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캐나다 토론토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5월 20일]
사부님 안녕하세요.
동수님 안녕하세요.
나는 2000년 5월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로서 사존님의 대법 속에서 9년간 수련하였다.
2008년 9월 1일 토론토에서 천제서점 분점이 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비록 천제서점에 가보지 못했으나 서점의 이름인 “천제(天梯)”두 글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신들은 내가 사람에게 하늘로 올라가는 한 부의 사다리를 놓아주었다고 모두 말하고 있다. ”(>)고 하셨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이 한 부의 대법은 바로 한 부의 천제인 것이다. 대법제자는 바로 이 한 부의 천제를 타고 올라가는 수련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 자신은 이 한부의 천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머리를 들어 올려다 보아야 한다고 느껴졌다. 이 천제는 내가 디딘 곳에서 곧게 하늘로 통해 있지 않아, 몸이 천제 위에서 올라간다는 느낌이 없었고, 그런 의식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아주 놀랐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몇 년간의 수련 속에서 나는 근본을 틀어쥐지 못하였으며 일종 대법의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고 대법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정진하는 심태라는 게 형성되었다. 비록 매일같이 법공부를 하고 있으나 그렇게 대법의 일을 하는 심태였기에 법공부는 수박 겉핥기로 되었고 심지어 법공부할 때마저 이렇게 저렇게 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법공부에 대한 나의 인식은, 내가 대법의 일을 할 때 문제가 적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한 보증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이 한 부의 법을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로 생각하고 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에 없었고 올라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의식도 없었다. 전생의 일은 내가 모르지만 이 일생동안 나는 법을 얻기 위해 아주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막상 정말로 이 법을 얻었음에도 오히려 아낄 줄 몰랐다. 왜 아끼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능력이 강하고 지혜가 있으며 의지가 견정하고 깨달음이 좋다고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곧 잘 수련할 수 있고 수련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수련 속에서 대법의 일을 하고 있는 마음과 일이 성사된 후에 느끼는 환희심은 나 자신의 능력을 중요한 위치로 놓게 했고 대법과 법공부를 차후의 위치에 놓았던 것이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속인의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학교를 다녔고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외국까지 유학을 했는데 이십여 년 간 힘든 학업생활을 했다. 지금 사부님께서 전하신 이 대법은 나를 수련 원만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또 얼만큼의 노력을 들여 공부하고 있는가? 사실 그런 교육으로 나의 깨달음은 심한 교란을 받아 속인의 것에 미혹되고 자아에 미혹되어 우주의 대법이 진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대법의 신성한 위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사람의 가장 큰 비애이며 나 또한 가장 큰 비애인 것이다.
사상이 전변하게 되자 나는 법공부에 대해 일종 전대미문의 갈망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의 법을 마음에 담고 대뇌 속에 기억해야겠다. 곧 >을 외워야겠다는 일념이 생기면서 법을 외우는 형식으로 법공부를 하였다. 나는 법을 외울 때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내가 한 강의를 외웠다면 한 강의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련과 생활 속의 일들 모두 정상으로 가서 하되 평소 법공부 시간을 이용해 매일 한두 장을 외우면서 많지도 않게 빠르지도 않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한 사람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부님의 법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대법에 동화되어 자신의 수련을 지도하는 게 바로 선념(善念)이고 불성이며 정념정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 대법은 끊임없이 당신에게 펼쳐줄 것이며 사부님께서 끊임없이 당신에게 점화해 주어 당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체득이 있게 되고 새로운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때문에 진정으로 법을 외울 때 속도를 빨리 할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며 속도를 빨리 할 생각도 없어야 한다. 이 층차에서 곧 이런 속도로 한다. 이렇게 순서있게 점진적으로 하였는데 나는 비로소 자신이 매일 사부님께서 주신 나의 천제위에서 올라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페이지씩 법을 외우는 동시에 나는 매일 외었던 부분도 외웠으며 매주 기억한 부분을 제1강의부터 한번 외워 낭송하면서 이렇게 반복하였다. 나는 매일 공공버스를 적어도 2시간씩 타고 다닌다. 그 시간은 몸과 마음이 모두 비어있고 아무 일도 할 게 없는데 나는 법을 외운다. 집에서 법을 외울 때는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묵념으로 외우거나 혹은 소리를 내어 외운다. 그러면 마치 일체 유형적인 것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며 오직 사부님의 법과 나 자신뿐이다. 자신의 심령과 생명의 본원은 늘 사부님의 자비와 법의 신성한 위엄에 진감을 받아 늘상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리게 된다.
여섯 달 후 내가 제9강의를 다 외우게 되었을 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종점이 아니라 바로 시작점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줄곧 한 바퀴씩 법을 외우는 것으로 법공부를 하며 한 주에 9강의를 한번 외운다. >은 9강의이며 60개 소절이 있어서 매 소절을 외우고 나서는 꼭 책을 꺼내 그 한 소절을 공부하는 것으로 법을 외울 때 틀린 곳을 시정한다.
법을 외우는 것은 법학습의 일종 형식이나 법을 외우는 자체는 또 정력을 고도로 집중하는 사유 활동인 것으로 나는 늘 자신도 모르게 잠시 정지하고 사고하며 많은 것을 연상하게 된다. 때문에 법을 외우는 과정 속에서 언제나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게 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을 향해 수련해, 안을 향해 찾게 되는 것으로 곧 그 속에 용해되어 간다. 그렇게 하면서 한시기가 지나자 나는 이전에 내려놓기 아주 힘들었던 각종 집착들, 색욕심, 쟁투심 등등이 아주 작아졌고 담담해 졌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매년 평가점수를 매기는데 자아평가의 비중이 백분의 십이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대법제자로서 곳곳에서 잘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자신에게 질량 껏 높은 등급을 선택했다. 하지만 차지하는 비중이 백분의 칠십되는 경제효익 방면의 점수는 늘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법을 외운 후 나의 심태는 변해 그것을 아주 담담하게 보게 되었다. 사실 이전에는 명분을 탐내는 집착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금년의 평가에서 나는 더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아평가에서 자신의 부족점을 찾았으며 부족한 면에서는 “지금 제고 중”이라는 칸을 선택하였는데 명분을 탐내는 마음이 없어졌다. 이상한 것은 경제 효익의 점수가 오히려 만점으로 나왔다.
법을 외움에 따라 어떤 때는 수련이 단번에 아주 명백해졌으며 곧 사부님의 법을 기억하고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수련인의 마음에 대법을 많이 담았으면 집착심은 적어지며 그 물질신체도 따라서 변화를 일으킨다. 나는 잠을 적게 자면 연공할 때 가장 좋은 상태가 많이 나타나고 사는 게 아주 가벼워진다는 걸 감수했다. 이전에는 매일 아침 발정념을 하고나면 늘 침대에 가서 한잠씩 자고는 했다. 하지만 법을 외움에 따라 며칠동안 침대에 누웠으나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고 아주 조급해졌다. 12시간 출근 시간에 5시간만 잠을 자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던 게 바로 속인의 우매한 견해로 그어놓은 틀 속에서 기어다니는 습관이 된 것임을 나흘째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한사람이 집착심을 버리게 되면 마치 그 병처럼 떠올라 사는 게 가벼워져 그 또한 나한이 왜 늘 싱글벙글하는가 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당신이 끊임없이 법속에서 정념을 보태게 되면 사악은 모두 당신을 십분 두려워하게 된다. 예를 들면 대륙을 향해 진상을 알릴 때 중공사당은 늘 한두 달도 안 되어 내가 사용하는 지역 명을 봉해버렸다. 그것이 봉해버리면 나는 다시 새로운 것을 사용하는 데 언제나 며칠간 지체되어서야 운영되었다. 하지만 법을 외움에 따라 나는 지역명을 한두 달 사용하였을 때 내가 바짝 긴장을 하고 주시하면 그것이 또 나를 봉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너 달을 너머 다섯 달을 사용하였다. 나는 알았다. 사실 끊임없이 법속에서 정념을 보낸 결과였던 것이다.
>의 마지막 한 강의 — 제9강의는 아주 힘들게 외웠다. 빨리 이루려는 사람의 마음과, 법에 대한 함의와 내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 “의념”중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연공인(煉功人)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면 그의 공능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또 말씀하시기를 “연공인(煉功人)을 말한다면 사람의 의념이 사람의 공능을 지휘해 일을 하나, 한 속인으로 말하면 의념이 사람의 사지∙감각기관을 지휘해 일을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 한 단락 법리를 줄곧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공능이 없으며, 공능에 대해 이해하는 게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일종 심리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무엇 때문인지 묻지 않았다. 반복하여 외워도 잘 외워지지 않고서야 나는 사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공인 인데 나는 사지와 감각기관을 이용해 일을 하지 않는가? 어떻게 사부님의 법을 이해할 것인가? 나는 갑자기 사부님께서 후에 정념을 사용할 것에 관한 설법이 생각되었다.
사부님께서 2003년 >에서 말씀하시기를“여러분들이 어떤 때 문제를 고려할 때 모두 한 가지 습관을 양성하였는바, 나는 한 가지 일을 할 것이고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이고 그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사고하는데 어이구, 스스로 아주 전면적이고 아주 원만하다고 여긴다. 일단 하려고 할 때 진정한 실제정황 그것은 변화가 무궁한 것으로 오히려 안 된다. (웃으심) 안 되면 또 다시 사고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정념을 이용하라, 당신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당신은 가서 하고 부딪친 문제를 당신은 자연히 어떻게 가서 해결해야 함을 알 것이다. 정념이 강하면 일체 모두 순조로울 것이며 보증하고 잘 할 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는가? 마치 아주 피동적인 것 같지 않는가? 아니다. 당신이 잘 닦은 그 면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어떻게 하여도 모두 되며 이 일들을 어떻게 하여도 모두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곧 되는 것이다. 어떻게 가서 해야 함을 알고 당신이 가서 할 때, 당신의 지혜는 끊임없이 올 것인데 그 시기에 당신의 잘 닦은 그 면은 당신의 이 면과 함께 용합하고 관통(容貫)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이고 못할 것이 없으며 물론 그 작은 일은 단번에 풀릴 것이고 지혜는 온 것인데 그것은 다르다. 안 되면 그 때에 가서 사부도 당신에게 지혜를 줄 것이다.”고 하셨다.
반복적인 사색을 거쳐 나는 크게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은 비록 아무런 공능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법수련에서 우리의 수련된 부분은 사부님께서 분리해 놓으셨다. 수련된 부분은 완전히 신의 상태이며 못할 게 없는 것이다. 당신이 정념이 있으면 당신의 수련된 그 면은 곧 신통을 펼칠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강한 정념이 있으면 그 일면은 곧 능히 얼마나 큰 신통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수련 속에서 한 일들을 되새겨보니 이전에는 늘 자신의 능력, 지식,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여겼는데 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모두 당신의 정념으로 한 것이며 정념이 강하면 곧 잘할 수 있고 곧 기적이 나타나게 되나 정념이 강하지 못하면 곧 잘할 수 없으며 뜻대로 되지 않게 된다. 만일 당신의 법공부가 깊지 못하면 정념이 없고 집착심이 너무 많게 되고 사람의 마음이 너무 중하여 가서 일을 할 때면 곧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수련된 면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데 신은 사람의 염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 않는 것으로 오직 당신이 정념과 신념(神念)있을 때 그는 비로소 신통을 펼치게 되기 때문이다. 속인의 사지, 감각기관, 능력, 수단, 지식, 기술 등도 필요한데 허나 그 일체는 속인의 사회형식, 상태와 법리에 부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그 마가 누구를 죽이려 하면 모두 하나의 사고를 만들어내는데 문밖에 나서면 차와 부딪치거나 층집에서 떨어지거나 등등이다. 때문에 그것은 대법제자가 일을 성사시키는 근본원인이 아니며 근본원인은 정념으로서 정념은 법공부와 마음을 닦는데서 오게 되는 것이다.
대륙의 동수들은 직접 사악과 마주하는데 만일 정념이 부족하면 일보도 내디디기 어려운 것으로 정념의 중요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비할 때 해외의 동수들은 정법이 추진됨에 따라 하는 일이 전업화되고 매체화되고 사이트화되고 기술화되는데 말하자면 최대한도로 속인의 상태에 부합되어야 한다. 만일 법공부와 수련을 중시하지 않으면 아주 쉽게 속인방식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심지어 우리의 정체로 하여금 정념의 중요성을 홀시하게 할 수 있다. 특히 신운매표와 신당인을 추광 함에 있어서 속인이 이렇게 한다면 백분의 백으로 성공할 수 있으나 당신이 만일 정념이 부족하면 당신이 속인의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련의 요소 때문에 각자가 얻게 되는 것도 같지 않으며 표준요구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정법시기에 사람과 신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허나 사람이 많고 신이 적다. 내가 이해하건대 그 신은 반드시 정념을 사용하여 사람을 구도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토 이곳에는 몇 백만 명의 사람이 있으며 그중에 몇 십만의 화인들이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구도해야 하는데 형식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신운매표를 할 때 우리의 매체가 있고 각종 활동이 있는데 실제로는 반드시 우리의 정념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속인은 가장 약하므로 대법제자의 에너지마당은 염을 움직이지 않아도 능히 사람을 개변시킬 수 있다. 하물며 진념을 움직인다면 더욱 속인을 개변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운티켓을 구매하고 신당인을 예약하는 일은 형식적으로 보면 완전히 속인이 일상적인 물건을 구입하는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 저촉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의 강대한 정념의 작용하에 그의 하의식에 의하여 이 일을 촉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염은 반드시 순정해야 하며 정체의 염은 반드시 순정해야 한다.
나도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신당인 시청가구 수량이 고비를 넘기지 못할까봐 걱정을 했다. 그러나 법공부을 하면서 나는 그런 두려운 마음은 오직 시끄러움만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토론토의 50만 화인들을 구도해야 하는 것과 뤄자스(罗渣士.Rogers Chinese Lantern Festival)(캐나다의 최대유선텔레비젼)가 설정한 수치와 비할 때 차이가 너무 큰 것으로 나는 더 많은 화인을 구도하기 위해 자비로 노력하여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소위의 “경성표준(硬性标准)”(융통성없는 표준)은 단지 가상에 불과하며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려운 마음을 버려야만 자신의 정념이 비로소 순정해질 수 있으며 비로소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신당인을 시청하는 가구가 하나씩 늘어 날 때마다 신당인에서 얼마나 되는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너무나 좋은 일이구나!”생각하면서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법을 외우다가 “개광”이 한 소절에 이르렀을 때 “어떤 화상은 거기에서 경을 읽지만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생각한다. ‘좀 지나 개광이 끝나면 나에게 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나는 흠칫 놀랐다! 나는 자신의 염이 바르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신당인의 수입은 응당한 것으로 나 스스로 알았다면 안 것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더구나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그것은 정념이 아니며 아주 가능하게 결과는 바라는바와 정반대로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99년 7.20이후에 대법제자를 모두 제자리에 밀어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해 내가 이해하건대 바로 우리 수련된 일면은 이미 못할 것이 없으며 우리의 정념과 함께 연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서 줄곧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법공부를 많이 하라, 법공부를 많이 하라, 법공부를 많이 하라고 하셨다. 왜인가? 바로 우리의 정념을 가강해서 정념을 사용해 신통을 펼쳐 세인을 구도하라는 것으로 이는 얼마나 큰 기대인가!
내가 관광명소에서 한 노년동수와 함께 진상자료를 배포하는데 그 이모님은 1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소리없이 한 장씩 신속히 배포하였다. 나는 영어와 중국어로 큰소리를 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으나 배포하는 게 아주 느렸다. 어떤 사람은 굳어진 얼굴로 나의 옆을 지나가면서 자료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모에게 가서는 받아갔다! 무슨 원인일까? 바로 정념이었다. 공능이 나오는 것은 양끝으로서 특히 노년부녀는 그 무슨 집착심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마당과 정념은 아주 순정하고 염을 움직이지 않았어도 능히 사람을 개변할 수 있었으며 염을 움직인다면 더구나 못할 것이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진상을 거절하는 속인을 대할 때 이전에 나는 언제나 마음에 걸렸으며 그러한 홍대한 자비와 정념이 부족하였다. 한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일을 끝내고 관광명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공버스에서 법을 외우는데 “누가 연공(煉功)하면 누가 공(功)을 얻는다”는 소절을 외우게 되었다. “과거에 많은 승려가 한번 앉으면 몇 십 년이라, 역사상 기록에서 가장 긴 것은 90여 년이나 되는데, 더 긴 경우도 있다. 눈까풀 위에 먼지가 아주 두툼하게 쌓이고, 몸에 풀까지 자라났어도 여전히 거기에 앉아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90여년이나 앉았다는 승려는 가능하게 오늘날의 대법제자로서 정법의 오늘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면서 한차례 한차례씩 헛되게 수련하였겠는가. 나는 갑자기 그가 아마 진상을 알지 못하는 그 속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방금 진상을 거절한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련한 사람으로서 그는 길을 잃어버렸고 사악의 독해를 받아 속임수에 빠진 것으로 우리가 그를 구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면 더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오직 이번에 안 되면 다음번에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다른 도경을 통하여 당신을 구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만 갓 법을 외우기 시작한 것으로 체득이 아주 옅으며 반드시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며 사부님의 법을 기억해 그대로 할 것이며 사부님께서 주신 천제 위를 따라 올라갈 것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님들 감사합니다.
(2009년 캐나다 법회발언고)
발표일자: 2009년 5월 20일
갱신일자: 2009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5/20/2012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