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9년 6월 11일] 한 단락 시간 동안, 나와 갑 동수에게는 줄곧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다. 시작에 나는 매우 번거롭고 답답하였는데 을 수련생이 나에게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곧바로 자신을 닦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수의 일깨움은 나로 하여금 재빨리 청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에게 ‘나는 수련생이 어떻게 하든 이 일이 표면상에서 내가 맞든 아니면 그가 맞든지, 문제가 나의 몸에서 나타났기에 나에게 마땅히 수련해야 할 곳이 있으며 반드시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한다.”라고 말하였다.
진정으로 자신을 수련할 때 그런 옳고 그름을 내려놓기가 정말로 쉽지 않고 늘 내가 맞고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때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수의 부족한 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만약 그가 좀 잘 한다면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더 잘할 수 있을텐데……’라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 반대로 ‘만약 내가 좀 잘 했다면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더욱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진정 안으로 자신의 부족한 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며칠 동안 찾은 후 나는 자신의 문제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당문화사상이 엄중하여 자아를 고집하고 늘 자아를 나타내려는 생각으로 자아를 강조하며 허심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잘 배합하지 않으며 문제를 고려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고할 줄 모르고 늘 동수의 긍정과 칭찬만 받으려 하고 대범하게 오해와 비의를 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줄곧 완전히 법을 스승으로 삼지 않았으며 체면을 중시하였다.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털어놓지 않고 의문이 있으면 즉시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깎일까봐 두려워했기에 문제가 싸이고 또 싸이게 된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찾은 후, 만약 내가 이전에 종래로 부족한 것을 상술하지 않았다면 간격은 근본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때 마치 자신이 한 층의 껍데기를 벗은 것 같았고 갑 동수와의 소위 “간격”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다른 사람에게 어느 방면의 특점과 부족함이 있고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떠한 선입견이 있고 나를 어떻게 대하더라도 다시는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나는 법의 표준을 아주 똑똑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야 나는 비로소 자비(慈悲) 이 층 함의를 진정으로 체험하였는데 자비는 “다른 사람을 잘 대하는” 명의를 빌어 자신을 실증하고 다른 사람을 개변하는 것이 아니며 자비는 무욕무구(無欲無求)이고 무량한 포용(包容)이며 자비는 일종 늘 갖고 있는 경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비는 수련해낸 것이지 표현해내는 것이 아니며,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지 해서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영원히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각 지역 설법 4》〈2003년 워싱턴DC법회 설법〉)
그런 감수는 정말로 말로 표현하기가 아주 어렵다. 나는 단번에 아주 많은 속박에서 벗어난 것만 같았으며 매우 무거운 부담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는 예전처럼 늘 이것을 근심하고 저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늘 동수의 부족한 것을 쫓아 다니며 놓으려 하지 않고 늘 수련생을 ‘지도’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대법이 일체를 가늠하고 있고 매 하나의 생명은 모두 대법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법의 생명에 대한 요구는 “쩐, 싼, 런”이고 수련중의 사람이 해야할 것이다. 나는 바로 법의 표준으로 시시각각 안으로 찾도록 자신을 요구하여 잘 하였다. 다시 말하면 수련생이 그의 부족함을 고치든 고치지 않든 나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능히 예전과 같이 잘 배합하고 조금이라도 업신여기거나 원망하고 질책하고 불평등해하는 사람 마음이 없어야만, 순결한 선념에 의해 동수에게 부족한 점을 제출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상호 교류, 공동제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동수지간에 간격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고 주위 동수들도 교류를 통하여 도와주려 시도하였으나 일단 쌍방이 앉기만 하면 상호지간에 모두 상대방의 부족한 점만 말하고 모두 상대방의 “이해”를 바랬지만 간격을 없애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화를 깊게 하였다. 나 개인의 체험으로 볼 때, 안으로 찾는 것이야 말로 간격을 없애는 유일한 도경이다. 자신을 수련하거나 여러분이 함께 앉아 이야기하거나를 막론하고 “안으로 찾기” 이 방향이 틀려서는 안 되며 상대방을 눈여겨 보던 것을 그만 두고 자신을 보아야하며 무조건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제고할 수 있고 진정으로 간격을 없앨 수 있다.
조그마한 체험이니 부족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9년 6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6/11/20254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