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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마땅히 반박해의 중임을 감당해야

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모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파룬궁 수련생이 혹형으로 사망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정법노정이 오늘에 이른 지금 우리 성의 강제노동수용소는 이미 대부분 해체됐고 두 개의 강제노동수용소만이 아직 남아 있는데 한 곳은 여성 수련생을, 다른 한 곳은 남자 수련생을 감금하고 있다. 강제노동수용소가 해체됨에 따라 동수들은 중국 대륙 내 불법으로 대법제자를 감금하는 사악한 구세력의 검은 소굴을 모두 해체하는 것은 일종의 천상天象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또 사존께서 요구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동수들은 마땅히 이 검은 소굴을 해체해야 할 때라고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체적으로 협조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하게 되었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생을 감금하는 강제노동수용소 지역을 찾아가 협력하고 나섰으며 수련생을 구출하는 일을 직접 조직했다. 동수들이 모두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각각 분담하여 가족과 관련한 일, 진상을 알리는 일, 진상자료를 제작하는 일, 또 전화 진상, 거리에다 스티커를 붙이는 일, 사악을 해체하는 발정념 등을 하면서 협력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각지에 서로 다른 상태가 나타났다. 지역 간의 차이가 노출됐으며 동수간의 차이도 나타났다. 전반 일을 추진함에 간격이 조성됐다. 동수들은 교류에서 이 간격은 바로 법리상의 인식이 부동하여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자신의 인식을 제고할 수밖에 없었으며 법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주동적으로 원용해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고 능력 미달된다고 도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수련이란 생명을 성취하는 과정이지만 반대로도 말할 수 있는데 정말 그런 그릇[料]이 아니라면 수련 과정은 또 하나의 도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매번 일종 상태가 나타날 때면 틀림없이 일부 사람의 생각이 나오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수련하기 때문이다.”(《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불법적으로 대법제자를 감금한 사악한 구세력의 검은 소굴을 모두 해체하는 일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임을 똑똑히 인식했을 때 전체 대법제자의 통일적인 배치가 수요 되었고 대법제자가 완성해야 했다. 모든 대법제자가 이 일을 인식하고 주동적으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원용할 때면 사부님께서 손을 한번 휘젓는 순간에 그것이 곧 해체될 것인데 즉시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일을 통해 우리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 위덕을 수립하여 주시는 것이다. 속인의 말로 표현하면 사존께서는 공로와 좋은 점을 모두 대법제자의 문 앞까지 가져다 주셨고 우리가 앞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지 압력을 맞받아내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지를 보고 계신다. 어떤 지역에서는 법률형식으로 수련생을 구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해낼 수 없다고 여긴다. 사실 이는 이 일의 결과를 너무 중하게 보고 자신의 목표에 반드시 도달하려 한 것으로 사존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원용하려 하지 않았다. 개인의 성패를 문제의 관건으로 여긴 것이다. 사실 그는 전반적인 일은 사존께서 하시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제자로서 사존님의 가지와 가호가 없다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각 지역에서 지역별로 대법제자를 구출하는 일에 참여할 때 표면적으로는 현지의 일을 하며 기타 지역과는 큰 연계가 없어 보인다. 마치 하나의 단독적인 세포가 자신의 생명을 연화해가는 과정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구출에 참여한 대법제자는 또 더욱 큰 범위 내의 대법입자를 조성하고 있다. 전 중국 대륙의 각 성 각 지역의 대법제자가 모두 이렇게 해 나갈 때 그것이 정체적으로 사존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어떤 지역은 이 일을 추진하면 사악이 현지에 더욱 큰 박해를 감행할 것으로 두려워하고 있으며 이전의 비교적 안정된 환경을 잃게 된다고 여기고 있다. 사악의 박해에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강제노동수용소를 해체하는 일에 어떤 희망도 품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검은 소굴을 해체하는 과정에 압력을 무릅쓰고 사악을 저격하는 대법제자는 쉽게 큰 곤란과 시끄러움에 봉착하게 되며 일을 하기가 더욱 쉽지 않게 된다.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일을 통해 자신이 소재한 지역 범위 내에서 마땅히 사악을 깨끗이 제거해야 하는 일을 완성해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사존께서 이 일을 앞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위덕을 수립할 기회가 없게 된다. 기타 지역의 대법제자가 사악에 직면하여 위험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사심이 생기면 사악이 집중하여 기타 지역의 대법제자를 박해할 수 있는 기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박해가 발생한 후 수련생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심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숨겨진 집착 하에 이 난이 자신의 머리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게다가 자신이 잘 깨닫고 있다는 일종의 자본으로 여겼다. 만일 우리 전체 대륙의 대법제자가 모두 자신의 수련생을 구출한다면 정체로 협력하여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악이 당해낼 수 있겠는가? 어느 쪽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곧 해체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날 동수와의 교류에서 이런 일을 듣게 됐다. 4명의 수련생이 검은 소굴로 뛰어들어 불법으로 감금당한 대법제자를 면회하러 갔다. 그중 한 수련생은 울안에 들어서서 부터 핸드폰으로 비디오를 찍었다. 사악이 발견하고 비디오를 찍는 동수한테로 다가갔다. 기타 3명의 수련생은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서 비디오를 찍고 있는 수련생이 직면한 사악으로부터의 압력을 나누어 가지고 위험을 혼자서 감당하게 할 수 없다. 이 일념이 나오자 3명의 수련생은 함께 걸어 나가 경찰을 에워쌌다. 나중에 4명의 수련생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박해를 당하는 마난 속에서 사존께서는 바로 위타의 이 하나의 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일 기타 3명의 수련생이 모두 두려움으로 비디오를 찍은 수련생을 관계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1999년, 2000년 동수들은 천안문으로 법을 실증하러 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고 탄복해마지 않았다. 그럼 오늘날 어디가 천안문이겠는가? 한 가지 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우리가 자아를 전승할 수 있고 법리와 자아가 충돌되는 데서 걸어 나오고 사람 속에서 걸어 나와 정정당당하게 사존께서 배치하신 길로 걸어 나가며 집착을 베어내는 과정은 천안문으로 갈 때 사람의 마음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 지역으로 놓고 볼 때 불법으로 감금당한 동수의 친인 동수도 법률의 형식으로 구출하는 것은 타당하며 친인인 수련생이 안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형세가 이러하고 변호사를 청하면 반드시 사악을 불러들일 수 있으며 파룬궁을 박해하는 대세가 개변될 수 없다고 여기는데 자기 집의 작은 일에 큰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생각했다. 게다가 친인인 수련생이 3달 후면 만기되어 나온다. 이것은 바로 법리에서 명석하지 못한 표현이다! 우리는 구세력한테서 사람을 빼앗아내고 사람을 구도하고 있다. 그러나 동수지간에 법리상의 간격으로 사부님의 전반 정법노정의 추진에 영향주고 있다. 이 자체가 바로 신사신법에 있어서 절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반 박해의 큰 형세는 누구에 의하여 돌려져야 하겠는가? 물론 대법제자이며 속인이 아니다.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다른 한 방면으로는 오히려 걸어 나와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그 책임을 하지 않는다면 곤란과 위험을 다른 동수한테 밀어주게 된다. 마땅히 법에서 제고해야 할 심성이 오히려 에돌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가 수련의 길을 견지하는 과정에서 봉착한 저애와 시끄러움은 능히 원만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고험이다. 우리는 마땅히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내야 한다.

문장발표: 2010년 8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 추천마당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8/18/2284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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