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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이란 두 글자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글/대륙 대법제자 벽련(碧蓮)

【명혜망 2006년 11월 16일】 내 주위에는 몇 쌍의 젊은 부부 동수들이 있는데 늘 모순으로 시끄럽다. 일단 억울한 일이라도 있으면, “만약 속인이었다면 벌써 그(그녀)와 이혼했을 것이다” 등을 말한다. 처음에 나는 단지 그(그녀)들에게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나중에 그 중 한 가정의 남자수련생이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악경에게 납치된 후 정념으로 벗어났지만 오히려 더는 집에 돌아올 수 없는 일이 발생한 후 이것이 아주 엄중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이에 여기서 부부 동수들과 한번 교류해보고자 한다.

아주 많은 넘기기 힘들 것 같은 모순들이 우리 부부 동수들의 수련환경에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상대방과 이혼하려는 변이적인 생각마저 나타나게 한다. 그 원인은 우리에게 아직도 여러 방면에서 집착심이 존재하고 있으며 집착심이 건드려져도 여전히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기간 사당이 의도적으로 주입한 투쟁철학의 환경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눈과 귀가 아귀다툼으로 오염되어 마치 다투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고 탄압하지 않으면 원한을 풀 수 없는 듯하다. 젊은 부부에게도 이런 문제가 존재해 자신의 관념, 표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만약 거절당하면 한사코 남의 잘못을 찾는다. 일부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환경은 바로 이 점을 의식하게끔 촉진하는 부분이다. 일부는 의식했어도 내려놓지 못하는데 이는 뻔히 알면서도 계속 범하는 격으로 충돌이 더 한층 격화되어 크게 싸우거나 혹은 냉전에 들어간 후 속인처럼 결혼에 대해 원망과 혐오가 나타난다. 또 최저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없이 입에 이혼이란 말을 달고 지내며, 자신은 어떻게 괜찮기 때문에 매우 차한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다고 표시하는 것 같다. 이는 속인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수련 중의 매 사람은 모두 완벽하지 않고 또한 멀고 먼 천체에서 온 수많은 요소들이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혹은 처리방식이 서로 달라지게 만들었다. 어떤 문제에서 자신의 인식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2)》〈길〉에서 이렇게 지적하셨다.

“법을 배우고 수련하는 것은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흔히 많은 수련생은 늘 다른 사람을 본보기로 삼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곧 어떻게 한다. 이것은 속인 중에서 양성된 좋지 못한 행위이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본보기가 없으며 개개인이 걷고 있는 길이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기초가 같지 않고 각종 집착심의 대소가 같지 않고 생명의 특징이 같지 않고 속인 중에서의 하는 일이 같지 않으며 가정환경이 같지 않은 등등의 요소가 개개인의 수련의 길이 같지 않고, 집착심을 버리는 상태가 같지 않고, 관(關)을 넘기는 크고 작음이 같지 않음을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표현상에서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찾기가 어려우며 편차(便車)에 편승하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닦아놓은 길과 순풍차(順風車)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결코 수련이 아니다.”

나는 이 한 단락 법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많은 문제의 인식과 처리 방식에 큰 차이가 있는데 이는 모든 부부 동수들도 다 동감할 거라고 믿는다. 그럼 어떻게 이런 차이점을 마주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 《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에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면 된다.

“그들은 어떠한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寬容)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고 있다.”

우리는 대법 속에서 승화한 생명으로서 법공부를 통해 대법의 진귀함과 우리의 행운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사부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제자이다. 우리는 생생세세 모두 사부님의 관할 속에 있으며 더욱이 부부가 함께 대법제자 수련의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사부님의 배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때문에 부부의 연분이 일반적이겠는가? 단지 속인상태에 부합되는 간단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것은 가장 바른 길이 아닐 것이다.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인이란 이 가장 복잡한 환경 속에서 수련하는 형식을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더러 각 방면에서 인류사회의 모범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에는 혼인에 대해 극도로 변이되고 왜곡되며 이기적이고 마성이 강한 조류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초탈하며 화목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포함한다. 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수련경지의 체현이고 우리 부부 동수 쌍방이 모두 곤란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정체 원용을 위해 끊임없이 높은 표준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제고한 필연적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대법 속에서 부부의 연분은 신성한 것으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해주신 수련환경이고 우리가 사부님을 따라 정법 하는 중에 더 큰 한도에서 적극적인 작용을 발휘하게 하신 것이다. 만약 세 가지 일을 잘 해야 하는 짧은 시간 내에 편리한 시간과 공간적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속인 생활의 행복, 편안함, 순조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집착하거나 혹은 감정의 만족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정법이란 신성하고 위대한 일을 한켠에 밀어놓은 것이며 이는 아주 큰 사명을 짊어진 대법제자로서는 바로 범죄이다!

아마 일부 수련생은 정말 이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의 불만을 풀어내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수련인이 일으킨 의념과 한 말에는 에너지가 있고 더욱이 현재 우주 뭇 신의 주목 하에 흑수, 썩은 귀신, 사령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 하에서 법에서 벗어난 일사일념은 모두 박해의 구실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아직 이렇게 큰 누락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예를 하나 들겠다. 80세 할머니가 진상을 안 후 나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요녕성 금주(錦州)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아들이 어찌된 일인지 늘 울었다. 엄마는 귀찮아서 아이를 혼냈다. “또 울면 강에 던져버릴 거야!” 그 결과 배에 앉은 후 배가 한사코 아래로 가라앉으려 했다. 배가 곧 가라앉을 무렵 뱃사공이 배 안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들 중에 혹시 말을 잘못한 사람이 없나요?”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강에 던지겠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인정했다. 뱃사공은 바로 당신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아들을 들어 강에 던져버렸고 그러자 배가 다시 솟아올랐다고 한다…….

문장발표 : 2006년 11월 1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정법수련>법리교류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1/16/14258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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