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명혜주간’(중문 488호 한글 252호)에 실린 ‘정진에 관하여 말해보자’를 읽고 동감되는 면이 많고 또한 많은 계발을 얻었다. 정진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진일보 인식을 갖게 됐는데 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진의 여부는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바로 자신이 일마다, 모순마다, 매 곤란 앞에서, 매 심성고험에서, 말할 때마다, 매 일마다의 수련 여부 문제다.” 수련생이 정진해 착실히 수련하는 부분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이미 매우 정진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나는 또 정진, 이 단어는 사부님 혹은 수련생이 한 수련자에 대한 채찍질임을 인식했다. 수련생들은 모두 안을 향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대법 속에서 정진해 착실히 수련하는 대법제자는 자신이 수련에서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예를 들면 법공부를 어느 정도로 마음에 파고들게 하고 있는가,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함에서의 부족함, 매 수련 항목에서의 완성되는 질에 있어서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심성은 또 얼마나 제고했는지 등등이다. 정진의 정도 여부는 또 인체의 외재적인 표현으로 전부 반영되어 나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음 속에 버림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법은 부동한 층차가 있으므로, 수련자가 법에 대한 인식 역시 자신이 이 한 층에까지 수련된 인식이며 개개 수련자가 법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도 매 사람이 있는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정진요지-빠짐이 없게 하자(無漏)』) 때문에 정진하는 대법제자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더욱 깊은 내포가 있다. 한 사람이 대법을 얻은 후 진상을 명백히 알고 끊임없이 법공부를 마음에 파고들게 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신사신법을 확고히 하는 강대한 신념이 생겼고 그럼 이 사람은 수련 과정에서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중생을 구도하고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각종 집착을 제거하고 심성을 제고하는 과정 중에서 아마 매우 정진하는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중국대륙의 이 환경 속에서 대법제자가 직면한 형세는 여전히 매우 엄혹하며 사악은 아직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있다. 또 어떤 대법제자는 병마의 교란 형식을 받고 있으며 정말로 “백가지 고생이 한꺼번에 내리거니”(『홍음-마음 고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실 이런 형세일수록 더욱 대법제자의 풍모를 떨치고 이럴수록 진수하고 착실한 수련하는 정진의 정도를 체현할 때이다. 사부님께서는 거듭 수련에서 한 일체는 모두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발정념이든 진상 알리기든 수련생을 구출하고 대법의 각종 항목에 참여하는 것이든 모두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을 능히 대법 속에 용입(溶入)시키고 몸과 마음 전부를 수련 속에 투입한다면 나는 그가 반드시 매우 정진하고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어떤 수련생이 수련에서 매우 정진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았는가? 나는 정진의 여부는 표면현상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매우 미묘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련생이 수련과정 속에서 이는 만고의 기연으로도 만나기 힘든 대법임을 알고 이 대법을 얻었으며 마음을 격동된 나머지 수련하기로 결심했다. 대법의 일을 많이 하고 진상을 많이 알려 사람을 구도하며 자신에게 더욱 큰 위덕을 건립해 원만으로 수련 성취되려 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보기에 이미 누락이 있는 것이다. 심층의 의식 속에는 아직 일종 구하는 마음이 있으며 아직 일종 위사위아의 마음이 있다.
수련과정에 모순은 항상 있으며 착오 또한 피하기 어렵다. 정진하는 대법제자도 마찬가지로 착오를 범할 수 있고 모순에 봉착할 수 있다. 관건은 일에 봉착해 대법에 서서 인식할 수 있는지, 자신을 연공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안을 향해 찾는 이 법보(法寶)를 사용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다.
사부님은 하나의 대법제자도 빠뜨리려 하지 않으시며 자비로운 사부님은 거듭 착오를 범한 제자에게 고칠 기회를 주시고 있다. 때문에 무릇 문제가 나타난 대법제자는 여전히 대법으로 자신을 가늠하여 봐야 하며 반드시 어느 문제에서 심성에 누락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은 법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대법으로 거듭난 대법제자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으며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으며 사악의 박해를 승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인받지 못하고 강제로 박해하는 것은 법을 범하는 것으로 우주의 낡은 이치 역시 허용하지 않으며”(『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서 사람마다 모두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고 넘어야 할 고비가 있다. 마난에 봉착해 신체에 각종 상태가 나타났을 때 확고히 신사신법하고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나는 이것을 정진이라 여긴다.
현재 층차에서의 인식으로 수련생과 교류하는 것으로 자비롭게 지적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1년 6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6/7/2420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