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長春)대법제자
[밍후이왕] 매번 『전법륜』제 3강 “우리가 저번에 길림대학(吉林大學)에서 학습반을 열 때…..” 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특별한 행운과 영광을 느끼곤 한다. 1992년 9월부터 1994년 9월 사이 사부님께서는 일곱 차례나 친히 길림대학에 오시어 법을 전하셨는데 세 개의 파룬궁 학습반을 꾸리셨고 연공장을 직접 선정해 주시기도 하셨으며 그밖에 길림대학 수련생들과의 좌담회, 창춘시 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연공장을 친히 방문하시는 등 (길림대학이 소재한) 창춘은 사부님의 고향으로서 대법의 드넓은 은혜와 복을 받은 고장이다.
사부님께서 길림대학 학습반 때의 일을『전법륜』에 언급하신 역사는 미래의 우주 중에 영존할 것이며 이 소중한 기억은 길림대학 대법제자들이 대법 중에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자신의 책임과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며 사부님의 자비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줄곧 고무격려해 주고 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한지도 이미 19년이 되었다. 사부님께서 그 해 길림대학에서 법을 전하시던 정경을 회상하면 아직도 눈에 선하여 바로 어제였던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이 소중한 기억을 기록하여 동수들과 나눔으로써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맞아 사부님께는 선물로 드리고 또 동시에 우리들의 염원도 이루고자 한다.
사부님께서 친히 연공장을 선정해 주시다
1992년 9월 17일, 장춘 제4회 파룬궁 학습반을 마치시고 사부님께서는 북경으로 가시려고 차표도 이미 사 놓으셨다. 학습반에 참가했던 길림대학의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장춘을 떠나시기 전에 길림대학에 와 보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는데 사부님께서는 동의하셨다.
9월 17일 이른 아침, 사부님께서는 낡은 자전거를 타시고 이화루(理化楼) 후면의 작은 수림(樹林)으로 오셨고, 그 곳에서는 몇 명의 수련생이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손으로 과학기술관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저기로 갑시다. 내가 당신들에게 장(場)을 청리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길림대학 첫 번째 연공장 ㅡ 과학기술관 연공장이 만들어졌다. 이는 사부님께서 친히 선정하시고 場을 청리해 주신 곳이다.
이곳은 조용한 작은 화원으로서 벽돌로 깐 통로가 있으며 또 넓고 밝았다. 후에 이곳에 와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져 곧 들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95년 이후 이곳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길림대학 연공장은 채 3년이 되지 않아 7개에 달했고 연공장마다 7,80명 정도로 총 5백 여 명이 수련하였다.
1999년 ‘7.20’이전, 매일 이른 아침이면 과학기술관 연공장에는 조용히 연공하고 있는 수련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느린 듯 은은한 연공 음악에 따라 그들은 동작이 일치하였고 안정되고 상서로웠다. 모두들 이곳은 에너지가 특별히 강하고 특별히 좋다고 하였으며 적잖은 사람들이 먼 길을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이곳에 와 연마하였다. 길림대학의 한 처장은 심각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는데 걷기도 무척 어려워했다. 그는 파룬궁을 배운 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아침이면 집에서 연공장까지 걸어와서 연공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95년, 외지 수련생과 외국의 수련생도 창춘에 와서 법을 배운 수련 체험을 교류하였는데 연공장 상공이 온통 붉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또 많은 수련생들이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으면 오색찬란한 파룬과 아름다운 광환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날 아침, 사부님께서는 장을 청리하신 후 또 수련생의 몸을 조절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말씀 하셨다. “모두 줄을 잘 서십시오, 한 사람에게 하나의 병을 없애 주겠습니다.” 수련생 몇이 한 줄로 섰다. 당시 파룬궁 연공장 부근에는 각종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병 치료해 주는 것을 보고 ‘와’ 하니 모두 와서 줄을 섰고 다 잘 되었다. 사부님은 순서대로 한 사람씩 봐 주셨는데 사부님께서 보시고 나면 그 병이 없어졌고 즉시 효과를 보았다. 어떤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또 가서 줄을 섰다. 사부님께서 “당신은 이미 봐 주었는데 왜 또 오셨습니까?” 라고 하면 그는 겸연쩍어 했고 그러면 사부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또 그의 병을 한 번 더 봐주셨다. 사부님은 자비하셨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아침부터 거의 두 시간을 들여 백 명이 가까운 사람들의 병을 조절해 주셨다. 사부님께서 떠나실 때는 8시가 넘었다. 그 날은 장춘 제 4회 학습반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사부님께서는 아직 한 시간 더 강의를 하셔야 했었다. 그날 저녁 사부님은 기차로 북경에 가셨고 이튿날엔 북경 파룬궁 학습반을 시작하셨다.
사부님께서 최초로 법을 전하실 때는 참으로 너무너무 고생하셨다. 그런데 그때 여러 사람은 사부님께서 전하시는 대법의 진정한 함의를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다지 소중한 줄 모르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한 번 한 번 입이 닳도록 설법하시고 각종 유치한 물음에도 대답해 주셨는데, 사부님의 고달픔을 그 누가 또 알 수 있었겠는가?
92년 겨울,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돌아오셨는데 파룬 깃발 두 개를 가져다 하나는 승리공원 연공장에 주시고 하나는 바로 길림대학 연공장에 주셨다. 승리공원은 창춘에서의 첫 번째 연공장으로서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기 전에 일찍 그 곳에서 연공을 하셨던 것이다. 길림대학 연공장이 사부님께서 직접 주시는 파룬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애호와 보살핌이며 우리에게 기탁하신 사부님의 무한한 희망인 것이다.
반년이 지난 1993년 6월 25일, 역시 이른 아침인데 사부님께서 또 다시 과학기술 청사 연공장에 오시어 이곳에서 연공하는 수련생들을 만나 보셨고 또 모두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이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매번 볼 때마다 몇 갑절이나 되는 친절감과 영예를 느끼곤 한다. 당년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자비와 고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대법을 더욱 더 소중히 여기게 되고 이 당대에 비길 바가 없는 기연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사부님께서 몸소 꾸린 법 전수반
길림대학 강당은 당나라 시대의 건축풍격을 살린 흰 벽에 푸른 기와, 처마가 들리고 천장이 둥근 일본식 건축으로서 천 6백 개 좌석이 있는데 문화혁명 때는 밍팡궁(鳴放宮)이라 불렀다. 사부님께서 길림대학 강당에서 연 두 번째 마지막 회의는 대학 강당에서 열렸는데 세 개의 학습반을 꾸리셨다.
1993년 6월 26일, 제6회 학습반이 시작되기 전 날, 사부님께서는 길림대학 강당에서 한 차례의 보고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사회에서는 ‘공을 지닌 보고(帶功報告)’라고 불렀다. 당시 표 한 장에 2원씩 하였고 강당은 사람들로 빼곡히 찼는데 다시 말해서 1600명이 앉은 것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 사부님은 가장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당초의 기공의 형식으로 개괄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법해 주시어 모두들 파룬따파 수련을 알게 하였고 인연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보고를 마친 후 사부님은 길림대학 파룬궁 수련생들과 과학기술 청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셨다.
93년 6월 27일, 사부님께서는 두 번째로 길림대학에 오셨고 대학 강당에서 창춘 제6회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이번 학습반에서 사부님은 비교적 높게 설법하셨는데, 사부님께서는 천목과 다른 공간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보여주셨다. 책상 위에 있는 물 컵을 들어서 오른 손 위에 놓으시고는 “여러분 주의해 보십시오, 천목이 열렸든 안 열렸든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고 하셨다. 사부님은 왼 손 중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물 컵 속에서 작은 물 컵 하나를 꺼내셨는데 원래의 물 컵과 똑같은 것이었고 다만 원래 것보다 1/4 정도의 크기일 뿐이었다. 사부님께서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았는가 물으시자 모두들 격동되어 똑똑히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사부님은 또 작은 물 컵을 천천히 원래의 물 컵 안에 넣으셨다. 이때는 작은 컵이 서서히 원래의 컵과 다시 합치는 것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들더러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다른 공간의 물건을 보게 하셨는데 이는 현대과학 연구가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이 학습반에 70살이 넘은 류씨 할머니가 있었는데 뇌혈전으로 마비된 지 십 년이 됐고 길을 걷지 못했으며 손도 곧게 펴지 못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가족은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부축해 데려왔다. 3일째 되는 날, 포륜(抱輪)동작을 할 때 그녀는 뜨거운 기류가 ‘쏴’ 하고 머리로부터 내려와 온 몸에 퍼지는 감을 느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걸을 수 있었고 젓가락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보든지 모두 파룬궁이 신기하다고 하였다. 후에 그녀에게 소업반응이 나타났는데 속으로 대법을 확고히 믿자 재빨리 지나갔다. 그녀는 천목이 열려 동수와 이 과정을 서술할 때 말하였다. 사부님 법신이 신변에 한 바퀴 둘러서서 줄곧 그녀를 보호했고, 또 그녀에게 금빛 나는 여섯 글자를 보여주었다. “당신이 진수하면 나는 정말로 당신을 책임진다.”(你真修 我真管)
7월 4일, 6회 학습반이 끝나자 사부님은 또 흑룡강 치치하얼로 법 전수를 떠나셨다.
사부님께서 친히 오셔서 길림대학 수련생들과 좌담하시다
1994년 4월 28일, 장춘 제7회 파룬궁 학습반이 열리기 전 날, 사부님께서 길림대학에 오셨는데, 도서관 곁의 흰 건물에서 길림대학 인체과학 연구 회원과 일부 파룬궁 수련생들과 좌담하셨다. 사부님께서 좌담회에 참가하신 목적은 이튿날에 열릴 파룬궁 학습반을 위해 場을 청리하기 위해서였다.
길림대학 교보(校報)는 이번 좌담회 상황을 보도하였고 또 사진도 실어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알게 되었다. 길림대학의 한 교수는 류머티즘성(性) 관절염을 앓고 있어 손마저 변형이 되어 몹시 고통스러워 했다. 류머티즘성(性) 관절염은 완고한 병으로서 기본상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사부님 제 2회 학습반에 참가하여 병이 다 나았다. 그녀는 몹시 격동되어 남편을 데리고 사부님 댁으로 왔다. 그녀 남편은 위축성 위염을 앓고 있었는데 의학상으로 말하면 그건 바로 위암의 초기인 것이다. 사부님께서 그를 봐준 후 그도 완전히 나았다. 이 일은 재빨리 소문이 펴졌고, 사람들은 파룬궁의 신기함, 사부님의 법력과 위덕을 목격하고는 분분히 와서 파룬궁을 배웠다. 길림대학에서 이런 사례는 아주 많았다.
사부님께서 재차 법 전수반에 오셔서 법을 전수하시다
1994년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사부님께서 재차 길림대학 강당에 오시어 창춘 제7회 학습반을 열었다. 학습반을 꾸린다는 소식이 나가자 며칠 사이에 1600장 표가 전부 나갔다. 청해, 내몽고, 안휘, 흑룡강, 북경, 산동 등 십여 개 성, 시에서도 700여명이 왔으며 또 창춘의 천여 명도 파룬궁을 배우러 오려 했지만 표를 사지 못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조직을 책임진 사람은 생각하였다. 3, 4천명이 앉을 수 있는 좀 더 큰 장소로 바꾸면 될 터인데, 하지만 시 체육관에 가서 물으니 그들이 부르는 가격이 너무 높았다. 사부님께서는 어디에서 학습반을 열든 모두 제일 낮은 표준으로 비용을 받았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늘 얘기하셨다. 중생을 구도하는 것인데 연공인의 부담을 증가해서는 안 된다고. 사부님께서는 길림대학 강당에서 낮과 밤 두 개 반을 꾸리셨는데 즉 오전에 강의하시고 저녁에도 강의를 하셔야 했다. 이 때 현장에 있던 수련생들은 모두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사부님께서 강의하시기 전 한 수련생이 강당사용에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항, 이를테면 지각 조퇴를 하지 말며, 아무 데나 휴지를 버리지 말 것 등등을 쪽지에 써서 사부님께 드렸다. 사부님은 보시고 나서 웃으시면서 이건 필요 없다고 하셨다. 그 때 길림대학 강당에서는 늘 회의가 있었고, 또한 각종 기공 학습반이 열렸는데 매 번마다 모두 그들에게 이런 쪽지를 주었던 것이다. 이 수련생은 막 법을 얻었던지라 파룬궁에 대한 인식이 아직 깊지 못하여 일반적인 기공인 줄로 여겼던 것이다.
한 건 한 건의 사실은 수련생으로 하여금 사부님의 고공대덕(高功大德) 및 파룬궁의 신기하고 초상함을 직접 감수하게 하였다. 수련생들은 사부님에 대하여 아주 존경하였는데 사부님께서 회장에 도착하시면 모두 일어났고 잇따라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아 사부님께서 재삼 손짓으로 앉으라고 해서야 사람들은 앉는 것이었다. 수련생이 사부님께 마실 물을 따라 드릴 때 사부님 앞에 32절지 한 장이 놓여 있고 위에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없는 글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의 강의 원고였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강의하신 것은 그렇듯 고심한 것들이었는데 과학자, 교수, 전문가들이 모두 강단 아래에서 듣고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것들을 사부님께서는 몇 마디로 말씀을 하셨는데 논리성도 역시 매우 좋았고, 조리 또한 그렇듯 분명하였으며, 말씀이 그렇게도 투철하고 명백하였다. 그야말로 너무도 신기하였다!
날마다의 강의에 1600명이 조퇴 지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바닥은 깨끗하였으며, 모두들 서로 양보하였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표준은 어디보다도 더 높습니다.”였다. 당초의 거동을 생각하면 수련생 자신도 모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파룬궁은 신기하여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개변시킬 수 있고, 사람을 좋게 변하게 하고 더 좋게 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릇 파룬궁을 배운 사람이라면 모두 느낄 수 있는 바, 파룬궁은 대법수련이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으며, 기점이 아주 높고, 주는 것이 엄청 많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진짜로 보배로운 많은 것들을 공을 배우는 사람에게 무사(無私)하게 전해 주셨는데 기타 어떠한 공법도 모두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법을 전하는 과정 중에 역시 순조롭지 못한 데가 있었으며, 여러 방면의 교란 역시 아주 컸다. 주최기관과 각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학습반은 비교적 원만하게 열렸다.”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매 한 마디 말씀에는 모두 심각한 내포가 있는 것이다. 제7회 학습반에서 바로 이런 한 가지 일에 부딪쳤던 것이다.
두 번째 날의 낮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한창 설법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어 온 강당이 위층 아래층 할 것 없이 어두웠다. 조직을 책임진 수련생들은 몹시 조급해 하였다. 왜냐하면 그 날은 일요일이라 전기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안달이 났고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강당에는 정전에 대비하여 준비해둔 초가 있었는데 불을 붙여 강단(단상)에다 놓았다.
사부님께서는 조금도 조급해 하시지 않고 녹음을 책임진 수련생에게 알려 주었다. 당신에게 녹음기가 있지 않는가? 전지 몇 개를 사다가 스피커 양쪽에 넣으면 된다. 수련생이 그대로 했더니 과연 되었다. 이리하여 녹음기와 두 개의 스피커로 사부님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 강의를 하실 수 있었다. 강당 맨 뒤 끝에 앉은 수련생들도 아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온 강당에는 다만 조그마한 초 한대가 사부님 강의하시는 것을 비춰주었을 뿐 강단 아래는 한 점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지만 질서는 놀랄 정도로 좋았고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말하는 사람도,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강당의 일꾼들은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여기면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다, 당신들 파룬궁은 정말 대단하다! 길림대학 강당에서 정전 후에도 마찬가지로 회의를 했다는 이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정말 신기하다!”
이 학습반에서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 잊을 수가 없다. 5월 6일 저녁반이 수업하기 전에 남호 연공장의 수련생들이 강당 문 앞에서 사부님을 기다리면서 사부님과 사진을 찍으려 하였다. 그 중에는 60대의 뇌혈전에 걸린 사람이 지팡이를 잡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사부님께서 오시더니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버리고 의자를 치우십시오.” 노인은 듣고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의자를 치우고 지팡이를 버렸다. 다리를 옮겨 보고는 강당의 문 앞을 몇 바퀴 돌았다. 그는 기뻐 웃었고 또 격동되어 울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신기한 장면을 보고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기하다” 노인은 스스로 층계를 올라 강의를 들으려 강당으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지팡이를 쓰지 않고 스스로 걷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날 저녁 사부님께 감사 서신을 썼고, 온 가족을 대표하여 사부님께 감사드리면서 파룬궁을 잘 연마하여 사부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많아 말하자면 끝도 없다.
사진을 찍는 일에서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다.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의 신기함과 사부님 은덕을 직접 감수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부님과 사진을 찍어 보귀하고도 아름다운 회억을 남기고자 하였다. 학습반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요구를 제출하여 사부님께 반영하였고 사부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모두들 알고는 무척 기뻐하였다. 조직자는 기쁘기도 했지만 또 걱정도 되었다. 한 반에 1600명인데 어떻게 찍는단 말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조직하여 사진을 찍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했다. “여러분 순서대로 찍읍시다” 사람들은 듣더니 모두 뒤로 물러나서는 자동적으로 지역별로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층계에 서 계시면 수련생들은 사부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순서대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 찍고는 조용히 떠났는데 질서는 놀랄 정도로 좋아서 아예 누가 조직할 필요가 없었다. 한 개 한 개의 지역에서 다 찍으면, 또 가정이며, 친구며, 또는 개인적으로 단독으로 사부님과 함께 찍으려 하였는데 사부님은 일일이 다 만족시켜 주었다. 한 시간 넘어 6개의 필름을 다 찍을 때까지 사부님께서는 줄곧 층계에 서 계셨다.
사부님의 자비, 위덕과 법력은 사람을 내심으로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개변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렇듯 짧은 며칠 사이에 가능했던 것이다! 매 사람마다에게 모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고,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게 되었으며,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되었고, 자각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며 모두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었고,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게 되었으며, 파룬궁의 환경을 어지러운 세속 중의 한 뙈기의 정토(淨土)로 되게 하였다.
제7회 학습반에서 사부님은 아주 높게 말씀하셨다. 학습반이 결속된 후 사부님께서는 이 설법을 녹음하게 하셨는데 반드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베껴낼 것을 요구하셨다. 길림대학의 몇 명 수련생이 이 임무를 감당하였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녹음을 문자로 베껴냈는데 (종이를) 쌓아 놓으니 무척 높았다. 당시에는 아직 몰랐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또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나의 이 책의 내용은 몇 개 학습반에서 말한 법을 한 데로 합친 것이다. 모두 내가 말한 것으로서 구절마다 모두 내가 말했고, 모두 녹음테이프에서 한 글자 한 글자씩 뽑아냈으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옮겨 적은 것인데, 모두 나의 제자, 수련생이 나를 도와 녹음 중에서 받아 쓴 것이고, 그런 다음 내가 다시 한 차례 한 차례씩 수정했다. 모두 나의 법으로서,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법이다.”라는 것임을. 이 보서(寶書)가 바로 『전법륜』이었던 것이다.
1994년 5월3일, 사부님께서 창춘 파룬따파 제7회 전수반에서 수련생들에게 파룬도형을 해석해 주셨다.
학습반 마지막 날에는 수많은 글들이 분분히 강단으로 올라갔다. 수련생 누구나 모두 직접 혜택을 받아 저마다 뜨거운 눈물을 머금었고, 폐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많고 많은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다투어 사부님과 석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어느 수련생이 물었다. “사부님, 당신이 떠나가시고 창춘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그래도 우리를 책임집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 당신이 달나라에 간다 해도 나는 모두 당신을 책임질 것입니다.”
창춘 대법제자들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시종 확고하게 대법수련의 길을 견지하였다. 비록 우리가 속으로는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부님을 그리워하였고 몹시 그리워하였다. 사부님께서 고향에 돌아오실 그 시각을 고대하였고, 사부님과 또 다시 만날 그 순간을 고대하였다! 우리는 말하고 싶다. 사부님 안녕하세요! 금년은 사부님 60세 생신인데 우리는 사부님께 축수를 드립니다!
사부님께서 길림대학에 오시어 창춘 보도원들에게 설법하시다
1994년 9월 18일, 사부님께서 다시 한 번 길림대학에 오셨다. 길림대학 이화청사 7층 강당에서 창춘 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해 설법하셨다. 사부님께서 이번에 하신 설법이 바로 『파룬따파 의해(義解)』의 제 1편 『창춘 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번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실 한 문제를 파악함에 心性(씬씽)에서 찾는다면 어떠한 문제든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이 완전히 속인을 초월한 한 사람으로 되며, 완전히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 대각자(大覺者), 그는 무엇을 위하는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때문에 수련생에 대한 나의 요구 역시 대단히 높으며 수련생이 제고되는 것 역시 아주 빠르다”
사부님께서는 또 창춘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한 가지 요구를 제출하셨다. “또 한 가지는, 나는 아직 우리 몇몇 책임자와 이 일을 말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단지 단체연공만 하지 말고 특정한 시간을 찾아 단체로 법 공부를 할 수 없겠는가. 우리가 나의 고향에서 선두로 나서서 좀 조직하면 좋겠다. 매 장(章)마다 매 절(節)마다 여러분이 읽고 토론해 보라. 학습시간의 안배는 단체연공처럼 고정시켜야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더욱 많고 겨냥성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장래에 실제문제에 부딪히면 의지할 법(法)이 있게 된다. 우리가 선두에 선다면 전국 각지 보도소에서 아주 좋은 선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전국 각지에서 본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들의 인식제고에 많은 좋은 점이 있기에 이러한 건의를 제기하는 바이다.(『(파룬따파 의해』「창춘 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해법」)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후, 창춘 파룬궁 수련생들은 법공부하고 심성을 닦는 것을 중시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재빨리 전국에서 추진되었다. 1995년, 보서 『전법륜』이 출판된 후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였다. 수련생들은 가까운 곳에 법 공부 팀을 꾸렸는데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으며, 자동적으로 조직되어 법 공부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퇴근 후 직접 법 공부 팀에 가서 법 공부하였고 날마다 그렇게 하여 튼튼한 법 공부 기초를 닦았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수련생들이 늘 창춘에 와서 교류하였고 심지어 타이완과 외국의 수련생도 늘 왔는데 서양 수련생을 포함하여 휴가를 이용하여 창춘에 와서 창춘 수련생들과 함께 법 공부, 연공을 하였다. 이런 수련생들은 창춘에 오면 반드시 길림대학에 가서 당년에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길을 다시 회고하면서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고생과 신적(神跡)을 들으면서 갑절로 되는 친절함을 느꼈고 고무를 받았다.
<BR연공을 마치면 공부 팀에 가서 법 공부하였다 < FONT>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도다.” 17년래, 길림대학은 학교가 통합되고, 남으로 이사하기도 했지만 사부님께서 그 해 법을 전하시던 곳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 장엄하고 경건하며, 차분하고 조용하다. 95년 초부터 99년 ‘7.20’까지 수많은 고등학생, 대학 본과생, 연구생 수련생들은 『전법륜』 책에 길림대학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길림대학에 지원하고 응시하였다. 학교에 도착한 그 날. 학생처에 등록을 마친 즉시 연공장, 법 공부 팀에 달려갔다. 그들은 모두 아주 총명한 학생들로서 청화대학, 북경대학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전법륜』전체를 다 암기하여 법 공부할 때 한 글자도 틀림없이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길림대학에 온 것은 이렇게 법 공부 환경을 감수하기 위해서였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대략 95년도였는데, 깐쑤성 란쩌우(甘肃省兰州)에 있는 한 사람이 서점에서 『전법륜』책을 보고 척 펼쳤는데 이 책은 보통 책이 아님을 느끼게 되어 집에 갖고 가서 보고는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연공하고 동작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책 속에 쓰인 “저번에 길림대학에서 학습반을 꾸릴 때” 라는 글을 보고 길림대학 지도부에 편지를 썼다. 학교에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수련인의 경지도 아주 높았기 때문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모두 유명해졌다. 이 편지를 한 수련생에게 전해주었고 그는 사부님 연공동작 비디오 테이프를 그에게 부쳐 주었다. 그들은 99년 ‘7.20’까지 여러 차례 통신 연락을 가졌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직도 많고 많다. 후난에서, 기타 지방에서 모두 『전법륜』을 보고 사부님께서 길림대학에서 학습반을 꾸리셨다는 것을 알고 편지로 찾거나 직접 찾아와서 물었는데 수련생들은 일일이 도와주었다.
그해 사부님께서는 길림대학 대법제자들을 몹시 관심하셨는데 조기에 사부님과 많이 접촉했던 수련생은 각기 사부님 친필을 가졌다. 예를 들면 “真修”,“忍”,“悠悠萬事,修煉爲大”(무수한 일중에도 수련이 제일 큰 일)등이었다. 이런 글자들은 사부님 법 전수 5주년 기념 창춘 제2회 파룬따파 미술전람회에 전시되었는데 이 역시 길림대학 대법제자의 영광이었다.
사부님께서 길림대학에서 법을 전하시던 낮과 밤을 회고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사부님이시여,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고 너무너무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느 수련생은 사부님을 보기만 하면 눈물을 끝없이 흘렸다. 그는 말하였다. “평생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때였기 때문이었고, 우리 생명 중의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은혜이고 사부님 위덕의 체현으로서 그는 우리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처의 끝없는 은혜이고, 그것은 우주 대법의 전시(展示)로서 대법에서 왔고 대법에 귀속된다.
사부님께서는 천신만고를 다 하시면서 이렇게 훌륭한 법으로 우리를 제도하시면서도 그저 선으로 향하는 마음 하나만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19년 동안의 풍파를 겪으면서 우리는 성숙되었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체를 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오늘, 사부님 60세 생신을 맞는 날에,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19주년에 즈음하여 길림대학 대법제자는 사부님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사부님께 문안을 드립니다! 대법의 찬란한 휘광 아래 우리는 절대로 사부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최선을 다해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정진, 또 정진하겠습니다!
원문발표 : 2011년 5월 1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0/【庆祝513】法光照耀吉林大学-2401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