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일찌감치 일어나 방안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손을 깨끗이 씻고 나서 공손히 대법 책을 받쳐들고 조용히 책 속의 매 한 글자를 모두 마음에 와 닿게 보았다. 이 때의 나의 머리는 텅텅 비었다. 하지만 또 실재적이고도 실재적이기도 하였다. 비었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사람마음도 없다는 것이고, 실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 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법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글자’일 뿐만이 아니라 더욱이 층층 불법의 그 도리는 우주 중생이 준수하는 규칙인 것이다!
생명의 의의는 법 공부를 통하여 조금씩 보다 더 분명해졌고, 법 실증의 길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하는 과정에 나는 보다 더 방향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심성은 모르는 사이에 제고 되었고, 생명은 무성(無聲)중 결백, 투명해졌다. 그것은 유구한 역사의 기연에서 온 것이며, 그것은 생명의 본원에서 용솟음쳐 나온 감동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구도하기 위하여 모든 능력을 자비하게 모두 이 대법 속에 압축해 넣으셨는데 그저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품고, 어떠한 상태로 깨닫고 동화하는가만 보실 뿐이다.
망망한 인해, 복잡한 세간에서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행운이 있어 이러한 때에 사존님의 직접적인 구도를 받을 수 있는가? 또 얼마나 되는 생명이 구세력이 배치한 거대한 난 속에서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기왕 우리 대법에 동화됨을 선택한 이상, 기왕 우리가 어떠한 상황이 나타나도 모두 ‘영원히 대법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맹세’한 이상, 그럼 왜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세속 중의 일에 엉켜 방해받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가서 진상을 알려야 하겠다, 나는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영역 안에서 더 잘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혹은 나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법을 실증할 항목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동수들이여, 우리 생각해 보자. 지금 우리는 실질상 말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속인의 일부 방법을 이용하여 중생이 진상을 알게 하여 구도받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사람을 구함이라, 어떠한 마음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어떠한 마음만이 사악을 깡그리 멸할 수 있고, 교란을 줄이거나 제거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그 마음은 영원히 신성하고도 자비한 확고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복잡하고도 긴긴 속세, 이 복잡한 환경 중에 있는 몸은 늘 각종 일에 부닥치게 되는데, 이에 직면하여 우리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진흙 속에서 나와도 물들지 않는 경지를 체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무엇을 해도 모두 한 때의 열정에 그칠 뿐 영원한 것으로는 되지 못하고, 아무리 잘한 일이라 해도 결과는 단지 덕을 쌓는데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숭고한 사명을 지닌 대법제자이며, 우리의 목표는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인간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신성과 영원한 자비의 선한 거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사부님께서 이미 여러 번 중복하신 두 글자: 법 공부인 것이다.
우리 정말로 ‘법’을 마음 속에 담고, ‘법’을 자신의 사유와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정말로 ‘법’에 자비롭게 동화될 것이고, ‘법’의 지혜로 충만될 것이며, ‘법’이 부여해 준 그런 비할 바 없는 위대하고도 신성한 경지와 신통될 것이다. 자신이 도달하려는 사람 구하는 항목을 세간에서 되돌아보면 모든 것은 눈 앞에 선할 것이다……
한 개 항목을 해도 좋고, 구도된 생명도 좋고, 어떻게 하기 어렵든, 어떻게 구하기 어렵든, 실은 모두 인간 이 층차에서의 어려움이다. 왜 우리는 모 방면에 돌파가 아주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가? 이 방면에서 우리의 인식이 제고되지 못하고 심성과 경지 상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까닭이다. 인간의 어떠한 일이든 신이 보건대는 모두 아주 간단한 일이므로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때 우리의 사유가 아직도 사람의 사유와 용량은 아닌지? 이런 것을 해결하려면 “법공부”에 의거해야 한다.
‘법’은 만능이고, ‘법’은 지혜의 원천이며, ’법’은 중생을 구도하는 힘이며, ‘법’은 일체 일체의 근본이다.
사실 일체는 모두 우리 심성의 개변에 따라 개변되는 것이며, 일체의 일체는 우리가 정말로 법 속에 용해되고, 정말로 하는 과정에 모두 엄격하게 법의 표준과 요구에 따라 할 때, 일체는 사실 모두 간단한 것이며, 아울러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뭇신들이 우리를 도와준다……
법 공부를 잘하면 일체는 모두 아주 홀가분하게 변하고, 또 특별히 엄숙하고 신성하여 신이 사람을 구하고 있으며. 신은 인간 현유의 조건과 언어로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보라, 그러면 어떠한 상태겠는가…… 우리가 속인의 언어로 말하고 글을 쓴다 해도 이면에는 도리어 신의 역량이 있을 것인데 생각해 보라. 그러면 어떤 효과이겠는가?
그러므로 ’법’공부는 우리에게 무한한 묘한 점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개인 수련이든 아니면 중생구도라는 이 위대하고도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든 모두 더는 일종의 ‘기계’적인 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희열이 가득찬 마음으로 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취미이고 생명을 구하는 한 몫의 책임과 사명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면 마땅히 무조건적으로 법에 동화해야 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생명을 성취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 곳곳에서도 대법에 동화된 후의 무한한 묘한 점을 체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법 공부를 기계적으로 하지 말고 잘 해야 하며 신성한 마음을 품고 구함이 없이 해야 한다. 이러면 ‘법’이 우리에게 준 무한한 묘한 점이 비로소 나타날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으며, 비로소 진정으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며, 비로소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견해이니 참고로만 드릴 뿐이다.
문장발표 : 2011년 2월 2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26/交流–学法的妙处-2368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