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후베이(湖北)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5월 19일]
최근 두 달 동안 나는 현지의 몇 개 법공부팀의 단체법공부에 참가하였는데 일부 감수와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없어 현지의 동수와 교류하고 소통하지 못하였기에 나는 내가 본 것과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명혜망에 투고하게 되었다. 만일 이 한편의 글이 투고되어 발표되고 또 만약 현지의 수련생이 기회가 되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권한은 당연히 나와 당신들의 교류로 하고 싶다. 또한 나는 당신들의 교류 의견을 매우 듣고 싶고 보고 싶다. 법리상에서 아직 명확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동수님들이 자비롭게 지적하여 주시기 바란다.
1. 법공부의 실제 효과를 중시하지 않으며 편면적으로 수량과 속도를 추구하는 경향이 비교적 엄중하였다. 이 문제는 명혜망에서 이미 다른 수련생이 글로 교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현지 단체법공부 팀은 아직 중시를 일으키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년간 현지 단체법공부에서 이미 거의 하나의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매번 법공부 시간은 일반적으로 두 시간이며 적어도 《전법륜》의 한 강의는 공부한다. 발정념을 하고 일부 사무적인 말과 한담을 하는 데에 시간이 점해지기에 법공부할 때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다잡아 빨리 읽게 된다. 어떤 때에는 너무 빨라 사람의 두뇌와 눈이 따라 가지 못하는데 그것은 명실 공히 집중되지 않은 것이다.(나는 과거에 이러하였다) 어떤 수련생은 법공부할 때 빨리 읽는 것이 유창하면 말재주가 좋은 것으로서 재간이며 법공부가 익숙하고 법공부를 잘한 표현이라 여기며 과시심리까지 움직여 빨리 읽기 위하여 쉼 없이 읽는데, 늘 두 세 구절을 이어서 읽는다. 또 어떤 구절은 길어서 숨을 돌려 쉴 틈도 없이 노래 곡조처럼 법을 읽는다. 때문에 법을 읽을 때 글자를 빠뜨리거나 보태며 틀리게 읽는 정황이 늘 발생하게 된다. 어떤 수련생은 틀리게 읽는 것을 시정하여 주나 틀리게 읽는 어떤 수련생은 늘 한참 지나서 반응하며 또 무엇이 틀렸고 어디에서 틀렸는지도 모른다. 마치 빨리 달리다보면 발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된다. 어디가 틀렸는지 알게 될 때를 기다리다 보면 지체되는 시간이 더 오래게 된다. 빨리 하려다 도리어 늦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여 어떤 수련생은 시간이 지체될까 봐 아예 참으면 참았지 시정하여 주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차례 일깨워주셨다. “법공부는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오스트레일리아법회에게》), “문 : 어떤 사람이 사부님께서 하루 반 만에『전법륜』을 읽는다는 것은 너무 느리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사부 :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박수) 내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시간을 다그쳐 책을 보라 책을 보라 하니 그는 단번에 그 극단으로 달려갔다. 보고 보고 보고 보고 목숨 걸고 보니 매개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데 그럼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당신은 법을 배우고 있지 않는가? 법공부 법공부 그 배운다는 것을 당신은 어디에 놓았는가? 당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당신마저 모르는데 어떻게 수련한다는 말인가? 당신은 반드시 당신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이 읽은 것이 무슨 글자이고 표면상에 어떤 뜻인지를 당신은 모두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찌 법공부라 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읽어 뭘 하겠는가? 책을 가져다 이렇게 한번 넘기면 끝나지 않는가? 이런 도리가 아닌가?”(《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 라고 하셨다.
유관되는 협조인과 수련생은 모두 이 문제상에서 깨닫기를 바란다. 법공부할 때 천천히 읽더라도 반드시 눈에 들게 귀에 들게 마음에 들게 하여야 한다. 입, 눈, 귀, 마음이 모두 딴 데로 가지 말아야 한다. 편면적으로 법공부의 수량과 속도를 추구하는 것은 기실 일종 형식이며 일종 사람의 마음으로서 역시 버려야 할 일종 집착이다.
2. 단체법공부는 곧 법공부만 하는 것이라고 기계적으로 여기며 동수지간에 교류하는 시간을 안배하지 않거나 아주 적게 안배한다. 늘 사람이 다 도착하거나 시간이 되면 법공부를 시작하며 한 사람이 한 단락 혹은 두 단락씩 돌아가면서 읽는다. 정각이 되어 발정념하고는 흩어진다. 이러한 단체법공부와 개인이 집에서 법공부하는 것은 거의 구별이 없다. 어떤 때에 소위 교류시간이 되면 협조인이 할 말이 있으면 하고 기타의 수련생은 늘 제각기 교차적으로 한바탕 말하곤 한다. 누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누구도 심성 혹은 법리상에서 자신은 어떠한 제고와 수확이 있었는지 혹은 어떠한 곤혹스러운 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있는지 말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 매 수련생의 수련의 길이 부동하고 자신의 근기와 업력이 부동하며 심성이 처한 위치와 층차가 부동하기에 수련 속에서 봉착하게 되는 고비와 난이도는 긍정하건대 같지 않다. 이것은 우리들이 단체법공부라는 이 환경에서 교류하고 서로 도우며 원용하고 공동으로 제고하여 정체적인 승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사존님께서도 단체법공부할 때 일정한 시간을 빼내어 교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직 과시심이거나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수련생이 단체법공부할 때 일정한 시간을 빼내어 교류를 진행한다면 심성을 수련하고 자신을 제고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것이다. 가히 일종 절반 힘으로 배로 되는 성과를 이루게 되며 칼을 가는 것이 나무를 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게 된다. 어떤 협조인들은 교류가 많게 되면 법공부를 지체하게 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협조인은 응당 수련생이 단체법공부할 때 일부 교류를 진행하는 시간을 안배하여 수련생들이 심성에서 제고하도록 인도하는 데 힘써야 하며 일하는 마음으로 수련을 대신하는 경향을 극복하여야 한다.
3. 명혜망의 우수한 글을 선택하여 교류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거나 중시하지 않는다. 내가 알건대 절대 대부분의 수련생은 특히 노년 수련생은 명혜망에 오를 수 없다. 또 일부 수련생은 《명혜주간》을 받아 보지 못하거나 혹은 즉시적으로 《명혜주간》을 읽지 못한다. 때문에 사부님의 정법홍세의 노정이나 수련생의 수련 속의 상태 및 사악이 박해하는 움직임 등 정보를 즉시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정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지적으로 청성하게 자신을 수련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데 이롭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매 기의 주간은 편폭의 제한으로 한 주일간의 명혜망의 우수한 글을 모두 선택하여 넣을 수 없다. 하여 내가 건의하건대 무릇 조건이 되어 명혜망에 오를 수 있는 수련생은 가장 좋기는 매일 오르기 바란다. 만일 사부님의 신경문 발표, 명혜편집부의 서명이 있는 글이나 통지, 전반 국면에 관한 교류 글, 혹은 명혜 항목의 앞선 위치에 있는 중요한 교류 글이나 현지의 상황과 비교적 접근되는 글이 있다면 응당 즉시적으로 다운로드하고 정리하여 프린트하여서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법공부팀에 추천하여 단체법공부할 때 읽고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 동수들이 즉시적으로 명혜의 소식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료점의 압력도 경감시킬 수 있다. 나는 이 방법으로 몇 개 법공부팀에서 해보았는데 자료나 소식이 소통되지 않는 다수의 수련생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허나 어떤 협조인은 근심하기를, 이렇게 하면 법공부를 하는 데 영향주거나 혹은 교란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나 개인이 생각하건대 단체법공부는 드팀없이 사부님의 법을 공부하여야 하며 시간이 허락될 때 명혜망의 중요한 글도 가히 함께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순되지 않는 것이며 어떤 영향이나 교란을 형성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존님과 동수들이 수고스럽게 만들어낸 명혜망의 종지는 또 어떻게 되는가?
4. 거의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무릇 명혜망에 오를 수 없거나 오르지 않는 수련생은 안전의식이 모두 비교적 차한 것이다. 또한 현지의 근 2년간에 있어서 무릇 사오, 타협하였거나 병업 고비를 넘길 때마다 병원으로 가거나 먼저 가게 된 수련생은 거의 모두 명혜망에 오를 수 없거나 오르지 않았다.(물론 조건이 안 되어 명혜망에 오를 수 없는 많은 동수들도 의연히 수련을 잘하고 있으며 세 가지 일도 잘하고 있다. 본문은 결코 일부로 전체를 평가할 생각이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 큰소리가 아니며 일부러 놀란 만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2년여 간의 관찰을 통하여 선후로 십여 곳의 단체법공부팀과 접촉해 수십 명의 동수들을 알아보고 나서 종합적으로 현지의 수련상태에 대하여 연구하고 얻어낸 하나의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면의 결론이다. 이런 안전의식이 차한 것은 주요하게 안전문제 상에서 마음을 닦지 않으며 신중하지 못하거나 수구에 주의하지 않으며 늘 ‘냉열병(쉽게 열을 올리고 쉽게 냉담해지는 태도)’을 범하여 극단으로 가는 데서 표현된다. 예를 들면, 일단 환경이 느슨해지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등등이다. 단체법공부할 때 핸드폰을 받거나 거는 것, 만나기만 하면 모르는 수련생의 성명을 묻고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하는 것, 주동적으로 소개하고 서로 알고 지내려 하는 것, 습관적으로 높은 소리로 말하여 이웃사이에 난처하게 하는 것, 법공부가 끝나면 한 번에 문을 열고 나가며 가면서 높은 소리로 법공부한 정황을 의논하는 것, 높은 구두를 신거나 딱딱한 구두밑창으로 걸을 때면 마치 드라마에서 나오는 순라대의 발자국소리처럼 “딸깍 딸깍”소리가 나는 것, 또 어떤 단체법공부 장소에서는 수련생들의 편리를 위하여 문을 잠그지 않는데 왕왕 밀거나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심지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아 직접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사복경찰을 경솔히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한창 교류하고 있는 수련생들더러 ‘단병접전(短兵接戰 : 격렬하게 육박전을 치르다)’ 하게 한 것, 또 어떤 법공부팀은 인수가 십여 명 이상 되어 이웃의 주의를 사게 되는 것 등등이다.
위에서 서술한 표현이 있는 수련생은 거의 백분의 백으로 명혜망에 오르지 못하는 수련생들이다. 그들은 사이트에 게재된 대량의 사악의 박해소식과 수련생의 정념정행으로 반박해를 하는 사건들, 일부 안전문제로 교류한 글에 대하여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경솔히 ‘무섭지 않다’는 일종 표현이 있다. 예를 들면, 한 노년 남자수련생이 있었는데 7.20이전에 법을 얻은 노제자이다. 이 수련생은 낮에는 장사를 하기에 시간이 없다. 하여 밤에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는 일이 비교적 많으며 빨리 하고 있다. 그 자신의 소개에 의하면 얼마 전에 밤에 나가서 자료를 거의 다 배포하고 있는데(아직 몇 장 남았음) 몇몇 경찰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첫째 무섭지 않았으며 둘째 달아나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몇몇 경찰에게 말하기를, “나는 모모모인데 이 일을 몇 년간 해 왔소. 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으며 당신들 파출소, 610, 국보의 사람들도 모두 나를 알고 있지요.”라고 했다. 이 경찰들은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한테 손대지 않고 그더러 가게 하였다. 정념정행하고 놀라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이 면에서 이 수련생은 잘하였다. 그러나 과시심에서 볼 때 이 수련생은 마땅히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지적으로 지혜롭게 법을 실증하라고 하셨지 우리더러 막무가내로 자신을 실증하고 자신을 과시하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이 노년 남자동수와 반대로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기실 내심에는 ‘두려움’에 대한 집착심이 아주 컸다. 주요하게는 정정당당히 걸어 나가서 진상을 알리거나 삼퇴를 권하지 못하며 자료를 배포하지 못하는 데서 표현되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짝’이 있어야 하였다. 다른 동수와 짝을 같이 하면서도 입을 열기 싫어하였고 그냥 동무가 되어 걸어가거나 혹은 멀리서 발정념이나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동수의 평소에 표현되는 ‘두려움이 없다’라는 것은 심성을 제고한 후에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체면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일종 가짜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단 형세가 변하거나 어떤 위험의 말이 들리면 평소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어하던 이런 수련생들은 하나하나 긴장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걸어가게 된다. 문을 닫고 나오지 않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거나 혹은 셋방을 얻어 나가며 혹은 비정상적으로 바보처럼 행동하며 자신을 보호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악에게 세뇌되거나 전화되었고 어떤 이는 사악의 속임수에 넘어가 타협하여 사악에게 협조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였다. 하여 자신의 다년간의 수련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훼멸되게 하였다.
나의 생각에 한 수련하지 않는 속인도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깊이 새겨 이후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도리를 알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되도록 같은 곳에서 또 넘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리 다년간 수련한 곧 원만하게 될 대법제자는 왜 아직도 이와 유사한 ‘상처가 나으면 고통을 잊어버리는’ 문제가 나타나는 것일까? 현지에 작년에 사악의 박해를 받아 참담한 손실을 조성한 일이 아직 기억에 새롭다. 우리는 절대 사악이 말로에서 미친 짓을 하는 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수련생의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식의 경박한 상태에 대해 응당 중시를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낡은 세력의 요소는 우리와 마지막까지 힘을 겨루려 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줄곧 당신이 원만의 최후 한 걸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서도 당신은 여전히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험 당하게 될 것이며 줄곧 당신이 오직 고만큼 부족해 한 걸음만 닿으면 끝날 때까지도 가능하게 당신에 대하여 모두 아주 관건적이고 아주 관건적인 고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매 한 걸음은 모두 당신들의 수련과 당신들의 고험에 대하여, 더욱이 최후 단계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더 관건적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낡은 우주의 그러한 난잡한 신[亂神], 그것들이 아직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곧 최후까지 좌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안 되면 그것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하여 당신을 끌어내릴 것이다.”(《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하는 것으로 나의 언행이 한 대법제자의 심성에 부합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나의 언행이 대법과 정체에 유익한가 해가 되는가? 절대 사악에게 공간을 남겨 뚫고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건의하건대 우리 협조인들은 단체법공부라는 이 환경을 이용하여 늘 수련생더러 수구하고 심성을 닦는 것과 안전의식 방면으로 교류하도록 인도하여야 한다. 절대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 언급하신 그 사람처럼 대법책을 들고 거리에서 거닐며 큰소리로 “사부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라고 이렇게 외쳐서는 안 된다. 우리 매 개인의 수련의 길은 모두 자신이 한 보 한 보 신중하게 걸어온 것으로서 경솔히 대하거나 큰 소리로 외치거나 거칠게 하는 것은 절대로 수련인에게 응당 있어야 할 심태가 아닌 것이다. 동시에 조건이 되어 명혜망에 오를 수 있는 수련생은 동문제자라는 이 연분을 아끼어 늘 사이트에 오를 수 없는 동수에게 일부 안전방면의 정보를 제공하여 손잡고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며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보고 생각한 바를 적은 것으로 부당한 곳이 있거나 법에 있지 않는 곳이 있으면 동수님들이 도와 지적하기를 바란다. 감사하다!
발표 : 2009년 05월 19일
분류 : 수련마당
원문 : http://minghui.org/mh/articles/2009/5/19/2011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