학 연구회였다. 학습반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모두 왔다. 이 회의 학습반에는 대륙인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 해외 인사도 참가했는데 이는 한 차례 국제적인 학습반이었다.

학습반 첫 날, 홍콩에서 막 달려온 여성 수련생은 숙소도 마련할 사이 없이 짐을 끌고 학습반으로 곧바로 왔다. 또 한 서양 수련생은 중국어를 잘 모르지만 대법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꼭 와서 사부님 설법을 들으려 했다. 그는 키가 아주 컸지만 강의를 들을 때 내내 쌍가부좌 했다. 그와 함께 온 사람들로는 그의 부인과 두 살쯤 된 딸이었다.

주최측의 5-6천장 입장권은 다 팔렸는데 아직도 수백 명 사람이 표가 없었다. 광저우 노 수련생 및 기타 지역 노 수련생들이 2백여장 표를 양보해 일부 신수련생의 입장을 해결했다. 한 외지 수련생은 앞당겨 광저우에 도착해 각종 관계를 통해 겨우 표 10장을 얻었으나 여전히 부족했다. 광저우 보도소장은 그녀에게 여전히 표가 없는 것을 보고 그녀를 도와 몇 장을 얻어 주었다. 이렇게 32장 표를 얻었으나 그녀 자신은 한 장도 자신에게 남기지 않고 모두 신수련생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바깥 분회장에 설치한 텔레비전 중계로 사부님 설법을 들었다.

학습반 첫 날, 7-80명 표가 없는 수련생이 밖에서 서서 듣고 있었다. 동작을 가르치실 때 사람을 파견해 밖에서도 가르쳐 주셨다. 사부님께서는 강의를 마치고 강의장 밖에 나오셔서 수련생들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온 사람이 너무 많아 주최측에서도 방법을 대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깥의 들어오지 못한 수련생은 안의 수련생과 마찬가지로서 당신들도 당신들이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수련생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직접 주최 측, 체육관 지도부와 협상해 이튿날 체육관 회의실에 분회장을 설치해 텔레비전으로 사부님 설법을 동시 시청하게 하셨다. 체육관 직원은 불가사의하다면서 말했다. “우리는 그간 얼마나 많은 활동을 접대했던가. 그래도 이렇듯 경견한 적이 없다. 수천 명 사람이 강의를 듣는데 그야말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정말 감동적이다!” 열흘 동안의 성대한 활동중,수 천명 사람들 중에서 다투고 떠드는 사람이 없었으며 잃어버린 물건은공고해 찾을 수 있었고,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서로 양보했고, 지위 구별이 없고 빈부귀천 구별이 없었다. 이곳은 한 뙈기 정토였다!

어떤 수련생은 이 법을 얻기 위해 고향에서 구운 떡에 장아찌를 메고 머나먼 동북 농촌에서 달려왔다!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온 나이 많은 남자 수련생은 사부님 설법을 듣고 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격동해서 말했다. “내가 가장 북쪽인 쟈무스에서 가장 남쪽인 광저우까지 8천리 길을 전전하면서 온 것은 이곳에 와서 사부님 설법을 듣기 위해서다. 나는 대법을 얻었다. 가치가 있다. 행운스럽다!” 한 치치하얼 수련생은 광저우에 와서 야채를 사먹지 못해 입이 다 헐었다. 어느 한 번 수업 여가에 광저우 보도소장과 한담을 할 때 무의식 중에 이 일을 말했는데 생각 밖에도 구이저우 보도소 소장이 사부님께 이 정황을 여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한 번은 강의하시는 중에 사부님께서 회의장 밖 분회장에 오셔서 이곳 수렴생들을 만나 주셨다. 이건 그야말로 뜻밖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수련생이 모두 울었고 사부님도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과 일일이 악수하셨다. 사부님과 수련생들은 서로 마주 서서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모두들 아무 말도 없다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밖의 수련생은 안의 수련생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누군가 격동되어 울음을 터뜨렸다.

학습반이 끝날 무렵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아주 먼 외지에서 찾아오셨는데 3천 명은 됩니다. 가장 먼 곳은 헤이룽장, 신장(新疆)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고생을 하셨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비용이 부족해 라면을 드시고 과자를 드시는 분들도 다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일부 수련생의 경제적 곤란을 감안하셔서 학습반을 하루 줄이고 날마다 수업시간을 연장하셨으나 설법 내용은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학습반을 꾸린 기간 매일 아침이면 수련생들은 녹음기를 들고 웨슈 공원에 가서 연공했는데 연공음악이 울리기만 하면 수련생들은 동남서북 어느 곳에 있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함께 모여 연공해 상서로운 정경을 나타냈다.

설법이 끝나는 날, 사부님께서는 장내를 한 바퀴 돌았는데 많은 수련생들이 너무나 격동해서 앞으로 몰려와 사부님과 악수했다. 사부님께서는 한 농민이 아주 열등감에 젖어 늘 사람들 뒤로 숨는 것을 보시고는 여러 사람과 사진을 다 찍고 난 후 그의 신변에 오셔서 그와 악수하시면서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저는 당신이 아주 먼 농촌에서 법을 얻으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얼떨떨하게 선종을 수련했고 또 새롭게 유명한 사부님을 찾게 된, 먼 외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온 이 수련생은 일시에 뜨거운 기류가 머리에서 전신에 퍼지는 감을 느꼈다. 그는 드디어사부님을 찾아 기뻤고 사부님의 그 홍대한 자비와 겸손하고 온화하고 친화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기 무척 힘들었다. 한 노인 수련생은 12장 표를 사야 했는데, 역에서는 한 사람이 한 장만 살 수 있다고 규정했다. 매표원이 물었다. “당신에게 무슨 특수 증명 같은 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는 사부님 사진을 꺼내 매표원에게 주었더니 그에게 12장 표를 주었다.

1994년 12월 29일, 광저우 제5회 학습반이 원만히 끝났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대륙에서 여신 마지막 학습반이었다.

국내 마감보고회는 다롄에서 했다. 다롄 보도소는 수련생에게 통지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공항에 가서 사부님을 맞이했다. 여객들이 드나드는데 영향주지 않게 하기 위해 홀우측통로 양쪽에 정연하게 섰는데 출구로부터 광장까지 늘어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행인들이 “오늘은 무슨 사람이 오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지?”고 물으면 수련생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 우리 사부님께서 오신답니다!”

파란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한 송이 나타났는데 짙은 오렌지색과 비슷했다. 비행기 한 대가 구름을 따라 들어가더니 구름이 헤쳐졌다. 약 10분 후에 사부님께서 손에 생화를 드시고 극히 일반적인 검은색 솜옷을 입으시고 홀을 걸어나오셨다.

1994년 12월 31일, 사부님께서는 다롄 싱하이(星海) 체육관에서 설법보고회를 가졌는데 3시간 설법하셨다. 약 6천6백 명이 참가해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다. 사부님은 이로서 중국 대륙에서의 전법전공(傳法傳功)을 종료하셨다. 같은 날, 사부님께서는 ‘원만에 동화’란 시를 쓰셨다. “건곤은 망망한데 일륜이 금빛 뿌리네. 각자가 세상에 내려오나니 천지가 함께 향하도다. 우주는 맑고 맑아 법광에 동화되네. 원만하여 날아가려니 다 함께 천당으로 돌아가리라.”

보고회가 종결될 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전체 수련생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사부님을 우러러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강단에서 큰 파룬을 돌리셨다! 사부님께서는 강단에서 내려오셔 장내를 한 바퀴 돌면서 손을 저어 감사를 표시하셨다. 사부님이 이르는 곳마다 한 갈래 따스한 기류가 미미하게 지나감을 모두들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후 사부님께서는 서서히 체육관을 걸어 나가셨다. 수련생들은 프랑스에서 사부님을 요청해 사부님께서 곧 출국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심정이 이전과는 달라 헤어지기 아쉬워 사부님을 따라갔다.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묵묵히 수련생들과 작별하셨다. 사부님께서 몸을 돌리시고 앞으로 걸어가시는데도 수련생들은 여전히 가지 않고 사부님을 빼곡히 둘러싸고 가다가는 멈추고, 멈추다 가고 하면서 십 몇 분이나 묵묵히 걸어갔다. 이 때 12살 된 동북 사내아이가 침묵을 깨뜨리고 다정하게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사부님은 몸을 돌리시고 사내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롭게 말씀하셨다. “잘 수련하거라!” 이 목소리는 사람들 상공에서 오랫동안 메아리 쳤다. 마치 금방망이처럼 수련생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 사부님은 차에 오르시지 않았고 수련생들은 사부님을 겹겹이 에워싼 것이 마치 거대한 연꽃 같았다.사부님은 금빛 꽃술 같았고 수련생은 꽃잎 같아 겨울 햇빛 속에 활짝 피어났다. 하나하나의 금과도 같은 그 마음은 사부님에 대한 무한한 숭배를 뿜었고 온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 한 시각 공기가 굳어진 듯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조용히 사부님만 쳐다보면서 사부님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을 마음속에 아로새기고자 했다. 많은 수련생들이 모두 묵묵히 석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끝맺는 말

중원대지는 불광(佛光)에 푹 잠겼고 행복했던 시절은 총총히 지나가 버렸다. 이곳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발생했지만 편폭의 제한으로 여기까지만 쓰려 한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우리를 일깨워 주셨고 ‘전법륜’은 바로 우리가 찾으려던 법이다! 천기가 숨겨 있으니 진귀하기로 비할 것이 없다! 바로 사부님께서 ‘연귀성과’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부님을 찾은 지 몇몇 해던가. 하루 아침 직접 뵈옵게 됐구나. 법을 얻어 되돌아 수련하거니 원만하여 사부님 따라 돌아가리라.” 내가 이상의 이런 직접 겪은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진선인(眞善忍)’ 법리는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열심히 체험하노라면 오묘함이 그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데 있다. 독자들께서 천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기연을 소중히 여기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11년 5월 1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3/2405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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