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에서 걸어 나오다
글 /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2월 8일】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와 사람들과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이 사회와 이 환경과는 또 무슨 관계인가? 오늘까지 걸어온 대법제자인 우리들은 반드시 이 관계를 바로 펼쳐 놓아 자신들이 짊어진 책임과 사명을 명확히 하고 사람 속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아래에 이 문제에 대해 나의 천박한 인식을 말하려 한다. 합당하지 못한 곳에 대해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이 있기를 희망 한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위덕>중에서 말씀 하셨다. “세상의 대 나한을 귀신도 굉장히 두려워 하네”, 《홍음 2》 <두려울 것 뭐냐>에서는 “신이 세상에서 법을 실증하고 있노라” 라고 하셨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마 아주 명확하게 우리들에게 우리들은 곧 신(神)이며 사람 중의 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러나 흔히 매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이 신(神)임을 의식하지 못 하거나 혹은 언제나 자신이 신이라고 의식하지 못하여 매우 많은 문제를 처리할 때, 사람 속에 빠져 버렸다. 그렇다면 신(神)인 이상 신은 또 어떻게 이 세계를 대하는가?
사실 신의 눈에는 사람은 곧 사람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눌 뿐이며, 아울러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근거는 곧바로 그의 심성의 높고 낮음인데, 그것은 고층생명이 단번에 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자신이 구분하는 아름다움과 추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고귀하고 비천한 것, 총명한 것, 아둔한 것, 신의 그 곳에는 이런 개념이 없다.
그렇다면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와 사람의 관계는 또 무엇인가? 답안은 매우 간단한데, 본질상에서는 구도하는 것과 구도 되는 관계이다. 친척, 부모, 부부, 아들딸, 친구, 적을 말하자면, 비록 표면상에서 이것은 사람과 사람지간의 관계이지 대법제자와 사람의 관계가 아닌 것으로 의연히 유지되고 있지만, 우리들의 내심에는 이런 관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모두 사람 중의 정(情)의 반응으로서, 법정인간 후에 대법제자들이 모두 원만하여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 우리는 사람과 그 어떤 관계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사람 속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사실 우리들은 사람 중에 있을 때가 아주 많다. 요컨대, 중생을 구도하고 법을 실증하는 심념(心念)을 제외하고 기타 념을 움직이기만 하면 곧 사람 중에 있는 것이다.
삼계는 정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들이 속세에 몸을 두고 있는데, 주위의 일체, 우리들의 의식주행(衣食住行)과 관계되는 일체 물체, 일체 생존 방식 역시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다. 예를 들면 주택, 교통 도구, 통신 설비, 식품 등등 이러한 물품이며 또 예를 들면, 상업을 경영하고 기업을 꾸리며 출근하고 아르바이트하는 등등 이러한 생활 방식은 근본 의미상에서 모두 대법을 위해 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들과 사람들의 관계는 구도와 구도되는 관계인 이상 우리들과 주위의 환경, 이 사회와는 또 어떤 관계인가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이미 명확하게 ‘선용(善用)’이라고 지적 하셨다.
인류 사회의 존재와 연속은 다만 하나의 큰 극을 공연하고 있는 것으로, 이 극은 하늘을 막으로 땅을 무대로 하며 이 극의 주제는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극을 잘 연기하여 중생을 구도 하는가 하는 것은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의 이지(理智)와 지혜, 자비의 체현이며 또한 그 중에서 대법제자의 거대한 과위와 위덕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
발표 : 2008년 12월 8일
갱신 : 2008년 12월 7일 19:47:20
분류 : 수련마당
원문 : http://minghui.ca/mh/articles/2008/12/8/1912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