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27일】 동수들은 모두 여러 번씩 『전법륜』을 읽었고, 우리는 모두 『전법륜』의 마지막 구절을 알고 있다.
“여러분이 돌아가서 시간을 다그쳐 착실히 수련하기를 희망한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진정한 실수(實修) 환경이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며 수련생으로 하여금 법을 얻어 수련하는 중에서 점진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다.”(『장춘 보도원법회 설법』)
사부님의 설법은 우리에게 작게는 한 항목에서, 크게는 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정한 실수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알려주었다. 최근 몇 년동안, 우리 지역의 수련 환경에 견주어 일부 동수(나를 포함)들은 비교적 좋은 실수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을 해 왔지만 줄곧 큰 변화가 없었고 일부 중요한 진상 항목의 효과에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렇게 노력해 온 과정을 반성하던 중 자신의 일부 집착과 법리상의 인식부족을 드러냈다. 우선 나는 의뢰심이 있었는데, 불학회(佛學會)에 의지해 여러 사람들에게 실수 환경을 열어주길 원했다. 그 외 또 하나는 바로 자신의 속인 관념을 드러낸 것인데 자신은 일반 수련생이므로 ‘협조인 신분’이 없이 협조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인 장애가 있었다. 어쩐지 “명의(名義)가 바르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다. ‘협조’ 자체에 대해 법리적인 인식이 깊지 못했기에 어떤 일은 주동적으로 찾아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으로 하여금 정체적인 수련 환경을 수호하는 문제 상에서 “기다리고 의뢰하는 “ 소극적인 심리상태가 나타나게 했다. 또 한 가지는 당초에 자신이 주로 우리 지역에 보다 훌륭한 실수 환경을 이룩해 보려는 열정에서 출발한 것이지 이성적으로 똑똑한 인식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법공부를 통해 나는 실수환경을 수호하는데 대하여 이성적으로 보다 깊은 한 층의 인식이 생겼다. 법은 우리에게 “매 사람이 모두 책임자”(『2003년 대보름 설법』)가 될 것을 요구한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매 대법제자마다 모두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수련(수련환경을 포함)하는 등의 매 방면에서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수 환경을 창조하고 수호하는 것을 놓고 말한다면 매 대법제자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바 이는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이다. 즉 한 지역의 수련환경은 모든 대법제자들에 의지해 공동으로 창조하고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 사람이 모두 책임자” 이기 때문에 자연히 협조하는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협조는 대법제자 중에 존재하는 비교적 보편적인 난제이다. 그런데 협조를 잘하고 못하고는 협력을 잘하고 못하는가에 영향을 미치며, 또 이로부터 법을 실증하는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들이 하나의 정체가 되어 법을 실증하는 중에 일치해서 협조한다면 법력이 아주 클 것이다”(『2003년 대보름 법회 설법』)
내 생각에, 협조를 어떻게 정확히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하나의 엄숙한 수련 문제로서 자아를 돌파할 수 있는가, 더 큰 범위에서 대법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본다. 협조 문제에 대해 나는 자신의 집착과 예전에 법리상에서 인식이 깊지 못했다는 것을 보아냈다.
사부님의 설법을 학습한 후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이 원만한 후에는 장래 모두 각자 우주 천체의 왕이나 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우주의 주나 왕으로서 대법제자는 장래 모두 ‘眞善忍’을 각자 자기 층차에서의 법리로 방대한 생명 군체를 ‘관리’할 것이다. 법리상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대법제자가 장래 ‘관리’하는데 필요한 일체는 아마 우리가 수련하는 과정 중에서 협조방면의 요소일 것이다. 즉 우리 매 하나의 대법제자마다 정법수련 중에서 모두 ‘책임자’, ‘협조인’ 방면의 수련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명의상 그 이름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법리상에서 인식이 분명해 진 후, 나는 협조인 문제에 대한 태도를 단정히 하게 되었고, 더이상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협조 범위가 크던 작던 상관없이 그 중에는 모두 수련의 요소가 있다. 많이 걱정하고,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동수들 사이의 씬씽 마찰에 직면할 것인데, 어떻게 그 속에서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을 잘 수련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수련 중의 문제이다. 나는 예전에 협조를 두려워했는데 협조하기를 싫어한 것은 모두 사람마음이었다. 자신이 많이 걱정하고 싶지 않았고 자유자재한 데 습관이 되어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게으름과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과 동수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구체적인 협조과정에 수련 제고할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자신에게 한 갈래 편안한 수련의 길을 찾아 주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제고가 첫 자리이며 당신의 제고가 없다면 아무것도 이야기 할 바가 못 되며 역시 중생 구도를 이야기 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제고가 없고 당신의 원만이 없다면 당신이 구원한 중생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 누가 가지겠는가?”
“바로 자신을 수련하지 못하고 안을 향해 찾지 않는데 있다.” (『2008년 뉴욕법회 설법』)
우리가 참가한 법을 실증하는 각종 사업은 속인의 사업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에는 우리들 수련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실수 환경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보건대 수련환경을 수호하는 자체 역시 부족을 발견하고 수련제고 하는 과정이다.
사부님께서는 명확히 제출하셨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세 가지 일을 모두 잘 해야만 제고할 수 있다”(『2008년 뉴욕 국제 법회 설법』)
우리 진정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하여 보다 많은 중생을 구도하자. 부당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1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11/27/19049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