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 대법제자 구이전(歸眞)
[밍후이왕] 나는 어려서부터 체질이 약하고 잔병이 많아서였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줄곧 사랑하는 배우자와 함께 무릉도원 같은 심산에서 생활하며 속세와 분쟁을 멀리 떠나 사는 것을 꿈꾸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자신한테 속하지 않는다. 그럼 헛되게 살지 않았는가?”고 여겨져 마음이 아주 내키지 않았다. 마치 뭔가 좀 부족한 듯 했다.
비록 자신의 몸은 좋지 않지만 파룬따파를 수련한 목적은 병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처음 대법책을 읽고나서 나는 확실히 믿었다. 그 속의 도리는 나를 탄복시켰다. 게다가 어릴적 부터 신불(神佛)을 믿었기에 이 공법은 꼭 나를 고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수행하여 정과(正果)를 얻도록 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기적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동수처럼 그렇지는 않았다. 기왕 이것을 고덕(高德)이라고 인정한 이상, 만고(萬古)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므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늘 그렇게 순서대로 하면서도 긴박감이 없었다. 비록 일부 진상을 알리는 일도 했지만 늘 심성의 위치에 도달하지 못한 감을 느끼곤 했다. 이 기간 남편은 대법을 인정하던 데로부터 진상을 저촉하는 데로 변했다. 심지어 ‘대법이 좋아요’를 언급하기만 하면 화를 냈다.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중생은 모두 대법을 위해 왔다. 남편이 수련을 하지 못하더라도 대법에 옳바른 인식이 있어야만이 미래에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지금의 상태는 정말 나를 걱정스럽게 한다.
올해 초에 내가 컴퓨터를 샀었는데, 원래의 목적은 진상을 알리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남편이 도리어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매일 일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컴퓨터에 빠져 심지어 나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또 이성과 한담을 했는데, 그의 결혼 생활이 아름답고 원만하지 못해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을 보자, 나는 마치도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한 방망이 내리치는 듯한 감을 느꼈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원래 남편은 마음속 말도 이미 나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찾아 하소연하는구나.” 이때 나의 질투심, 정, 쟁투심(争斗心)이 전부 일어났다. 어떤 때는 심성을 지켜내지 못해 그와 몇 마디 다퉜다. 그는 어린애가 없었다면 나와 이혼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일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이미 문제가 심각함을 의식했다. 나는 반드시 자신의 수련의 상태를 개변하고 되도록 빨리 자신을 제고해 대법 중에서 수련해 낸 선량함으로 나와 남편 사이의 그런 보이지 않는 간격을 없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명은 망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생각해 보았다. 평소에 그와 말할 때면 언제나 질책하는 어조를 띠고 당문화가 조성한 것으로 그를 압도하려 했으며, 모든 일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늘 그보다 한 등급 높다고 여겼던 것이다. 수련하기 전에 남편이 나를 아주 잘 대해 주었기에 나도 이미 가정에서 ‘대왕.’의 직위를 향수하는 데 습관되었다. 어떤 때에는 그의 근무 중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않고, 처지를 바꾸어 그의 입장에서 그를 위해 고려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사악한 공산당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 때문에 남편도 정신적으로 일부를 감당했는데 그의 말대로 하면 “온종일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자신의 부족점을 찾아 낸 후, 나는 생활에서 묵묵히 그를 관심하고 말하는 어조와 방식도 온화하게 변했다. 그가 이성과 한담을 하면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다시 발작하지 않고 속인의 것을 다투지 않았으며 속인의 이른바 행복을 구하지 않았다. 이것도 나의 큰 집착인 것이다. 예전에 자신이 법 중에서 이 집착을 없애지 않았기에 이때 구세력이 피괴적인 검증(檢驗)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깨달은 후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또 깨달았다. “모순이나 관을 넘길 때, 만약 자신의 희, 노, 득, 실을 첫 자리에 놓거나 혹은 너무 중하게 본다면, 곧 속인과 수련자의 관계를 바르게 놓지 못할 것이며, 일을 크게 만들거나 혹은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속인의 과실을 관용(寛容)하고, 모순을 오히려 집착을 버리는 기회로 볼 수 있다면 아무리 버리기 어려운 집착일지라도, 큰 마음을 먹고 그것을 없애려고만 한다면 사부님의 가지 하에, 대법의 위력 하에 모두 없앨 수 있다. 수련생이 말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도 자신을 내려 놓는 과정이다.’ 는 한마디 말은 아주 잘했다. 수련 중에 바로 점차적으로 무사무아(無私無我)에 도달해야 하는바 완전히 자아가 없고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여야 한다. 이것 역시 낡은 우주의 생명이 새로운 우주의 생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요즈음 남편은 차츰 규정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접속해 한담을 하지 않는다. 어떤 때에 그에게 진상을 알리면 예전처럼 그렇게 격렬하지 않다. 뒤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말할 때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매우 많다. 동수들이여, 되도록 빨리 사람의 상태를 개변하고, 천백년 동안에 형성 된 사람의 도리를 개변하며, 사람의 일처리하는 방식을 개변해, 최후의 시간에 평온하게 매 한 걸음을 잘 걸음으로써 사부님께서 고생을 적게 하시게 하고 즐겁고 안심되시게끔 하자.
문장발표: 2010년 12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2/22/家人的表现是我们修炼的镜子-2320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