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8년 12월 29일]
생각해보니 고생스런 수련의 길에서 이미 거의 11개의 춘추를 지냈다. 노제자라고 할 수 있지만, 매개 인심의 마를 없앰이 다 곤두박질하면서 인심이 잡아당기면서 모순의 격화 중에 겨우 없앤 것이다. 그냥 강요에 의해 수련하는 것처럼 자기가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순”중에서 안으로 향해 찾는 것과 수련제고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관념이고 무엇이 수련인지 깨닫지 못하고 수련중의 “고난”을 정확하게 대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오스트레일리아 수련생에 대한 설법] 비디오 중에서 자상하고 절실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부분을 생각하면, 진땀이 나고 가책을 느끼고 사부님께서 애써 나를 제도하는 고생스러움과 나의 전혀 깨닫지 못함에 눈물을 흘렸다.
속인 중에서 나는 의술 쪽으로 취직하여 유미적이고 낭만적이고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정신생명이 최고로 여기는 이상주의자이다. 나도 모르게 얻은 “사람”의 공명이익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그렇지만 생명의 정신측면의 가치에 대한 추구는 고수하였다. 정말 “어떤 자는 가짜 이치(假理)를 위해 생명을 바칠지언정 개변하지 않는다.” (《정진요지》〈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爲誰而存在)〉)
이런 관념이 뿌리 깊이 박혀 물욕이 범람하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처럼 고상완벽을 추구하고 여전히 동화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로서 이상과 현실의 충돌에서 영혼이 상처를 받는 것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생명이 망연무원할때 다행스럽게 법을 만났다. 겉으로는 내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고 반본귀진(返本归真)의 생명의 최종적인 의의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뼛속에는 “아름다운 인생”을 실현하려고 “사람 사이에 서로 인애하고 해를 입히지 않는”인생의 이상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근본적인 집착을 안고 대법수련에 들어왔다. 마치 경문 [정진요지],중에서 구우주의 신이 말한 것처럼 “神 : 현재 이 한 패의 사람들을 놓고 말하면, 그들 어떤 사람이 法을 공부하러 옴은, 인생목표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변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인식을 품고 있습니다.” 구세력이 내가 입문할 때의 근본집착을 핑계로 삼아 내 “개인수련”시기와 “정법수련”시기에 많은 죽음의 고비를 배포해 줘 그들이 법을 파괴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이런 죽음의 고비에서 간절하게 발버둥치며 뚫고 나가려고 애써왔다. 나의 근본집착과 관련한 인심을 찾고 복잡하게 뒤섞인 표면현상을 봐도 더욱이 그 실질을 알아냈고,따라서, 여유 있게 살펴볼 수 있었고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표면일수록 그것이 더욱 격렬하게 표현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한 수련생과의 “모순”중에서 나는 진일보로 이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구 우주중의 많은 생명들이 정법에 참여하여 오늘의 정법 중에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사부님의 정법을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자기가 보류하려는 것을 보류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법중에서 집착심을 안고 버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바로 구(舊) 우주의 자사한 생명과 그 요소가 아쉽고 슬프게 정법에서 탈락된 근본원인이다.
나의 생활상태는 일에 부딪치면 겸손하고 인내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온후하고 우아하며 남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한국여자로 여겼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명의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나의 편안한 생활이 방해될 때 추한 사물을 피할 수 없이 부닥칠 때면 나는 갑작스레 쉽게 화내게 되고 초조하고 불안하게 된다. 나의 소유, 존엄, 체면이 어떤 극한에 도달하여 피해를 봤을 때 “선비는 죽을지언정 모욕은 당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지배되어 나는 필사적으로 그와 투쟁하여 물고기도 죽고 어망도 터지는 정도라도 아끼지 않았다. 인간의 공정을 위해 몸을 바쳐 의를 얻는 의협심까지도 가지고 있다. 이런 구우주의 변이요소를 가지고 지금 요구가 절대로 엄격하고 절대로 순정한 정법수련 중에서 정법이 한 걸음씩 표면으로 추진해 올 때, 나와 수련생간의 “모순”의 충돌도 특히 날카롭게 됐다.
내가 종사하는 전공으로 속인 중에서 변이한 완벽을 추구하는 하나의 신미표준을 양성했다. 원용하게 세상의 상생상극의 사물을 살펴볼 수 없었고, 선악, 미추, 좋고 나쁨이 나의 이념 속에서 이상적으로 분명하여 추한 것을 거절하는 중에 농후한 사랑, 미움, 정, 원한이 침투되어 있다.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물 중에서 나는 다 그 중에서 한가지 미질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 중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반대로 추한 사물에 대하여 나는 극도로 혐오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초조심계했다. 나의 이런 품성으로 수련 중에 온후하고 개인수련에서 튼튼한 수련생과의 만남이 원만하지만, 아직 자사, 질투 등 인심을 가지고 있는 수련생과 만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배척하는 마음이 생기고 포용하고 선대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인심이 나의 변이한 관념을 건드리고 상해를 줄 때, 먼저 인양하고 다음에 피하고 참을 수 없는 극한에 이르면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완전히 폭발된다.
나처럼 조용하고 한적함을 명줄로 여기고 존엄체면을 근본이익으로 여기는 사람이 2년 동안 지금에도 내가 불가사의한 협조공작을 해왔다. 평생 모순을 피하고 조용하고 편안함을 좋아하고 해를 입힐까봐 두려워 하고 지금에 와서 때때로 모순의 파도에 오르락내리락 하곤 했다. 그간에 명을 추구하는 마음, 체면의 마음, 자존심, 기분, 원망, 억울, 조급, 분노로 마음이 평온하지 못함 등등의 인심이 남김없이 완전히 폭로됐다. 자아의 근본이익과 정법 수요의 각축 중에 협조공작에서 나는 매번 아주 날카로운 생사선택을 대면할 때 견지할까? 포기할까?
소극, 심취, 자기를 보존하여 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고통 중에 매번 포기하고 나서 또 사부님의 자비격려 중에서 다시 시작한다. “나는 당신을 이끌어 성취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이 필요하면 나는 비로소 당신을 거기에 가서 하게 하였던 것이다.”(《각 지역 설법 4》〈2003년 애틀란타법회 설법〉) 반복 몇 번 포기한 것도 다 수련생과의 “모순”충돌이 “나”를 참지 못하게 하여 물러난 것이다. 나는 몇 번의 “모순”지간에 필연적인 연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마음은 그냥 어떤 것을 둘러 싸고 “마련”하는 것 같았다. 구세력은 도대체 나의 어떤 약점을 잡아가지고 한 번 한 또 한 번 마난을 설치하여 나를 협조공작을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며 나를 망치는 동시에 그들이 법을 파괴하고 정체를 파괴하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꾀를 쓴 것이다. 끝내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나의 근본집착이다.
“사람이 만약 생사 이 관을 넘지 못하면 그는 원만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기필코 그 한 번 아프게 해야만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다만 하나의 형식일 뿐으로 나는 중하게 보지 않으며, 나는 당신의 마음을 보고 진정하게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스위스 법회에서의 설법》) 대륙의 매우 험악한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도 통상적인 의의의 생사고험을 대면할 때에도 나는 자연적으로 놓을 수 있고, 태연자약으로 모두를 대면할 수 있었지만 꾀를 써 정법수련을 비롯하여 “완벽한 인생”을 실현하려는, “사람 사이에 호상 인해하고 해를 입히지 않음”을 실현하는 근본집착이야말로 내 생명의 근본이익이다. 이 근본적인 이익을 놓을 수 있는지, 나로 하여금 생사를 놓을 수 있는지의 문제다. 구세력은 필사적으로 나의 이 생사관을 잡고 정말로 나와 중생을 사지에 두려고 했다.
생활 중에서 많은 내가 동경했던 소위 아름다운 사물을 법의 표준으로 따져 보면 모두 다 생명이 떨어지고 윤회 중에서 파생, 변이된 버릇이다. 구우주의 페물들은 사부님의 정법 중에서 반드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이 이를 자기생명의 일부분으로 여겨 필사적으로 수호해 주며 포기하기 싫었다. “모순”충돌의 고통중에 바로 이런 생명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는 중인 것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주의식을 청성하게 즉시로 분명하게 가리고 제거하면 바로 생명 진실의 자기승화, 동화, 신우주를 귀진할 때다.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단지 새 우주의 법을 달성 정오할 뿐이지 구우주의 사를 위한 쓰레기를 보수하는 것이 아니다. 구우주생명이 사를 위한 속성은 바로 그냥 남을 바꾸려고 하고 자기를 개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사실 남의 좋고 나쁨이 자기와 무슨 관계 있나? 남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의 집착을 거쳐 어떻게 자신의 누락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흔히 “안으로 향하여 찾다”를 남의 착오를 지적할 때 습관적으로 사용하곤 한다. 이것은 정말 “안으로 향하여 찾다”의 내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사실 “안으로 향하여 찾다”는 영원히 수련자 자신에 대해 한 가지 수련의 체재이며 제고, 승화하는 보물이다.
서로 다른 수련생은 제각기 틀린 생사관이 있다. 병업반응이 있고, 두려움 마음이 막아주는 것 있고, 돈에 집착하는 것이 있고, 공능에 집착하는 것이 있고, 결속시간을 고판하며 원만을 기다리는 분이 있다. 그 어떤 난와 관이 있어도 사실 다 자아근본이익에 대한 집착이지 절대로 우리가 애초에 인간에 온 본래의 원이 아니었다. 이를 찾아 제거하자! 중생을 가득 실은 법선을 타서 사부님을 따라 근본으로 가자!
층차의 얕은 인식으로 타당하지 못한 곳은 동수님들이 자비하게 지정을 바랍니다.
문장발표 : 2008년12월 29일 문장수정 : 2008년12월29일 02:4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