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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 수련을 만난 것은 최고의 행운

글/중국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현재 길거리에 나서면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신은 항상 기뻐하고 갈수록 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난치성 ‘산욕열’로 고생하다가 파룬궁 수련으로 완치되고 3년 동안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중공의 박해로 파룬궁 수련을 그만두어 또 암에 걸려 죽을 뻔 했지만 또 다시 파룬궁 수련으로 병원 치료도 하지 않고 암이 사라졌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파룬궁이 한번, 또 한번 나를 고해 속에서 구해냈습니다. 파룬궁은 너무도 좋습니다. 파룬궁 사부님은 대단히 위대한 분입니다!”

나는 서양식 의술을 배운 의사인데 35년의 경력이 있다. 청년 때부터 열심히 배우고 일도 열심히 해서 각종업무 시험에서 늘 앞자리에 있었다. 해마다 ‘회사의 선진공작자’로 당선됐고 지도자와 동료들, 그리고 환자들이 공인하는 좋은 의사였다.

그런데 무더운 여름에 아들을 낳은 후부터 악운이 시작됐다. 9월 달부터 전신이 붓기 시작하고 매 관절마다 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병원에서 말하는 난치성 ‘산후병’에 걸린 것이다. 이로부터 경추병, 요추병, 견주염, 엄지 건초염……전신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또 위염, 만성 기관지염 때문에 음식이 조금만 차가와도 위장이 아프고 대변에 피고름이 나왔다. 그리고 기침을 할 때면 장시간하는데 반년이란 긴 시간에 밤에도 기침 때문에 잠을 설치고 휴식을 잘하지 못했다. 체중이 가장 가벼울 때는 45kg에 불과했다. 각종 치료와 단련, 기공, 영양식품도 쓸데없는, 정말로 ‘의학으로 치료하지 못한다’에 도달했다. 몸은 허약해 임상 의사를 할 수가 없어 병원의 의료기기 부서로 전근됐다.

남편의 신체도 좋지 않고 성격은 사나워 나를 더욱 번뇌 속에 빠지게 했으며 부부 싸움 역시 밥먹듯 했다. 몇 번이나 이혼서류를 썼다가 어린아이 때문에 이혼하지 못했다. 아들이 말썽을 부려 교사에게 불려갔는데 내가 한번 갔다 오면 한번 씩 아들을 때렸다. 가족 셋이 얼굴에 구름이 많아 편한 날이 없었다. 어떤 때 밤중에 깨어나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할까?’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눈물이 얼굴을 적셨는데 나중에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95년 말에 한 동료가 파룬궁을 나에게 소개했다. 나는 당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에 나는 두 가지 기공을 배웠는데 초급, 중급반에 돈을 많이 내야 했고 또 각종 기공 상품, 차, 허리 띠 등등을 사야했다. 이 때문에 1천여 위안을 썼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들이 ‘기공 장사꾼(氣功商)’이라고만 생각했다.

1996년 2월 6일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친구가 ‘파룬궁(수정본)’ 한 권을 가져왔는데 사부님의 사진은 아주 낯익었고 아주 친절해 보였다. 책에는 모두 덕행을 중시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도리라 마음에 들었다. 내가 퇴근 후 공원에 가서 보았는데 암흑 중에서 붉은빛이 비추는데 마치 하늘의 저녁노을 같았으며 몸이 따뜻해졌다. 한 여사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는 무료로 공을 가르쳐 드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곧 이렇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퇴근 후 매일 공원에 가서 한두 시간 연공했다.

몇 년 동안 털내의를 짜는 것은 손도 못댔는데 지금은 밤늦게까지 뜨개질을 할 수 있다. 한 달 정도 연공한 후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온 몸을 괴롭히던 병이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길을 걸으면 나는듯 했고 층계를 오를 때는 누가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사부님의 사진을 보면 울고 책을 보도 울고 연공해도 눈물을 흘렸다. 어떤 때는 앉아 있을 때도 눈물이 진주알처럼 떨어졌다. 마음속에서 은혜에 감사하고 격동과 기쁨이 솟아오르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파룬궁은 좋고 연공으로 내 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말한다. ‘전법륜’을 나는 친척, 친구, 동창생과 이웃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그들에게 상심하지 말고 ‘쩐싼런(眞善忍)’을 지도로 삼고 좋은 사람이 되고 파룬궁을 연공하면 꼭 병을 제거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해 연공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다. 공원 연공장은 수련생이 많아지자 또 몇 개의 작은 연공장을 설립했고 나는 자발적으로 보도원이 되어 연공기도 두 개 준비했다. 연공인들은 모두 수련으로 이로움을 얻었기에 연공장에 무엇이 부족하면 말하지 않아도 곧 어느 사람이 몰래 보충해두었다. 나는 아침 3,4시면 연공장에 갔는데 더욱 일찍 온 사람도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연공을 해서 건강한 신체가 있게 되자 열정은 아주 높았다.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지만 오고 싶으면 오고 배우는 것도 자유로우며 명단을 기록하는 책도 없었다. 누구의 성명도 알려고 하지 않고 사람마다 자각적으로 수련을 했다. 이런 선(善)의 역량은 거대한 것이다. 4,50명이 연공하는데 동작은 일치하고 조용하고도 평온했다. 연공장에는 음악소리가 울려나오는데 그런 감각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연공 후면 연공장을 깨끗이 치우니 어디에 가서 연공해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곧 이렇게 우리는 1999년 7월 20일까지 연공했다. 1999년 7월 20일 오후 회사에서 ‘당원은 파룬궁수련을 하지 못한다는 중공중앙의 결정’을 전달했다. 저녁에 여러 수련생들이 자원적으로 연공장에 모여 연공했다. 단체 연공 후 많은 사람들이 성(省) 정부에 파룬궁을 위해 평화적인 청원을 하러 갔다.

99년 7.20이전 3년 반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다. 내심은 행복과 희망의 빛으로 가득차고 활력이 충만된 시기였다. 사업 중에서는 나는 환자를 가족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도 병에서 고통을 겪어봤고 돈을 많이 쓰고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약물치료 중 나는 그들에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도리를 말해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듣기를 좋아했다. ‘누가 그렇게 말한 거죠? 어떻게 이렇게 잘 말했지요?’ 그들이 걱정스럽게 왔다가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일부 사람들은 책을 보고 연공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은 좋다는 것을 믿었다.

나는 과장이기에 매년마다 10여 만 위안의 약품을 사오는데 당시 관례대로면 몇 만 위안의 사례금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한 푼의 사례금도 받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약품 가격을 낮춰 환자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나는 파룬궁 수련자이고 일마다 쩐싼런(眞善忍)을 원칙으로 하기에 당신들은 나에게 이런 사례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의료기계 공장에서도 먹고 마시게 하고 여행을 보내고 예물을 주는데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고 회사에서 공짜로 무엇을 주어도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지 않았다. 어떤 회사의 기계가 좋으면 곧 그 기계를 샀다. 회사에서 과장에게 150%의 상금을 주는 것도 나는 한번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한 상사가 돈을 내 통장에 넣어주었다. 우리 과의 경제적 효율이 병원에서 네 번째로 좋기 때문에 특수 장려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돈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내 몫은 다른 과로 넘겨주면서 그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나눠준 돈은 적었지만 그들이 내 성의를 보고 합작을 더욱 잘해주었다. 과 동료들도 아주 만족해하고 일을 함에 책임을 다했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겼다. “당신 집에 돈이 아주 많습니까?” 나는 우리 집에 돈이 없고 남편이 실업해 매달마다 7,8백 위안으로 생활을 하며 아들은 고등학교를 다녀서 돈이 많이 필요하지만 수련으로 내 몸이 좋아지고 정신도 즐거워졌는데 이는 돈으로 전혀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집에서 나는 대부분 가사를 다 하는데 남편도 더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나도 그와 다투지 않고 온종일 즐거웠다.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단속하는데도 화를 내며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당신이 자녀를 단속한다 해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은 진정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 나는 다시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았는데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해도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의 입장에서 사고했다. 천천히 아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고하는데 나중에는 교사 직업을 택했다. 학생들이 모두 그 아이를 ‘햇빛 선생’이라고 부른다. 우리 한 집안은 웃음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99년 7.20 이후 단번에 하늘이 무너졌다. 사회, 가정, 친척친구에서 오는 압력이 가중해졌다. 정말로 두 번째 ‘문화대혁명’이 온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 순식간에 나쁜 사람으로 변하고 책을 바쳐라, 연공을 안 한다는 보증과 서명을 하라, 방송국과 TV에서 수련생들을 인터뷰하는데 파룬궁과 사부님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라고 했다. 이 어디 될 말인가? 조그마한 은혜도 보답해야하는데 어찌 사람의 양심을 저버릴 수 있는가? 경찰은 두 번이나 나를 납치하고 5천 위안을 빼앗아가고 집을 수색하고 가족을 불러다가 훈계했다. 한번은 강제 세뇌를 40일 간 했는데 가족들까지 내 행방을 몰라 어디에 연락할 수 없어 미칠 듯 했다. 이 시기 나는 가족과 정(情)에 집착해 가족들의 고통을 해결해 준다는 이유로 사악과 타협해 수련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암에 걸렸으며 6개월 치료를 받았지만 내 고통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가족들도 더욱 고통스러웠는데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돈을 쓰고 걱정하며 겁을 먹어 아주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내가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고 중공을 두려워할 시기, 대법제자들이 한번 또 한 번씩 나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 ‘빨리 돌아오세요!’ 그 목소리는 아직도 내 머리에 맴돌고 있었는데 내 마음에 새겨졌다. 수련생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결국 돌아왔다. 사망 직전에서 헤매던 사람이 다시 대법수련으로 돌아왔다. 나는 사부님의 책을 읽고 통곡하며 울었고 내 나약함을 통분했다. 대법과 사부님께서 박해를 받을 때 떠났다가 현재 병이 심하니 다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오래 동안 사부님의 사진을 감히 보지 못했다. 사부님은 자비하시어 또 한 번 나를 구해주었다. 아주 빨리 기적이 발생했다. 아주 무겁던 다리는 힘이 생기고 노랗던 얼굴에 광택이 돌기 시작했고 두 손에 혈색이 돌고 간도 아프지 않았고 림프선도 좋아졌다. 대법은 정말로 신기하다. 지금 나는 매일 4,5시간만 자도 활력이 충족하다. 법공부, 연공, 출근하고 가사 외에 나는 사람들에게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그들에게 전자책 ‘전법륜’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대법의 수혜를 입게 했다. 파룬궁이 좋다는 진상을 알고 어떤 이는 암이 사라지고 병원에서 3개월밖에 못산다는 사람이 현재 3년이 지났고 신체는 갈수록 좋아졌다. 또 어떤 이의 암과 종양은 소실되고 가정불화로부터 화목을 찾았다. 어떤 이는 정신은 좋아지고 음침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건강한 얼굴을 회복했다.

할 말은 많고도 많다. 목숨을 구해주신 사부님의 은혜는 보답할 길도 없다. 나는 자신을 행운아로 여긴다. 행운으로 파룬따파를 얻어 수련하고 반본귀진의 길을 걷는 수련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체를 소중히 여긴다. 나는 최대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사람들이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다)’를 알게 해서 사람들이 더욱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게 할 것이다.

문장발표: 2010년 09월1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19/22981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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