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1월 4일】 박해 자체는 두려울 것 없지만 두려운 것은 박해당하는 과정에 정념이 없이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여 박해로 하여금 끝임없이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그가 아직 원만하기 전에는 긍정적으로 사람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자신의 수련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사람마음이 확대되어 사악이 박해하는 구실이 될 것이며, 아마 박해당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박해 형세가 존재한다 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수련을 하여 약간의 사람마음도 없을 때를 기다려 다시 사람을 구한다면 늦지 않겠는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박해 형세인데 사명을 완수하려면 한편으로는 수련하고 한편으로는 구해야 한다.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자신이 바르게 걸으면 이미 발생한 박해를 부정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 해야만 비로소 사명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중국 대륙에서는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박해당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넘어졌다 일어나서 주저없이 용감하게 계속하여 법실증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넘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두려운 것은 일어설 용기가 없어 감히 앞으로 계속 걸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왕 이미 법을 다 얻었으니 안에서 찾고, 법중에 자신을 귀정하면서 용감히 일어나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최대의 자비심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시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라,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련에서 그 어느 사부도 우리 사부님처럼 이렇게 제자를 너그럽게 대해주지 않았다. 잘못 했으면 인식을 하고, 인터넷에 성명을 쓰기만 하면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다시 수련을 할 수 있다. 이렇듯 홍대한 자비 아래에서 우리는 또 무슨 이유로 이것저것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운 마음이 장애가 되어 걸어 나오지 못한 그러한 동수들은 박해받지 않아 보기에는 안전한 것 같지만, 사실 당신은 이미 박해속에 처해 있다. 사악이 경찰을 조종할 필요도 없이 단지 당신 사상중의 두려운 마음만 강화시켜도 당신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어 당신으로 하여금 감히 중생구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당초의 당신의 서원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훼멸되게 할 것인데 이것이 그래 박해가 아닌가? 유형적인 박해는 인식할 수 있으나 무형적인 박해는 훨씬 견뎌내기 어렵다! 바로 이 하나의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수련인을 훼멸했던가? 1999년 박해가 막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예전 동수들이 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을 이탈했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장차 무엇이겠는가! 박해당하는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주동적으로 사오(邪悟)하였고 심지어는 대법의 대립면으로 걸어갔는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이겠는가? 두려움 때문에 중생구도를 하지 않고 서약을 위배하면 그 종말이 또 어떻겠는가?
대법제자의 수련과 중생구도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는 결코 다른 공간의 사악이 아니며, 인간세상의 사당(邪黨)도 아니다. 그것은 대법제자 사상 중의 두려운 마음이다.
아래에 우리는 이 두려운 마음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그것은 어떻게 작용을 발휘하는지 해부해 보자. 두려움의 우리 대뇌 중에서의 표현은 하나의 사상염두이다. 이런 두려운 염두가 대뇌에 나타날 때, 우리는 흔히 뭔가를 두려워하게 되며 따라서 자신이 뭔가를 두려워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두려운 염두는 자신 사상중의 사상업력과 관념에 붙어서 대뇌에 반응시켜 조성된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이 일념은 사상업력과 관념이 내보낸 것이지 결코 우리 진정한 자신, 즉 주왠선(主元神)이 내보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 대뇌와 신체에는 수많은 생명이 생존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의 주왠선(主元神) 말고도 또 약간의 푸왠선(副元神)이 있으며, 또 수많은 관념과 사상업력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직접적으로 대뇌를 통제하는 능력이 있는데, 누가 강한가를 보고 누가 강하면 누가 대뇌를 지배하고 신체를 지휘하여 일을 하게 한다. 당신이 매를 맞을 때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주왠선(主元神), 푸왠선(副元神), 사상업력도 모두 아파 한다. 당신 자신의 주왠선이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푸왠선은 일정한 정도로 잘못된 것을 아는 상태에서 그도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상업력은 두려워할 것이다. 그는 아픈 것이 싫어 필사적으로 당신의 대뇌 중에 두렵다는 염두를 반영시킨다. 아울러 관념과 결합하여 당신더러 얼른 수련을 포기하여 더이상 매를 맞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업력이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만약 어느 것이 자신인지 가리지 못한다면 대뇌 중에 생긴 모든 염두를 모두 자신으로 여길 것이며, 얼떨떨하게 사상업력을 따라가서 일을 할 것인즉, 그럼 당신은 이 대뇌와 신체를 사상업력에 준 것과 같으며, 당신은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수련이란 바로 자신을 찾아야지 대뇌 중에서 온 염두에 따라 해서는 안 되며, 법으로 대조하여 법에 부합되는 것이면 그건 바로 자신의 염두이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면 그건 자신이 아니므로 그것에 따라 해서는 안 된다. 두려운 마음 역시 이렇게 대해야 한다. 우리의 사상 중에 두려운 염두가 나타날 때 당신은 마땅히 사상업력과 관념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즉각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내가 두려운 마음을 버릴 때, 가벼운 두려움이면 일념으로 제거해 버릴 수 있었지만, 엄중한 두려운 마음은 앉아서 두 손을 제인(結印)하면 잠깐 사이에 제거할 수 있다. 가령 당신이 자신의 사상중의 두려운 사상업력과 관념을 모두 닦아 없애버렸다면 그것은 대뇌 중에 반응되지 않을 것이며, 당신도 두려운 염두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대뇌는 스스로 무슨 염두를 생기게 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영체가 대뇌에 반응해야만 비로소 염두가 생겨나는 것이다.
아래에 나는 일부 동수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전형적인 두려운 마음을 해부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어떤 수련생은 아픔과 빨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 집착의 내원은 관념으로서 관념을 전변시키지 않는다면 집착을 버리기는 어렵다. 당신이 좋다고 여기는 물건을 당신더러 버리라고 하니 당신이 달가워하겠는가? 억지로 내려놓게 했다 하더라도 마음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직 당신이 그것은 나쁜 물건이라고 인식했을 때라야 당신은 달갑게 내려놓을 수 있으며, 이렇게 내려놓는 것만이 비로소 철저한 것이다. 우선 전변시켜야 할 속인의 관념이란 바로 고생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것이다. 고생을 하는 것은 수련인으로 말하던 속인을 놓고 말하던 모두 좋은 일로서 고생을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가 업력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고생을 하는 것이다. 고생을 하면 소업할 수 있고 장래에 행복할 수 있는데 그건 좋은 일이 아닌가?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고생 속에서 정념으로 대할 수 있다면 씬씽(心性)을 제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덕을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고생은 좋은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정법 중에서 수련하고 있으므로 우리 개인수련을 초월하는 더 큰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경찰이 우리를 때리는 것은 대법을 겨누어 온 것이다. 경찰이 우리를 때릴 때면 대법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장래 그는 이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에서 볼때, 이런 고생을 겪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서 피동적으로 박해를 감당하면서 겪는 고생은 좋은 일이 아니며, 반박해를 하고 법을 실증하면서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고생을 겪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다. 피동적으로 박해를 감당하는 가운데서 겪는 고생은 수치스럽고, 반박해 중생구도 중에서 고생하는 것은 위덕을 건립하는 것이다. 살아서 고생하는 것이 두려운 그런 수련생은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에 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서서 문제를 보고, 자신이 고생하고 괴로울까 두려워한다. 실질적으로 이런 사상염두는 사상업력과 관념의 반응으로써 진정한 당신 자신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이외에 여기에는 하나의 관념이 작용하고 있는데 납치 당하면 생고생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바로 생고생을 인정하는 것이고, 말밖의 뜻인 즉 납치되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생고생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박해에 대한 묵인이며, 이는 사악에게 계속 박해할 구실을 순순히 제공해 주는 것이다. 자신은 박해를 능히 부정하거나 제지할 수 있다는 신념이 없고, 자신을 사악의 아래에 놓았는데, 실질적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여긴 것이지 신(神)으로 여기지 않았는바, 정념이 부족한 표현이다.
우리는 한 가지를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부님은 우리가 바로 주연이며 바른 것이던 삿된 것이던 모두 대법제자의 수련과 중생구도를 둘러싸고 움직인다고 말씀하셨다, 외부 환경이 어떠한가는 우리의 마음으로 촉성되는 것으로서 일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 마음이 바르면 일체는 따라서 귀정되고, 우리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외부 환경도 좋지 않게 변한다. 우리가 그더러 좋으라면 그는 좋게 변하고, 우리가 그를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 그는 곧 좋게 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은 외부 환경의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외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은 마음으로부터 착수하여야 근본상으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납치당하면 생고생을 한다고 여긴다면 납치당한 후에 정말로 생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촉성된 것이다. 사악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이용하여 기회를 타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동수들의 사상 중에는 ‘만일’이라는 종류의 사유가 있다. 만일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다 박해받으면 어쩌지? 만일 박해받는 가운데서 지탱할 수 없으면 어쩌지? 만일 ……. 일을 생각할 때면 늘 일을 제일 나쁜데로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법실증하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한다. 실은 여전히 주객관계를 전도한 것이고 굳어진 관념으로 문제를 본 것이다. 만일(万一)의 뒤에 만이(万二)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은 일체를 개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불법(佛法)은 끝이 없다, 당신은 대법제자가 아닌가? 당신은 신(神)이 아닌가? 당신에게 가장 위대한 사부님이 계시지 않는가?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결정하시지 않는가? 우리 몸에서 발생한 일에 우연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가 마음을 바르게 놓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일체를 따라서 귀정해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는 대법제자의 마음을 둘러싸고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왕에 결정적인 요소가 대법제자의 마음일진대 그것이 만일이던 만천이던 상관할게 뭔가. 자신의 이 마음을 파악하면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 환경이 우리의 정념에 따라 움직이게 해야지 사람마음을 방임한 결과에 따라 움직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지탱할 수 없다’를 말해 보자. 이 ‘지탱’이란 이 글자는 옳지 않다. 박해에 대해서는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제지해야 한다. 지탱은 피동적으로 감당하는 것이고 법을 위해 책임지지 않으며 또 경찰을 위해 책임지는 것도 아니며, 자신을 위해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은 대법제자이고, 당신이 박해받는 것은 대법이 박해받는 것이며, 경찰 역시 박해받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주동적으로 박해를 제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박해를 제지하려면 반드시 법의 힘에 의거해야지 사람의 힘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사악을 이길 수 없다. 오로지 대법만이 할 수 있다. 수련의 이치로부터 말한다면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고비를 넘는 난은 모두 당신 지금의 층차에 따라 얼마나 큰 감당 능력이 있는가에 따라 안배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세력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파괴성적으로 배치한 것으로서 당신이 지금 어떤 층차에 있든지 상관없이,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관계없이 파괴성적으로 당신을 고험한다. 수련을 잘하여 층차가 높은 어떤 사람은 지탱해 냈지만 수련에 차하고 층차가 낮은 사람은 지탱하기 아주 어려워 타협하여 전화(轉化)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에 따라 지탱하고 피동적으로 박해를 감당하려면 안 되는 것이다. 법에 서서 법력에 의거하여 박해를 제지하는 이것만이 비로소 적극적이고 유효한 방법이다. 법력을 어디로부터 얻었다면, 바로 전면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 하게 될 것이다. 주동적으로 안에서 찾고 자신을 귀정하면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해주실 것이며, 사악은 감히 계속적으로 박해하지 못할 것이디. 발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하면 조종하는 자가 없어짐으로 박해는 자연히 정지될 것이다. 진상을 알려 경찰을 구도하면 실행하는 자가 없어짐으로 박해도 정지될 것이다. 그외 박해당하는 중에 정념으로 악인의 악행을 제지한다면 이 역시 아주 효과있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련한 것이 어떠하던, 어떤 층차에 있던, 만약 우리가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고, 법중에 선다면, 대법의 뒷받침이 있고 사부님 보호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박해를 제지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설사 우리가 수련을 잘하여 층차가 높고, 의지가 굳세고 박해를 지탱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가서 지탱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의지를 실증하지 말아야 하며, 법을 위해 생각하고 중생을 위해 생각하며, 주동적으로 법력으로 박해를 제지하고 법을 실증해야 한다.
또 하나의 비교적 전형적인 두려운 마음이 있다. 바로 박해가운데서 지탱하지 못하여 대법을 배반하고, 나중에는 수련되지 못하여 지옥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이 역시 자신을 보존하려는 사심(私心)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은 것이며, 원만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은 이 역시 사상업력과 관념의 반응으로서 그것이 원만에 집착한 것이다. 진정한 당신 자신 ㅡ 주왠션(主元神)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전혀 이런 염두를 움직이지 않는다. 원만이란 일종의 경지로서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지는 닦아낸 것이지 집착하여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 사상중의 자신을 배려하는 그런 사람마음은 바로 당신이 원만하는데 있어서 장애이므로 반드시 닦아버려야 할 물건이다. 신(神), 그는 자비로운 것으로서 그는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염두도 움직이지 않고, 중생구도를 위하여 그는 일체를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당초에 천신만고를 다하여 인간세상에 온 것은 바로 오늘의 중생구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왜 사명을 완수해야 할 때에 용감히 나서지 못하는가? 인간세상의 이것이 중요하고 저것이 중요하며, 이것도 저것도 다 아깝고 내려놓을 수 없어 사람 속에 빠져 버리고 자신의 수련을 잃었다. 자신의 원래 소원도 잊어 버렸는데 그야말로 가치없는 일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황토는 천인(天人)의 대변이라는데 우리는 똥구덩이에서 사는 것과 같으며, 대변이 아니면 흙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소중해 여기고 미련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원만하면 이곳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왜 환경 자체에 집착하는가? 이 환경이 좋던 나쁘던, 편안하던 엄혹하던, 우리는 모두 그를 이용하여 자신을 승화하고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법은 표준이 있고 원만은 당신의 수련과 지불에 대한 보답이며, 원만의 표준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사부님께서 결정하시고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전력을 다해 중생을 구도하시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원만을 위해 보류를 갖고 하면서 사부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사부님께 우리를 원만하게 해달라고 한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또 하나의 속인 마음을 반드시 바꿔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눈으로 본 것이 진실이라는 관념이다. 정법을 위하여 삼계를 만들었고, 대법제자가 미혹속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또한 역시 미혹속에서 세인들에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삼계를 만들 때 바로 반대로 만들었다. 이곳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반대 이치이고, 우주 법리와는 반대인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세상에서 사람이 생존하는 중에 세계를 인식하는 중 형성된 관념은 모두 반대 이치로서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가짜 이치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공산당이 선전한 유물주의와 외계인이 인류에게 전해준 실증과학의 영향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봄에 갈수록 절대적으로 만들었다. 과학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은 믿지 않으며,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야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면서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 대법제자도 이런 환경속에서 생활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상속에도 모두 이런 관념이 있다. 만약 이런 관념을 철저히 전변시키지 않는다면 수련과 중생구도 중에 그것의 영향을 받게될 것이며, 심지어 박해 당하는 중에 영향은 더욱 클 것이다. 부동한 층차에서 천목이 열린 수련생은 사부님 법신과 호법신이 자기 신변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대다수 천목이 열리지 않은 수련생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여러분의 천목이 완전히 열려 신(神)처럼 무엇이나 다 볼 수 있다면, 사부님 법신과 호법신이 자기 신변에 계신다는 것을 보고, 자신이 수련된 신의 일면의 위력이 비할바 없이 큰 것을 보아낼 수 있다면 당신이 아직도 사악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비단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동적으로 신통을 사용하여 사악을 제거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지금 왜 사악을 두려워하는가? 한 방면으로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 진실이라는 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부님의 말씀에 대하여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경찰을 대면했을 때 자신을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여기는데, 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전 국가 기구를 장악한 중공 사당(邪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 두려운 것이다.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사부님의 말씀마저 철저히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신사신법(信師信法)은 수련의 가장 최소한 기초인데 신사신법하지 않고도 진수(眞修)할 수 있겠는가? 진수하지 않는데 누락이 없을 수 있겠는가? 구멍이 있으면 사악이 뚫고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해는 바로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 아닌가? 누락이 없이 신사신법하고,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면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하며 용맹정진하면 보증하고 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부당한 곳은 동수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1월 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1/4/2155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