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이웃 현 지역에서 7명 대법제자가 불법 재판을 받았다.
가족에서 선임한 4명 변호사가 변호사 팀을 꾸려 그들에게 무죄 변호를 해줬다. 변호사들은 중국 현행 법률에 따라 헌법으로부터 신앙자유, 인권수호 각도에서 헌법, 입법, 사법순서, 법률적 사실 등 각개 방면에서 7명 대법제자에게 정의로운 무죄변호를 해줬다. 변호사들은 구체적인 사건에서 범죄를 인정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네 가지 요건이 매 번 파룬궁 사건에서 모두 존재하지 않았으며 14개 사교 조직 중에 파룬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헌법에 신앙은 자유라고 규정했다. 진상 자료 인쇄로부터 9평 공산당, CD를 전하고 집회 시위를 하는 것 모두는 합법이므로 파룬궁 수련을 하는 것은 이치에도 법에도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사들의 정의롭고도 엄숙한 변호 장면은 진감력이 지대해 재판장 등 사람들은 이유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7명 대법제자는 법정에서 정정당당했고 방청석에 앉은 수많은 대법제자들은 정념으로 동수와 변호사를 가지해 주었으며, 본 현과 주변 지역 대법제자들이 정체적으로 발정념해서 구출에 협력했다. 동시에 사악이 법관과 세인에게 대법제자 박해에 참여하게 하여 대법에 죄를 지음으로서 도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변호사는 7명 대법제자를 무죄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나중에 법관은 결과가 없는 휴정을 선포했다.
이 일을 놓고 우리 현지 일부 동수들은 교류를 진행하면서 의문점 하나를 제출했다.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가 구출에 참여했고 박해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범위도 아주 컸고 여러 사람은 전반 과정에 아주 잘 했다고 여겼는데 왜 7명 대법제자는 무죄석방 되지 못했는가?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해야 수련생은 돌아올 수 있는가? 우리 매 동수마다 어떻게 수련에서 이 사건을 대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일찍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예전에 말했었다. 내가 말하는데, 실제로 속인사회에서, 오늘날에 발생된 일체의 일들은 모두 대법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촉성(促成)된 것이다. 비록 낡은 세력이 존재하여도, 당신들에게 그 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방법이 없다. 당신의 정념(正念)이 매우 충족하다면 낡은 세력은 방법이 없다.” (『각지설법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수련인이라면 마땅히 무조건 안에서 찾아 봐야 한다, 우리 매 개인에게 인식상 무슨 부족이 있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정체에 누락이 있지 않았는가? 우리 정체 협력은 이젠 상당히 제대로 됐다고 할 수 있다. 참여한 동수로부터 진상편지 쓰기, 전단지 배포, 발정념, 변호사의 표현 모두가 아주 출중했다. 이러고 보면 이 글을 보는 매 동수들도 모두 절실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는지? 마땅히 어떻게 정념으로 이 일을 대해야 하겠는지?
수련생이 돌아오지 못한 문제에 대하여 거울로 삼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박해당하고 어떻게 돌아왔던가? 예전에 박해 당하던 우리 수련생이 돌아올 때엔 표준에 도달했던가? 정념으로 나왔던가? 당시 어떤 사람은 형기가 찼거나 병업으로, 어떤 사람은 관계를 통해 돈을 써서 나오는 등등이었다. 당시 수련생은 법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아주 간절했다. 정법이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마땅히 법으로 가늠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문제에서는 법에서 자신을 귀정하고 진정 心性이 제고돼야 할 것이다.
수감 기일이 차서 돌아온 동수, 당신의 감당한 이 일체는 누가 배치한 것인가? 구세력이 배치한 것인가 아니면 사부님께서 배치한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한 방면으로 말하면 낡은 세력은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이여, 그것이 그래 여러분들이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묵인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당신더러 가라면 당신은 곧 가고, 당신더러 쓰라면 당신은 곧 쓰며, 당신더러 어떻게 하라면 당신은 곧 어떻게 하며, 당신을 잡아서 재판해도 당신은 곧 어쩔 수 없이 묵인한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사부님 이 단락 법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마땅히 법에서 자신을 귀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사일념으로부터 구세력을 부정하고 사부님 배치한 길을 잘 걸어야 할 것이다. 불법 판결을 받고 수감당하는 이런 박해 형식 가운데서 반박해하고 구세력이 만들어 낸 마난 중에서 수련하는 이것은 법리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못하고 구세력에 대한 전면 부정을 해내지 못한 것이 아닌가?
병업 형식으로 돌아온 수련생을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주신 점화라고 여기는데 이런 인식이 정말로 정확한가? 우리 이 문제상에서 교류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어떤 수련생은 생각한다. 나는 병업 형식을 통해 나와서 중생을 구도하련다. 내 기점은 중생을 구도하는데 있다. 실제로는 중생구도로 내심 심처에 나오려 구하는 집착을 덮어 감춘 것이다. 대법제자가 나타내는 병업상태는 우리에 대한 법의 더 높은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우리는 법을 실증하고 있는데 병업의 표현을 어찌 대법 실증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생이 대법제자의 병업상태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러면 어떻게 법을 실증하겠는가? 우리 정말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원용했으며, 중생을 구도한다 하는데 정말로 세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려했는가?
사람에게 기탁하여 돈을 쓰고 나온 대법제자의 내심심처에는 두려운 마음이 존재하는데, 불법 수감될까 두렵고 혹형 학대를 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속으로 생각한다. 돈을 써서라도 나가기만 하면 된다. 사악에게 통제당한 속인이든, 경찰이든 대법제자의 돈을 받아 조성한 결과이기 때문에 기점은 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사악에게 직접 박해당하지 않는 수련생은 어떠한가?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보겠는가? 동수 몸에 발생한 일을 우리는 정념으로 대했는가? 우리의 기점은 사적인 것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중생의 구원을 위해 생각한 것인가? 가령 우리 정체가 귀정되지 못했다면 표현되어 나온 것이란 무엇이겠는가? 수련생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이 방면의 요소가 아닌가? 이건 구세력이 우리의 틈을 타고 들어온 구실이 아닐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라고 하신 것은 무사무아, 선타후아(無私無我,先他後我)다. 이는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은 대법 실증, 중생구도다. 오늘까지 걸어온 대법제자는 반드시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문제가 나타나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찾아보고 법 중에서 자신의 일사일념을 귀정하며, 중생 구도 가운데서 자신을 잘 수련하여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잘 걸어 갈 것인가? 여러분이 모두 마땅히 잘 생각 보아야 할 바 이다.
조그마한 천박한 인식으로서 그다지 성숙된 것이 아니므로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법에 있지 않는 인식이라면 동수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6월 1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6/18/2255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