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법공부 팀
[밍후이왕] 단체로 법공부, 연공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장 훌륭한 수련 형식이다. 동수들이 함께 단체로 법공부, 연공하고 함께 교류 토론하는 것은 장점이 무척 많고 제고가 빠르다. 여기에서 우리 법공부 팀에서 교류 토론한 일부 예를 써내 전 세계 수련생들과 공동 교류함은 좋은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 팀의 연령 방면으로부터 보면 6, 70세 노인이 있는가 하면 미혼 청년도 있고, 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수련생이 있는가 하면 문화대혁명 시기의 초등학생이었던 분도 있으며, 국가 고위층 간부가 있는가 하면 보통 노동자도 있다. 비록 연령, 문화, 직업이 같지 않지만 우리 단체 법공부 수련에는 영향이 없고, 오히려 우리는 장점을 발양하고 단점을 보완하며 서로 따라 배우고 서로 보완하면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공동 제고가 무척 빨랐다.
젊은 수련생은 지식수준이 높아 글자의 법리 뜻을 쉽게 이해한다. 특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우주공간에 관한 법을 빨리 이해한다. 모르는 글자, 모르는 현대 과학기술 명사를 우리는 모두 그들에게 물어본다.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다운로드하며, 자료를 프린트하는 등 기술 일은 더욱 젊은 수련생들을 떠날 수 없다.
학력이 낮은 수련생도 비하하지 않는다. 학력이 낮다 해서 오성이 낮은 것은 아니며, 법공부, 연공에 대한 감수가 영민해 ‘전법륜’ 안의 글자가 빛을 뿌리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늘 다른 공간 혹은 미래 광경을 볼 수 있으며, 자신 전세의 우주 장관을 볼 수 있어 수련생의 신심을 증강해 준다.
나이 든 수련생은 어려서부터 신전문화, 전통관념 교육을 많이 받았고 현대과학 기술 오염이 적어 불법(佛法)을 쉽게 접수하고, 변이된 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데서 팀의 지주이자 기초 역할은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수련생은 ‘전법륜-사법연마’ 중의 ‘광년(光年)’을 도대체 시간적 개념인지 아니면 거리 개념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노 수련생이 말하기를, 민간에는 시간으로 거리를 표시하는 설법이 있는데 어디까지 갔는데 얼마나 머냐고 물으면 흔히 대답하는 말이란 담배 한 대 피울 사이라고 한다. 멀고 가까움은 거리 개념이고 또한 시간으로도 표시한다. 이를테면 멀고먼 고대, 멀지 않은 장래 등이다. 젊은 수련생이 보충해 말한다. ‘광년’이란 인류의 과학기술 명사로서 국한성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빛은 각 공간에서는 속도가 다르며 우리 이 물질 공간의 빛은 매 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갈 수 있고 기타 다른 공간에서는 아마 더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15만 광년이란 지구에서 보면 빛이 15만년을 갔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가 다른 까닭에 그는 15만 광년의 거리는 아닐 것이다. 다른 공간의 모 공간에서 보면 빛은 결코 15만 년을 간 것이 아니라 아마도 한 순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수련자 각도에서 보면 현대 과학의 ‘광년’은 의의가 모호한 명사로서 거리가 아니며, 시간도 아니다. 속인 과학자는 사부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부님은 단지 인류의 완벽하지 못한 과학기술 언어로(‘도량’, ’측량’이 아님) 시간의 먼 것을 형용했을 뿐이다.
우리는 사상 중의 일사일념을 놓치지 않고 조금 조금씩 집착심을 버리고 경지를 제고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사부님 설법을 학습할 때 이러한 두 개 단락의 법이 있었다. “만약 이번 박해 기간에 누가 감히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라고 말한다면,많을 필요없고 바로 내심으로부터 나온 이 한 마디 말로 인해 이 사람은 반드시 귀의(歸位)한다!(박수)무슨 뜻인가? 이 시기에, 사악한 환경 중에서 그가 감히 법을 실증한다면 그는 반드시 신이다. 이 박해 기간에 누가 대법제자를 위해 선(善)한 일을 좀 했고 좋은 일을 좀 했다면 이 사람 역시 반드시 신으로 성취할 것이다!”(2007년 뉴욕 법회설법) “일부 사람들은 나오지 않고 중시하지 않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이 일을 그리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사실 당신이 대법제자로서 져야 할 책임은 전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중생을 구도하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 대법제자의 책임을 완성하지 않는 것이며, 당신의 수련은 물거품과 같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대법제자가 되게 한 것은 당신 개인적인 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대한 사명을 짊어진 것이기 때문이다.”(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어떤 수련생은 이 설법을 읽고서 마음 속에 평형을 잡지 못했다. 나는 법공부를 이렇게 오랫동안 해도 제 위치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 속인은 한 마디 말로 제 위치에 이를 수 있다니! 이는 질투심으로서 다른 사람이 잘 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지 않으며, 화가 나고 불평을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교류해 질투심을 닦아 버림에 노력했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이 야채를 살 때 장사꾼이 저울을 틀리게 재는 것을 발견했을 때, 심태에는 각종 표현이 있다. 한 가지는 불만을 갖고 당신 저울이 맞느냐고 묻는다. 저울을 속이는데 왜 이렇게 부도덕한가? 이는 속인의 이익에 사로잡힌 쟁투심이다. 또 한가지는 저울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 생각한다. 손해를 보는 것은 복이고 덕이 있어야만 길고 짧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법을 갓 얻었을 때의 경지다. 또 한 가지는 저울이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 속에 서글픈 생각이 떠오른다. 장사꾼이 이렇게 덕을 잃고 있으니 결과는 상상할 수 없구나. ‘명현집(名賢集)’에서는 “남의 땅을 빼앗고 돈을 사기치면 부귀영화를 몇 해 못 누리리, 눈앞에 보응 없다 말하지 마라, 분명히 화는 자손에 미치리”라고 말했다. 마땅히 그 마음을 선화시켜 선의적으로 그에게 알려줘야 하는 바 이는 자비심이다.
가령 우리가 저울이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수련인의 높은 경지다. 마음속에 아예 아무런 염두도 없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 두지 아니하거니 세상과 다툴 것 없노라”가 된다.(『홍음』「도중」)
가령 그 때에 자신의 집착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단체 법공부 팀으로 와서 수련생들과 함께 교류한다면 곧바로 자신의 집착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눈빛 하나, 한 마디 말로부터 모두 사람의 집착심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다. 수련생에 대한 책임에서 출발해 선의적으로 지적해 줄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옷에 먼지나 때가 있다고 남이 알려 주면 당신은 그에게 감사하고 즉시 제거해 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련생이 우리 마음 속의 먼지나 때를 지적해 준다면 더욱 감사드리고 즉시 제거해 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사다리에 오를 때 무겁고 필요 없는 더러운 물건을 짊어졌다면, 수련생이 당신에게 버려야만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지적해 주는 것과도 같다. 또한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 사악과 싸울 때 당신의 칼에 녹이 쓸고, 갑옷이 구멍이 났다고 지적해 주면서 당신을 도와 칼을 갈아주고 갑옷을 기워 준다면 비로소 사악에게 손상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가 이타적으로 우리의 집착심을 지적해 주고, 누가 진정으로 우리를 좋게 해주는가? 누가 우리의 집착심을 보고도 지적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수련생의 집착심을 지적해 줄 뿐이지 이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만약 풍자. 조롱.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수련생의 집착심을 지적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동수보다 수련이 잘됐다고 여긴다면 동수의 집착심은 버릴 수 없게 되고, 자신에겐 또 과시심이 생겨날 것이며 또 새로운 모순이 생길 것이다.
집착심을 발견하는 것은 집착심을 버리는 시작이다. 집착심을 발견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그것을 닦아 버리고, 해내야만 비로소 진실한 수련이다.
수련생들이 함께 단체로 발정념 하면 위력이 크다. 수시로 수련생을 도와 공간장을 청리해 주고 정확하지 못한 상태를 조절해 주면 효과적으로 다른 공간의 사악을 청리하고 수련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정념하여 우리 부근의 한 사악한 부서를 해체해 흑수(黑手), 난귀(爛鬼), 난신(亂神)들이 우리 쪽에 발붙일 자리가 없게 했다.
수련생들이 함께 단체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함에 협동 협조하니 효과가 좋다.
우리는 이번 박해 가운데서 대법을 떠난 그런 수련생들에게 절실하게 바란다. 당시 우리가 단체 환경 속에서 수련할 때의 자신의 신체 변화, 인생의 변화, 속인을 벗어난 후의 유쾌한 심정, 행복했던 감수를 생각해보라. 어서 돌아오라, 사부님께서 기다리고 동수들이 당신들을 돌아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 팀의 조그마한 보잘 것 없는 체험이다.
문장발표: 2011년 4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4/14/2390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