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4월 19일] 지난 수련의 길을 뒤돌아보면 어렴풋한 의혹 속에서 청성하고 이지적인데 이르렀고 다시 성숙으로 나아갔다. 점차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짊어진 역사적 사명과 중임을 알게 됐다. 바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주변에 사악한 중공의 독해로 깊은 수렁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볼 때 대법제자는 그들이 구도될 유일한 희망임을 생각하게 됐고 마음속에 무한한 감개가 일었다.
대법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중공의 참혹한 박해를 당하다
4천여일의 밤낮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뭉클함과 고통, 교훈과 이지, 냉정과 승화, 자비와 구도가 뒤섞여 굴곡적이고 간고했던, 기복이 심하면서도 소탈했던 수련의 길이었다. 음산한 기운이 뒤덮이고 유언비어가 휘날리며 거짓말이 빗발치는 세월에서 친척 간이 반목하고 친구사이가 멀어졌으며 이웃들이 뒷소리를 했고 교사 직업도 잃게 됐다. 강행된 3년간의 감금의 나날에 사악한 무리들의 발길질과 곤봉, 수갑은 나의 신념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사악의 험악한 몰골을 더욱 똑똑히 보게 했으며 정념정신(正念正信)을 더욱 강하게 했다.
1999년 섣달 27일 우리 삼형제와 몇몇 수련생은 함께 베이징에 갔다. 셋째 남동생이 천안문 광장에서 연공했고 경찰에게 붙잡혔다. 2000년 우리는 재차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갔다. 나는 붙잡혀 간수소에 갇혔고 셋째 동생은 위험에서 벗어났다. 음력 초하룻날 나는 혼자서 몸에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걸고 당당한 모습으로 천안문 광장에 걸어갔다.
3년간 감옥에서의 박해는 나로 하여금 더욱 청성하고 이지적으로 변하게 했으며 더욱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확고히 했다. 2003년 8월 나는 집에 돌아왔으나 참담한 광경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집은 사악한 무리에게 씻은 듯이 겁탈당했고 아들은 핍박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다시 교사직에 들어가기에는 불가능했고 밖에 나가 일하려 해도 악인들이 그러지 못하게 했다. 가장 나의 마음을 흔든 것은 70여세의 부모님이 밤낮으로 일하며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땅에서 얻은 미약한 수입으로 27명에게 빚진 2만 위안을 전부 갚은 일이다. 이 돈은 진(鎭) 정부 악도들이 야만적으로 사기 공갈하여 빚을 지게 된 것이었다.
음력설 전날 나는 아들에게 5위안 밖에 없는 돈을 주며 시장에 가도록 했다. 철든 아들은 시장에서 2위안밖에 안 썼다. 고무풍선을 사서 조카와 함께 놀았다. 나머지 3위안은 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해 우리집 문에는 주련이 나붙지 않았다. 설을 쇠면서 주련을 붙이는 것은 농촌에서 아주 중히 여기는데 부모님들이 그래도 많이 이해했다.
법공부팀을 간난신고하게 형성
2004년 나는 외지에 나가 일해 2천 위안을 벌었다. 1천 위안을 꺼내어 진상자료를 인쇄하여 세인을 구도하는데 썼다. 이어서 전심으로 법공부팀을 형성하는데 몰두했다. 시작에는 아주 어려웠다. 1999년 ‘7.20’ 때에 우리 진(鎭)에서만 불법 판결, 노동교양, 유랑하는 파룬궁 수련생이 십 몇 명이 되며 강제로 사기당한 재산이 백만 위안이 된다.
동수 집에 낮에는 갈 수 없고 대부분 밤에 갈 수 있었다. 촌(村)마다 거의 다 대법제자를 감시하는 악인이 있어 여러 면에서 모두 고려해야 했다. 집안이 모두 법을 공부했었다면 괜찮았으나 만일 공부하지 않았던 속인이 하나 있으면 많은 귀에 거슬리는 말들만 들었다. 어떤 집은 두려워 문도 열지 않았고 어떤 집은 일찍부터 문을 잠갔다. 문을 두드리면 개가 짓고 마을에서 경각성을 높였다. 게다가 산간지역이어서 마을이 다 떨어져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고 거주지도 분산되어 하룻밤에 몇 개 마을을 다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낮에 동수끼리 만나게 되면 오래 머물지 못했다. 한 동수부부 집에 찾아 갔는데 남자 수련생은 두려운 마음이 적었으나 여자 수련생은 직접 문 밖으로 밀어냈다. 또 두 명의 노년수련생은 아들딸들이 모두 외지에서 일했으며 두 노인은 집에서 한가히 지냈다. 나는 남자 노년 수련생이 또 전에 했던 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남에게 풍수를 봐주고, 길일을 선택해주며, 어린애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 나는 여섯 번이나 그의 집에 찾아갔다. 4번째에 찾아갔을 때 70여세의 노년 수련생은 나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여러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후에 또 찾아갔을 때 두 노인은 12시 정념을 발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 집에 법공부팀을 배치했고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모두 사당 조직에서 탈퇴했다.
2005년 나는 아들이 번 돈으로 오토바이를 구매했다. 밤에 타고 다니면서 협조일을 했다. 어떤 법공부팀은 금방 세워졌기에 두려운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며칠 견지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가 속인이여서 며칠 견지 못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그들과 교류해야 했다. 추운 겨울에 한 바퀴 돌고 나면 밤 11, 12시 됐다. 물을 마시려 보온병을 열었더니 비어 있었고 밥은 다 식어있었다. 집안도 얼어 있었고 배고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 연공장에는 80여세의 노년 수련생이 3명이나 있었다. 큰 법공부팀 교류가 있을 때면 저녁밥을 먹지도 못하고 일찍 떠나 산을 넘어야 했고 왕복 40여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밤 11시가 되어 먼저 가시라고 해도 그들은 가지 않았으며 함께 12시 정념을 발했다. 그날 밤 그분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여기에 비할 때 내가 겪은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몇 년간 우리 진은 20여개의 법공부팀이 세워졌다. 밤에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했으며 동수들은 진상자료를 들고 삼삼오오 다니면서 배부하고 붙였다. 법공부팀에는 끊임없이 신수련생이 들어왔고 노수련생도 다시 걸어 나왔다. 몇 개 법공부팀은 사악의 무리들이 어떻게 창궐하든지 엄동설한과 무더위에 아랑곳없이 2004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견지해왔다. 만일 사존님의 자비로운 가호가 없으시면 우리가 어찌 안전하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겠는가? 사존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감당하셨으며 너무나 많은 것을 지불하셨다. 제자는 갚을 길이 없으며 오직 사존님의 말씀대로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잘 걸으며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사부님의 정법을 돕고 중생을 구도
현지의 향진(鄉鎭) 혹은 타지 향진에서 수련생이 붙잡히거나 노동교양 당하면 우리는 발정념하고 진상을 알리는 외에 동수들을 조직해 그 집에 찾아가 파종과 추수를 도와주었다. 많은 세인들은 우리 대법제자에 탄복하며 악당을 호되게 욕했다. 몇 년간의 진상 알리기를 통해 많은 세인들은 모두 명백해졌고 사당조직에서 탈퇴했다. 어떤 촌의 당원, 공청단원, 소선대원은 전부 탈퇴했다.
시간이 어떻게 길고 짧든지, 갈길이 어떻게 험난하고 멀든지 대법제자라면 마땅히 전심전력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하며 우리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의 사전서약을 실현해야 한다.
문장발표: 2010년 4월 19일
문장분류: 정법수련 > 수련경과 > 진상 알려 세인구도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19/2217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