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30일] 한편의 교류문장을 보았는데, 법실증 사업을 대량으로 하고 있는 한 수련생이 일이 많아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홀시하고, 법공부할 때에도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했으며, 장시기 동안 발정념할 때 손이 기울어지는 정확하지 못한 상태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문장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수들은 줄곧, 그녀는 정념이 족하니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역시 우리 정체 동수들에게 거듭 시간을 주어 우리더러 깨닫게 하려 하셨던 것이었으나 우리는 진정으로 그런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비록 어떤 때 우연하게 일깨워 주긴 했으나 접수하지 않으니 그만 두었고, 근본상으로부터, 법리상으로부터 깨닫지 못하였으며 진정으로 동수의 일을 나의 일로 여기지 않았고, 무너뜨릴 수 없는 정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이 수련생은 사악에게 틈탈 기회를 주게 되어 박해 당할 때 많은 고생을 하였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나에게 주는 감촉이 아주 깊었다.
우리 현지에 갑이라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그의 온 가족이 다 수련하였다. 그는 가정자료점을 꾸렸는데, 그의 주변의 동수들은 모두 그가 아주 훌륭하며, 대법을 위해 지불하기 달가워 한다고 여겼고, 그도 수많은 대법일을 하였다. 하지만 장시기 동안 법공부에 대해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는데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할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이었고, 또 주위 동수들은 그가 주간, 진상자료 등을 모두 잘 만들기를 바랐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또 직접 보내주어야 했다. 주관상으로 그는 법공부 시간이 적더라도 단지 5분간이라도 마음을 조용히하고 공부하는 편이 한 시간 동안 마음이 조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하기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사부님께서 이런 법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가져다 자기에게 구실을 댄 것이었다) 말 밖의 뜻인즉 본인은 법공부를 적게 하긴 하지만 정념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단지 일깨워만 주었을 뿐이다. “법은 마땅히 많이 공부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그의 정념은 확실히 아주 강하다고 여겼으며, 나는 여전히 그보다 못하다고 자탄하면서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동수들도 일깨워주긴 했어도 그저 겉으로 말하는 데만 그칠 뿐이었고, 상황도 개변되지 않았고, 그도 여전히 아주 바빴다, 나중에 그의 온 가족이 납치되어 박해를 당했다.
이전의 상당한 한시기 동안 사부님의 점화가 있었고, 주변 동수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은 충분한 중시를 일으켜 청성하게 깊이있게 안을 향해 찾지 않았으며, 정념이 족하다는 것으로 모순을 회피하였다.(사실은 표면적으로 얼마나 일을 하는가로 가늠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는 적지 않은 작용을 일으키는 자료점이므로 사부님께서 마땅히 보호해주실 것이라고 여겼던 것인데, 바로 큰 길로 걸어가면서 차에 부딪혀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 사람처럼, 구하려는 강렬한 마음과 의뢰심을 지녔던 것이다. 보건대는 한 자료점이 파괴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정체적으로 누락이 있었던 것으로, 모든가 상관되었거나 이 일을 들었던 동수들은 모두가 마땅히 자신을 찾아봐야 한다. 물론 한 사건의 원인은, 다방면이긴 하지만 단지 표면적으로 반영된 것이란 곧 동수 본인의 법공부가 적었고, 기타 동수의 의뢰심은 그를 일에 바쁘게 하였는 바, 사실은 스스로 감당해야할 것을 모두 그에게 밀어주었던 것이었다. 예를 든다면 나도 그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서도 어떤 때는 스스로 가서 사는걸 덜기 위해 그에게서 빈 CD를 가져갈 때도 있었다. 동수 본인은 또 체면이 두려워 남을 거절하기 싫어하다보니 무형 중에 타인의 의뢰심을 키워주게 되었다. 자료점에 오는 사람은 많았으나 안전조치를 중시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정념이 강할 것만 강조하는 등등이었다. 이 방면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토론하고자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란, 주변 동수들이 각종 기미를 알아챘을 때 마땅히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집착을 보고 우리는 말해야 하는가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물론 말해야 하며 선의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인정에 막혀 말하기 싫어한다. 속인 사이에서는 인정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도 정상이지만,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인정 자체가 바로 우리기 닦아 버려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왜 우리더러 보게 했는가? 바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것이 아닌가? 우리의 입을 통해 수련생을 일깨워준 것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잘했던 간에(사실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심성이 훌륭한 것으로서 표면상으로부터 보아냈을 뿐만이 아니다)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필경 사람의 마음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가 강렬하게 무언가를 집착하고 있을 때엔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의적인 일깨움은 바로 엄한에 따스함을 보내주는 것과 같다. 나는 한때 꾀임에 빠져들어 세뇌반에 납치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꾀임에 들 수 있었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주요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었다. 의식하지 못하여 크게 넘어지고 굽은 길을 걷게된 후에야 누군가 나에게 말해 주면서 그전에 나의 이 집착을 발견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왜 당신은 나에게 일깨워 주지 않았는가?” 라고 하자 그녀는, 당시에는 정 때문에 말하지 못했고 좀 더 후에 다시 말해 주고자 했다고 하였다. 당시 그녀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해도 내가 꼭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녀로서 마땅히 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나 익숙하지 못하므로 다음에 말하겠다고 한다. 속인은 익숙해지면 말하기도 쉽다고 한다. 하지만 수련인이 의거하는 것이 이 관념인가? 아울러 앞으로 말할 기회가 있겠는지는 말하기 어려우며, 우리더러 보게 하였는데 왜 제때 일깨워주지 못하는가? 바로 위에서 든 그 예처럼 불필요한 박해가 발생된 후에 말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몇 번 말해도 효과가 보이지 않자 아예 말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어쨌던 나는 일깨워 주었고 책임도 다하였다.’ 심지어는 이렇게 생각한다. ‘법도 다 배웠고, 사부님도 상관하고 계시겠다. 그는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고, 다른 동수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을 동수도 온 가족이 법을 얻었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수련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수련하는둥 마는둥 하였으며, 문제를 사고하는 것이란 모두 속인의 각도로부터 출발하였고, 그의 집 역시 자료점이었지만 부부간 모순을 장시기 해결하지 않았고, 을은 일에 바삐 맴돌았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법공부가 들어가자 않는다고 말하기에 나는 그 때 그에게 절대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건 너의 진짜 생각이 아니므로 반드시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긴 했지만 그저 그러는데 그치고 말았다. 또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가 세인을 구하는데 대해 방법이 없어 낙심하고 있으며,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 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너에게 이런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되며, 너는 자신의 상태를 조절하여 어느 정도까지 하던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때 나는 그에게 그다지 큰 촉동이 없다는 감을 느꼈고, 후에 자료를 배포하다 납치당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의 가족에게서 들은데 의하면, 평소에 다른 동수들이 와서는 기본적으로 주간이나 자료를 달라고 할 뿐 법리상에서 그와 교류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고, 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도와 함께 구세력의 교란에 대처하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그런데 내가 몇 번 일깨워 주어도 개변이 없는 것을 보고 더는 마음을 쓰지 않았고, 법공부를 통해 그가 개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마귀굴에서 확고한 정념에 의거하여 돌아온 동수마저도 모두 유사하게 사부님에게 의뢰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일에서 정념이 족한 것은 다른 일에서 집착이 없다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으로, 나는 동수들에게 무의식간에 정념으로 관을 넘은 그런 수련생을 따라 배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상대방이 접수하지 않고 심지어 짜증나 하면, 상대방이 짜증나 할까봐 두려워하는 이 마음에 장애되는데, 이는 여전히 자신의 사(私)를 수호하는 것이며, 자신의 감수를 수련생이 교란을 적게 받고 정체가 손해를 적게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교류문장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더 많은 동수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그래 동수에게 집착이 있는데 선의적으로 제출해 주어 잘못된 구역을 벗어나게 하지 않고 박해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가서 구출할 것인가?” 오늘 나는 무엇이 “조사정법”이고, 무엇이 동수이며, 어떻게 하면 사부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고, 더 많은 기쁨을 드리겠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부터 잘해야 하고, 동수의 좋은 방면만 늘 입에 달고 있지 말아야 하며, 좋다는 것은 마땅히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한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서로간의 배합중에 책임을 다하여 자아를 내려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동수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진정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정체를 형성하여 함께 사부님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또 한 편의 명혜망 문장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수에게 뚜렷한 집착이 있는 것을 보았어도 말하기 거북해 한다. 그는 나보다 일찍 법을 얻었다. 동수에게 누락이 있는 걸 보아도 나는 법을 늦게 얻어 말에 힘이 없으니 협조인더러 말하게 하자. 정체에 누락이 있어 사존님의 정법진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상관인원을 찾아 교류했으나 예기한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자 ‘후유, 그만하자, 동일한 사부님에 동일한 법을 누가 깨달으면 누가 얻고, 누가 깨닫지 못하면 누가 얻지 못하며, 얼마를 깨달으면 얼마를 얻기 마련인데 하필 내가 당신을 기쁘지 않게 해서는 뭘 하겠는가?’ 정체에 장기적으로 누락이 있어도 제때에 막지 않아 구세력은 잔인한 수단을 써 이틀 사이에 8명의 수련생을 체포하였고, 21명의 수련생이 연루되었으며, 두 개의 자료점이 파괴당하여 자금, 설비가 엄중한 손해를 입었고, 한 사람이 사망하고 한 사람이 상하였으며, 세 사람이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막대한 대가에 직면하여 동수들은 또 심심한 자책속에 빠져 들었다. 여기까지 쓰자 나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나에겐 책임감이란 것이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은 단지 ‘장래에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던 나에게는 가책될만한 것이 없다’는 것 뿐인데 어디에 책임감이 있는가? 깊이 숨겨진 하나의 사심인 것이다! 자비심이란 더구나 말할 바도 못된다! 검은 소굴의 수련생을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부끄럽기 그지 없다.”
“가령 나에게 정말로 자비심의 이끌림으로 하여 조그마한 그런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동수의 집착에 직면하여 참을성이 없었을 수 없을 것이며, 동수의 누락에 직면하여 조급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정체에 장시기 동안의 누락이 있는데 직면하여 시끄러워하지 않았을 수 없으며 남들이 나에게 과시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고, 구석에 숨어서 혼자서 발정념하지 않았을 것이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 가령 나에게 정말로 그런 자비심의 이끌림으로 하여 조그마한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장시기 동안 ‘사람마음’의 포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나에게 정말로 그런 자비심의 이끌림으로 하여 조그마한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사람마음’의 작간이 없이 동수와 소통할 때면 훌륭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며, 오늘의 이같은 막대한 손해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중생을 구도해야 하고 중생에 자비해야 한다. 하지만 동수에 대해 우리는 자비했는가? 어쩌면 많이는 인정으로 하여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쁘며, 누구와 같이 있기 좋아하고 누구와는 같이 있기 싫어하며, 누구와는 익숙하고 누구와는 낯설다는 등등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정을 내려놓지 못하면 자비심이 있을 수 없으며, 수련인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없다. 보건대 남을 일깨워 주는 문제는 사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수련해주는 것이다. 어떤 문제는 수련생을 일깨워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이 문제상에서 법리가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체”의 의미는 여러 사람이 함께 무슨 일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매개 문제에 대한 생각에서 정체적인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정체에 대한 좋은 각도에서 출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도 체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한 교류문장에서도 말하였는데, 만약 한 정체중의 어느 한 동수라도 문제를 분명하게 보아낼 수 있고, 따라서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자비가 있어 여러 사람을 도와 청성하고 이지적으로 문제를 대하고, 제고해 올라온다면, 구세력이 배치한 교란을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마치 파룬이 “안으로 돌면 자신을 제도”하는 것과도 같으며, 동수의 집착을 선의적으로 지적해 주고, 수련생을 도와 함께 제고하는 것은 마치 “밖으로 돌 때 그는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다른 사람이 혜택을 입게” 하는 것과도 같다. (>) 그러므로 동수들이여, 인연이 있어 함께 있을 때면 금상첨화(锦上添花)가 필요 없지만 만약 상대방의 집착심을 조장하였다면 그건 그야말로 나쁜 일을 한 것이다. 우리 모두 와서 엄동에 따스함을 보내주자.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바라고 계시며, 그것은 정법수련의 수요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중의 한 단락 법으로 공동으로 격려받자. “정말로 법을 위해 책임지는 데 입각하여 보면 정말로 하나의 강철을 용해시킬 마음을 품고 있다면 나는 그 일을 잘 하지 못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수련생에 대하여 고정적인 편견으로 그가 안 된다고 여기지 말라. 나 이 사부는 된다고 여기고 있다. 또 소통하기가 어렵다고 여기지 말라. 어느 일방도 작법에서 아직 대자대비(大慈大悲)하지 못하였다. 당신이 정말로 대자대비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긍정하고 틀린 곳을 잘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8/30/20738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