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7월 24일】 『명혜주간』제 390기(한글판 155호) 『정념정행하여 네 차례 옥고의 재난을 선해하다』를 읽고 수련생이 마귀굴에서 대법이 부여한 정기(正氣)로, “제일 큰 소리”로, 수난 중에서도 여전히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한 초상적인 표현과 마난을 선해한 결과에 매우 고무를 받음과 동시에 이 수련생이 구세력을 부인하는 기본 인식에 의문이 생겼다. 이곳에서 제기하여 진일보로 사부님의 위대한 법리를 진정하게 알고 함께 앞으로 우주를 빛내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길을 잘 걷고자 한다.
동수의 문장에서 어느 한번 그가 신고 되어 구치소에서 15일간을 지냈는데 그는 “속으로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더러 이곳에 와서 연분이 있는 사람을 구도하라고 한 것이며 나더러 사람을 구하라고 안배하신 것이다. 평소 이런 기회가 없었는데 나더러 여기에 와서 진상을 알리라는 것으로 여겼다. 박해를 받거나 반박해라는 염두가 없이 사람을 구할 염두뿐이었다.”
그가 네 번 잡히고 풀려나오는 중에서 그는 “어디에 가든 나는 이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안배하시어 나더러 연분 있는 사람을 구하라는 것이다.” 라고 했다. 어느 한번 한 여성이 신고했으나 경찰은 그를 잡지 않았다. 그는 글에서 “나는 마찬가지로 깨달았다. 바로 이렇게 안배되어 신고 당하고 국안대대가 안배하여 사람이 왔으나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마음속 매듭을 풀어주도록 배치하고 최종적으로 이 생명을 구했다!”라고 말했다.
내가 교류하고 싶은 문제는 무량하게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사악의 구치소 등 마귀굴에 가서 연분 있는 사람을 구하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일체를 소진하다시피하신 우리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한 생명더러(그녀와 같은) 이 생명을 훼멸하기 위해 “대법제자를 신고”하는 죄악을 채용해 “이 생명을 구도”하실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에 이 수련생은 비록 사심이 없고 용감하게 했으나 그는 도리어 사부님께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하는 것에 관한 법리를 참답게 학습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구세력은 대법에 대한 그의 인식이 부족한 틈을 이용해 2년 동안 네 차례의 마난을 강압했으나 그는 도리어 한 번 또 한 번 깨닫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구세력이 안배한 길을 걸었으며 감당하지 말아야 할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 마에게 기만당하면서도 사악의 박해를 억지로 사부님께 더했고 “사부님의 안배”라고 인정했다. 사부님의 대법에 대하여 이런 엄숙하지 못하고 착오적인 이해를 만약 아직도 즉시 개정하지 않는다면 사악을 계속 자양하게 될 것이니 후과를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구세력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관한 설법을 하신 지 이미 십년이 되어간다.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언제나 제자를 보호하신다! 나는 천만 대법제자들의 심득교류로부터, 또 자신이 직접 겪은 여러 차례 마난에서 심각하고 진실하게 체험했으며 또 확실하게 위대한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호를 받았다. 동수들(자신을 포함하여)이 사부님 대법의 법리에 따라 정념(正念)정신(正信), 정오(正悟)정수(正修) 하면서 구세력이 설치한 많은 사악한 큰 관을 돌파하고 유암화명을 맞이할 때마다 대법이 만들어낸 신 우주 생명의 순정함을 심각하게 체험했고 대법의 신기하고 수승함과 홍대한 신위(神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수련생이 네 번 잡혔다 풀려나온 문장을 보고 지금도 여전히 사악의 각종 박해를 받는 많은 동수들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괴롭기 그지 없다. 이를 통해 나는 우리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며 반드시 즉시 해결해야할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보게 되었다. 바로 우리는 너무나도 보물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너무나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사하신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우주대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이미 일찍이 명백하게 우리들에게 이번에 사악이 박해하는 유래를 알려주셨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그것을 대하고 그것을 부정하면서 나아가 그것을 배제 할 것인가는 각종 대응 법리를 분명히 가르치셨고 원만으로 통하는 신으로 성취되는 길을 가르쳐주셨다! 일체의 일체는 법 속에 있다. 천기를 모두 누설했으며 어떤 뛰어난 재주던지 당신이 진심으로 가지려고만 한다면 곧 얻을 수 있다!
인류의 지나간 몇 천 년 역사에서도 수많은 수련서를 남겼는데 짐으로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아놓으면 들보까지 가득 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마다 보면 볼수록 어리둥절하며 보면 볼수록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모른다. 이렇다 해도 역시 여전히 이상과 포부를 지닌 사람이 상당히 존재하며 속세의 연분을 버리고 도를 구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은 심지어 낭떠러지에 올라가서 밧줄을 끊고 산굴속에 들어가 수련한다고 하셨다. 수련해내지 못하면 그 안에서 목 말라 죽거나 굶어 죽는다. 그러나 아무리 수련해도 수련한 것은 그래도 자신이 아니라고 알려주셨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다. “사람은 복(福) 중에서 복을 모른다.”는 옛말 그대로이다.
지금의 우리는 사부님께서 진짜 경을 주셨고 아주 명백하게 언명하셨으며 우리에게 조금의 모호함도 없이 주셨다. 또 우리에게 파룬과 치지(氣機)를 주셨으며 매일 사부님의 법신께서 가호하고 계시며 수시로 대법의 길을 가르쳐주신다! 선인들이 수도하는 항심(恒心), 결심(決心), 환경, 조건에 비하면 정말 자그마한 오성도 없다! 무엇 때문에 아직도 떨쳐 일어나 계속 추진하고 법에서 정진하지 못하는가?! 홍진의 허황함에 미련을 두고 현실이익에 착안하여 중생의 기대를 망각하고 사부님의 고심한 구도를 무시하며 도를 향하는 성심이 부족하고 견정하지 못한가! 일종 굶주리고 목마르는 것 같은 절실함과 침식을 폐지할지라도 내심으로부터 반본귀진하려는 갈망으로 사부님의 법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을 닦으려는 것이 부족하다.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면 당연히 사부님의 법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우리의 성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견정하지 못한데다가 경시하고 게으르며 내려놓지 못하는 사사로운 정(情) ……등으로 구세력에게 이용당하고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안정하고 법리를 깨달으려 하지 않으며 감히 부지런히 실속 있게 수련하지 못하고 박해가 십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중생은 여전히 수난 중에 있다! 정신, 정오가 얼마나 관건인지 족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제기한 이 수련생이 만약 처음부터 박해 전이나 혹은 중에 사부님의 법리를 정오할 수 있고 사악이 자신의 틈을 탄 점을 안에서 찾아 알고, 우리에게 누락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사악이 박해할 구실이 있음을 알며, 만약 이때 신속히 법에서 귀정하고 보충하며 사상 중에서 사악의 박해를 전반적으로 부정했다면 아마 이후의 마난을 불러오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문에서 언급한 수련생은 박해를 사부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잘못 깨닫고 그가 가지려고 했기에 네 차례의 마난을 불러왔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2003년 대뉴욕법회 설법에서 한 대법제자가 감옥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진상을 똑바로 알려 사람을 구한 장거를 말씀하셨다. 당시의 배경을 결합하면 이 대법제자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그를 그곳에 안배했다고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는 확실히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철저히 구세력의 사악한 안배를 부인하고 반박해와 진상을 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위대한 법리에 따랐다.
“우리는 근본 상에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 법회 설법」)
당시 그 대법제자의 금강부동한 언행은 바로 사악의 박해 자체에 대한 부정이자 박해를 부정하는 정념 하에서 사악을 진섭시켰으며 사부님의 바른 길을 걸은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언급한 수련생은 2006년에 비로소 법을 얻었으며 그렇게 견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서 교류하는 것은 법리로 목적은 공동제고하고 이후에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길을 더 잘 걸으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문제를 보는 착안점을 단순히 그가 표현한 “아무런 두려움이 없고 심지어 또 자신이 사람을 구한다고 여기는 자신의 감각이 좋은 것”으로부터 대법제자가 응당 법에 대해 책임지고 중생에 대해 책임지는 정확한 기점으로 옮긴다면 그가 네 번 잡히고 풀려 나오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중생이 사령의 공갈에 또 쇄신되어 다시 박해를 받았겠는가? 구도하는 어려움은 또 얼마나 커졌겠는가? 이로 인해 대법은 또 얼마나 많은 치욕을 당했겠는가? 사부님께서 그의 마난을 잘 처리하시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감당하셨겠는가?
더욱 엄중한 것은 만약 박해를 받아 감옥에 온 수련생들의 사상에 모두 “박해를 받지 않고 반박해의 염두도 없이 사람을 구하는 염두만 있고” 모두들 감옥을 사부님의 안배로 여기고 연분이 있는 사람을 구하는 기회라고 본다면 어디에 또 반박해의 이치가 있겠는가? 사악은 완전히 이유가 있어 더욱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날뛰며 박해를 가할 것이다! 이것이 정오인가? 정념정행인가? 나는 그것은 참답게 법공부를 하지 않아 가져온 것으로 본래 피할 수 있었던 손실이며 그 중에서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좋은 것은 그가 이미 닦아낸 대법에 대한 견정함은 네 차례의 선해를 얻게 했으니 이는 실로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이다!
오늘 특별히 사부님의 최신 경문『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 설법』을 학습한 후 나는 우리들이 꼭 법공부을 백배 중시하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할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 재빨리 사람마음을 버리고 후천관념을 닦아 버리면서 세 가지 일을 잘하며 온 힘을 다 기울여 경건하게 사부님의 위대하고 신성한 불법진리를 실천하도록 하자.
문장발표: 2009년 7월 24일
문장분류: 수련 마당
문장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9/7/24/20511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