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6월 23일】
며칠간 나는 “속인상태부합”, “안전주의”와 “정념으로 박해를 부정”사이의 법리의 충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일부 문제는 나의 두뇌 속에서 한데 뒤엉켜져있었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낡은 세력을 부정한다. 그러면 안전조치를 잘 하는 자체가 박해의 요소를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허나 사실은: 안전조치에 주의하지 않으면 조성되는 손실은 거대한 것이다.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가물거려 나는 가부좌를 하였다. 금방 수인이 끝나자 나의 두뇌 속으로 한마디 말이 쳐들어왔다. “낡은 세력의 배치에 대하여 반드시 정념으로 부정하며 어떠한 부가조건이 없다. 즉 절대 박해를 허용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것을 교란하기 때문이다. 안전조치도 반드시 잘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이 면에서 반박해하는 표현형식이며 이지적이고 청성한 표현이다. 이렇게 해야 만이 사람을 더욱 잘 구할 수 있다. 사람은 구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일체를 잘 하려는 최종적인 목적이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최대의 이치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최대의 이치이다! 이 말은 재차 나의 마음을 두드려왔다. 작년 원촨지진 때 이 층의 이치는 정말 그렇게 진실하게 나의 앞에 나타났었다.“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각, 이 법리도 그렇게 진실하게 나의 생명을 주도하였었다. 그 시기에 나는 직접 대면해서 진상을 알렸는데 그야말로 손쉬웠으며 말할라치면 아주 유창하고 자유로웠고 중생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무릇 내가 진상을 알리게 된 사람은 모두 “대법이 좋음”에 동감하였고 모두“삼퇴”를 하였다. 나의 전반 생명은 가장 큰 곳에서부터 가장 미세한 곳에 이르기까지 매 하나의 세포가 모두 중생구도의 사명감과 홍대한 자비로 충만하였다. 나도 진정으로 중생구도의 대각자의 신성함과 위엄을 체험하였다. 그때 나는 종래로 신고 된다거나 붙잡힌다거나 하는 생각이 없었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남녀노소, 간부, 거지… 모두 나의 구도의 대상이었다. 시간은 이렇게 보귀하고 나의 뇌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눈앞의 이 사람을 구할 것인가 하는 생각뿐이었고 언제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또 그 어디에 낡은 세력이 몸 둘 곳이 있겠는가? 언제 낡은 세력의 그 무슨 배치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그가 무슨 배치를 하든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는 사람을 구하려 하며 이것은 내가 유일하게 하여야 할 대사이다.
“펼쳐 놓고 말하면 법은 매우 크다. 극히 높은 곳에 이르러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왜냐하면 법은 마치 피라미드 모양과도 같기 때문이다. 극히 높은 층차에 이르면 세 글자로 개괄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眞(쩐)∙善(싼)∙忍(런)이며, 각개 층차에서 현현(顯現)하면 극히 복잡하다.”(>) “사람을 구함”이 하나의 가장 큰 이치 앞에서 기타의 일체는 모두 아주 작게 변하여 언급할 바가 못되며 일체 법리는 모두 간단해졌다. 우리는 최대한도로 속인상태에 부합하여 수련하여야 하며 바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안전에 주의해야 함은 나쁜 사람의 교란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며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정념으로 낡은 세력의 안배를 부정해야 함도 역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을 구함”을 첫 자리에 놓음은 바로“무사무아, 선타후아”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우주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선한(最眞, 最善) 거동이며 최대한도로 자아를 내려놓은 대인(大忍)의 거동이다. 이러한 정각의 자비 앞에서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는 모두 녹아 버리며 일체 교란은 모두 무형으로 되어버린다.
한 수련생이 과거에 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나는 낡은 세력을 부정하였다. 허나 왜 부정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는가?” 지금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봄이 어떻겠는가: 우리가 낡은 세력을 부정함에 어느 층차에 서서 부정한 것인가? 만일 자신이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교란을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기 위하여, 신체의 건강을 구하기 위하여, 가정의 안정을 위하고 심지어 부부지정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을 가서 부정한다면 그것이 될 수 있겠는가? 부정하는 목적은 사를 위한 것이며 낡은 세력의 배치도 사를 위한 것으로 모두 낡은 우주의 생명인데 서로간에 제약작용이 없어진다. 그러나 낡은 세력의 배치는 오히려 존재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당신이 보라 이 대법제자는 사부님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자사적인가, 이 고험을 배치함은 합리한 것이다.”반대로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위타”의 각도에 설수 있고 진정으로 사람을 구하려 한다면 능히 일체 교란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오직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내심의 소원에서 우러 나온 것이고 어떤 “위사”의 목적을 간판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비로소 즉시 일체 교란을 부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법은 일체를 제약할 수 있으며, 대법의 원칙은 하나의 진정으로 선량한 생명이라면 박해를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님은 사악이 대법제자의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완성하는 것을 교란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때 그 “위사”의 염두는 얼마나 은폐적인가! 내가 “속인상태부합”,“안전주의”,“박해부정”등 명사 속에 감겨 명석하지 못하였을 때 기실은 그 “위사”의 염두가 나의 시선을 장애하고 있었다. 오직 “위타”의 높이에 서서 가늠해야 만이 일체는 비로소 삽시에 명랑해진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그냥 헛되이 보내게 된 시간에 대하여 회한(悔恨)하는 것을 금할길 없었고 아주 많은 생명이 나와 어깨를 스쳐지나게 된데 대하여 유감스러웠다. 정법은 최후에 이르렀고 이제 얼마나 남은 시간이 있어서 우리더러 회한할 수 있게 하겠는가, 이제 얼마나 되는 생명이 우리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층의 법리를 깨달았을 때 사부님은 나한테 이러한 한 가지 일을 배치하여 나로 하여금 증오(证悟)한 법리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연계가 없던 한 옛 동료더러 나한테 전화를 걸어오게 하였다. 내용은 어떻게 아이를 더 잘 가르칠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그녀와 담화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녀가 바로 내가 구도해야 할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되었다. 동시에 나는 핸드폰이 도청되고 있는 것과 위치고정(定位) 등 안전문제를 생각하였다. 이때 일종 강대한 정념이 나를 뒤덮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가장 큰 이치이며 일체 교란이 존재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삽시에 나는 우리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아주 큰 투명한 덮개에 씌워져있음을 느꼈고 나는“씬칭쓰위(心清似玉)”속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체험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삼퇴를 권하였다. 아무런 염려도 없이 그는 즉시 동의하였고 나한테 알려주기를 과거에 그도 수련하였다고 하였다. “7.20”이후 곧 놓아버렸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신변에 있는 동수들을 찾아가기를 권하였으며 다시 수련을 시작할 것을 바랐는데 그녀도 대답하였다.
이런 일을 며칠 전이라면 하는 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우선 고려할 것은 나의 안전문제이고 뿐만 아니라 법속의 일부 구절로 자신의 자사적인 것을 위하여 구실을 찾았을 것이며 또한 이와 유사한 기회는 왕왕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려 다시 찾아오기 힘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속에서 말씀하시기를 “인류사회는 모두 미혹 속에 있고 사람들은 우주진상과 생명의 진실한 정황을 보지 못한다. 이는 이 한 층차 중에서 생명의 상태이지만 정법 중에서의 정황은 대법에 의해 주지(主持)되는 것이며 대법이 중생을 구도하는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기실 이때 대법제자가 신(神)의 일을 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대법제자의 개인 수련은 이미 제1위적인 것이 아니며 정법 중에서 중생을 구도하고 대궁을 새롭게 조합(從組)하는 것이 비로소 목적이기 때문이다. 정법의 일, 중생을 구도하는 일은 꼭 해야 한다. 그러자면 곧 이러한 환경의 장애를 꼭 타파해야 하고 대법을 실증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신변의 환경은 우리의 정념으로 개창(开创)한 것이다. 우리는 곧 “위타”의 생명으로 수련성취되어야 하며 정법의 최후에 있어서 우리는 최대한도로 자아를 내려놓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생명의 제일위에 놓고 정법시기의 대법제자의 위엄을 꺼내어 일체 교란을 파헤치고 사전의 서약을 체현하며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약간의 체험으로서 부족한 곳은 동수들이 자비롭게 지적하여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09년 6월 23일
문장수정: 2009년 6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 법리교류
윈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6/23/2032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