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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을 똑바로 놓자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20일] 대법제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부딪친 일체 교란과 박해는 모두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부딪친 일체 문제는 모두 중생을 구도하는 중의 문제로서, 우리는 모두 중생구도의 기점에 서서 이 문제를 대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로는, 중생구도의 과정에 많은 일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거나, 할 수 없으며, 효과가 나쁘거나 교란을 받으며, 심지어 박해 당하는 이유는 흔히 우리의 일하는 기점에 문제가 있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우리가 배포하는 매 한 부의 진상자료에는 제작하는 동수로부터 나중에 배포하는 동수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경과하는 모든 동수의 정보를 지니고 있고, 우리 매 한 동수의 심태가 모두 그 안에 반영되어 있다.

나중에 자료를 배포하는 수련생을 말해보자. 당신은 자료를 배포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가령 당신이 다만 나는 이것만 배포해 버리면 일이 끝난 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당신의 사상은 여기까지 와서 끝난 것이고, 당신의 목적도 여기까지이며, 당신은 바로 자료를 배포하기 위한 이 일을 끝낸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당신은 이 일을 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수들이 늘 말하는 일하려는 마음[干事心]이다.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 당신의 근본 목적은 무엇인가? 자신의 사상 근원을 깊이 파헤쳐 보면 당신은 흔히 자신을 위해서거나 원만을 위해서거나 자신의 일하는 능력을 실증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기타의 사심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이런 자사(自私)적인 정보는 모두 자료에 담길 수 있는데, 세인들이 자료를 볼 때 사람의 명백한 일면이 보아야 하지만, 사람 표면의 좋지 못한 그런 요소들이 구실을 대어 가로 막으면서 말한다. “그들은 당신을 진심으로 구하려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위해 할 뿐인데, 보지 말고 버려라.” 결국 보지 않는다. 반대로 만약 자료를 배포하는 수련생이 마음속으로 세인들이 본 후 모두 진상을 알고 구도되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이 자비하고 순수한 정보에 따라 그 나쁜 사상요소는 가로막을 구실이 없게 되고, 세인은 자료를 가져간 후 보게 된다. 보는 과정에서 좋지 못한 인식과 관념이 모두 해체되고, 사람의 표면도 명백해지므로 이 생명은 각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료를 만드는 동수들은 자료를 만들어 내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전달을 책임진 수련생은 전해주면 된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료를 배포하는 동수들은 배포만 하면 끝난다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여러 동수들의 염두의 최종목적을, 세인들 그곳으로, 세인구도로 둔다면, 우리 모두 이 자비한 정보를 추가한다면 누가 아직도 가로막을 구실이 있겠는가? 세인들은 자료를 보면 가져다 볼 것이고, 보고 나면 곧 명백해질 것이며, 구도될 것이다.

또 비유해 말한다면, 내가 지금 바로 이 문장을 쓰고 있는데, 만약 내가 훌륭한 문장 한 편을 써내는 목적이 명혜망에 발표되기 위해서이며, 혹은 더 앞으로 생각한다면 문장이 발표되어 동수들이 보고 문장을 잘 썼다고 하며, 법리에 대한 깨달음이 높다고 여기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한 일체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며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명혜망이라는 이 법을 실증하는 매체를 원용하기 위해 법실증에 참여하거나, 또 더 앞으로 생각하여 동수들이 나의 문장을 본 후 그 중에서 일부 계발을 받아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더욱 잘하게 하기 위한 기점이라면, 내가 한 일체는 모두 법을 위한 것이며, 중생을 위한 것으로서 이 기점이야말로 순수한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법을 실증하는 일을 아주 많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박해를 받게 되어 기타 동수들은, 보기에 이렇듯 정진하는 수련생이 왜 여전히 박해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일을 많이 할수록 더 쉽게 박해받는다고 여기게 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동수들은 확실히 법실증하는 “일”을 적지 않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참으로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그들이 한 것이 참으로 “법을 실증한 일”인가? 표면적인 목적은 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이지만, 그의 배후에는 법실증하는 “일”을 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실증하려는 사심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있다면, 그의 근본 목적은 자신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실증 배후에 “자신의 원만을 위해 한다”는 사심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있다면 이를 “법실증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표면으로 보건대는 법실증하는 일을 한 것 같지만 근본상에서는 자신을 위해 한 것이다. 사부님과 호법신들이 바로 신변에 계신데, 만약 우리가 참으로 법실증을 최종 목적으로 했다면, 어떠한 사(私)를 위한 목적도 배후에 숨길 필요 없이 하나의 순수한 심태로 “법실증하는 일”을 할 것인데 그럼 누가 감히 우리를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수련생은 “법실증 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박해받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모두 “자신을 실증”했거나 “원만을 위해” 했거나 무슨 다른 사심을 위해 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생생세세에 형성된 사심은 뿌리가 깊고, 층층에 모두 있는데 이 방면에서 나에게는 깊은 체험이 있다. 오직 정념을 느슨히 하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사심에게 이용당하게 되며, 내가 한 일체 법실증하는 일을, 최종적으로는 모두 그 목적을 위해 했던 것이었다. 이런 사심은 상당히 은폐적이고 교활하다. 나는 일하다 좌절을 당할 때라야 비로소 안을 향해 찾을 생각을 하게 되고, 이때에라야 나는 비로소 자신이 이미 사심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1년 넘게 걸려서야 발견한다. 여기에서 동수들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마음을 수련하는 관건이란 사실이다. 사람 마음을 버리려면 자신이 바르게 걸어야 하고, 사악이 와서 박해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모두 그에 의거해야 한다. 앞에서 제기한 박해받는 동수의 사상중에 명백히 자신을 실증한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악이 이 구실을 틀어쥐고 박해를 촉성시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자신의 일사일념을 파악하고, 시종 정념으로 자신을 주재해야만 기점을 바로 놓을 수 있으며 행위상에서도 바르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박해가 발생한 후라면 어떻게 “박해”를 볼 것인가? 만약 개인적 각도에서 본다면 그건 바로 자신에 대한 인신 상해이고, 만약 당신이 자신을 중생을 구도하는 한 신(神)으로 간주하여 본다면 그것은 바로 중생구도에 대한 교란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중생구도의 사명을 짊어진 대법제자이다. 그렇다면 이번 박해는 사실상 바로 중생구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중생구도의 기점에 서서 “박해” 문제를 보아야 하며, 일체는 모두 중생구도라는 이 주선(主线)을 에워싸고 전개해야만 비로소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오직 중생구도일 때 사악은 힘쓸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박해의 구실은 없어질 것인데, 이는 바로 이미 구세력의 배치를 초월한 것으로서, 이른바 “박해”는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법제자는 어떠한 문제를 처리하든지 모두 이지적이고 청성해야 하며, 일을 처리하는 기점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처신하는 기점은 두 가지 뿐인데, 하나는 대법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이다. 기점을 바로 놓으면 바로 신으로서, 못해낼 일이 없다. 기점을 바로 놓지 못하면 바로 사람으로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것이다. 개괄하여 한 마디로 말하면, 자아를 내려놓고 중생을 구도하자는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므로 부당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1월 2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11/20/19012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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