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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사일념에 대해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4월 10일] 2009년 9월 나의 친척 수련생이 국보대대에 납치당했고, 여섯 달 후에는 불법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많은 동수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진상도 알려줬고, 전 현(縣) 동수들은 모두 협력을 잘해 발정념을 하고 선을 권하는 편지도 보냈으며, 또 구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을 구해줬는데 왜 우리의 수련생은 무죄로 집에 돌아오지 못할까? 더구나 이 사건 전에도 구출 사례가 있었는데 왜 이번에는 안 되는가?

법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구세력은 매 대법제자에게 모두 그들이 요구하는 길을 배치했는데, 만약 대법제자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로 갈 수 없다면 구세력이 배치한 길로 가게 마련이다. 이는 바로 당사자 동수와 이 일을 듣게 된 수련생이 박해가 발생되는 그 순간의 일사일념이 법에 있었는가의 여부와 관계된다.

사악이 불법적으로 대법제자의 집에 뛰어들 때 우리의 가장 첫 번째 생각은 무엇인가? 이를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로 여기지 않았을까? 사악이 불법적으로 대법서적과 자료를 얼마 뒤져냈을 때, 이는 사람을 구하는 법기이지 사악이 박해하는 증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가? 사악이 대법제자를 납치했을 때 우리의 가장 첫 번째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어떠한 때라도 모두 사악의 명령, 지시와 요구에 협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가? 10월 1일 전에는 석방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대법제자는 정천독존(頂天獨尊)한 신이므로 사람은 신을 판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가? 박해받는 수련생이 법정에서 당장에서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을 때, 우리의 첫 번째 생각은 무엇이었는가? 이미 정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길 때, “제자 정념이 강하거늘 사부에겐 회천력이 있노라”(『홍음2』「사도은」)를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는 대법제자다. 수련을 10여년 씩 한 노제자로서 관건적 시각에 사부님께서 일체를 결정하신다는 생각을 했는가? 우리가 정말로 100% 신사신법을 했는가? 우리의 의식 가운데 사악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았는가?

나 자신을 놓고 말한다면 박해가 발생한 그 단계에 나의 전반 공간장은 두려움이란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사악이지 대법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끊임없이 발정념으로 이런 감각을 부정했으나 아무리 어떻게 해도 청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뭘 두려워하고 있지? 박해당할까 ‘두려워’ 하고, 평온한 생활을 잃을까 ‘두려워’ 하며, 개인이익이 손해당할까 ‘두려워’했는데 결국엔 여전히 ‘사(私)’ 자이다. 이 두려움은 나에게 법리가 분명치 못하게 했고 심지어 법이 생각나지 못하게 했다. 동수와 함께 공안국에 가서 박해에 참여한 사악을 직접 만나고, 법원에 가고, 변호사를 찾아 진상을 알려줄 때에 가서야 이 두려움을 해체하게 됐다.

이때에 나는 박해를 반성해 보았다. 박해가 발생할 때 나는 대법서적을 보호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사악이 이미 책을 찾아냈다는 말을 듣고 무형 중 ‘책을 찾아냈으니 빼앗아 갈 것’이라고 승인했다. 그 때 나는 현장의 기타 다른 중요한 물건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결과적으로 집안을 다 뒤져도 그 물건만은 보지 못했다.

동수여, 오직 우리의 일사일념이 법에 있기만 한다면 사악은 우리를 감히 박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박해가 발생하면 우리 사상 깊은 곳에는 도리어 친인을 고발한 진상을 알지 못한 그 속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뿐, 가장 빠른 시간에 자신에게 무슨 누락이 있어 사악이 틈을 탔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에게 누락이 있다 하더라도 구세력이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박해 구실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 때에 우리가 보면 그 속인은 대법제자보다 더 크다. 속인 중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우리의 잠재의식 가운데는 그가 우리 사부님보다 더 커 보인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한 손으로 신을 붙잡고 놓지 않고, 한 손으로는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격이다. 박해 당했던 수련생이 선의적으로 속인사회 형식에 부합되게 적당히 돈을 쓰라고 일깨워 줄때면 우리의 잠재의식 가운데 돈을 법 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럼에도 사부님께서 어찌 우리를 위해 책임질 수 있겠는가?

물론 신사신법이란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진정 그 정도까지 수련돼야만 깨달을 수 있다. 박해당하는 동수와 친인의 그렇듯 커다란 압력 하에서의 정념은 우리가 평화로운 환경에서 담론하는 정념과는 역시 같지 않은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으로서 부당한 곳은 지적해 주길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4월 1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10/2212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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