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12일】 아직 명혜망을 접속해 보지 못한 몇몇 동수들과 컴퓨터를 사서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에 관한 일을 교류했는데, 어떤 동수들은 명혜망 접속에 대한 염려가 아주 많은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정법이 곧 끝나는데 컴퓨터를 사는 것은 낭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한다. 동수여, 가령 정법이 내일 곧 종결된다 해도 당신이 오늘 단 하루사이에 사람의 속박을 돌파하고 수련 제고에 유익한 일을 했다면 역시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에서 만족스런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럼 수련인에 대해 말할진대 이 한걸음은 당신이 ‘낭비’한 고만한 돈으로 사올 수 있는 것인가? 돈이란 무엇을 하는데 쓰는 것인가? 그것은 오늘날 대법제자들이 속인사회에 부합되게 수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수련을 위해 온 것이지 돈을 절약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컴퓨터를 사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을 표면상으로 보면 속인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건 바로 수련인에 대한 씬씽 고험이 아니겠는가? 신사신법에 대한 검증이 아니겠는가?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표면적으로 더 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이를 열심히 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수련이다. 압력이 없다면 어찌 위대함을 볼 수 있겠는가? 물질적인 실과 득의 관계는, 당신더러 먼저 얻게 한 다음 다시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래 아주 적은 상황에서도 버릴 수 있고 잃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수련인의 체현이다.
어쩌면 당신은 돈을 모은 다음 나중에 사려 할지도 모르지만 가령 당신이 돈을 채 모으기도 전에 정법이 끝난다면 생각해 보라, 또 기회가 있겠는가? 우리가 걸어가는 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해 주신 수련의 길일진대 그럼 우리 수련인의 일체는 모두 그 속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대법이 없으면 우리의 오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구도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우리에게 아직도 무슨 구실이 있어 자신을 위해 남겨 둘 것이 있는가? 매 하나의 사람마음은 모두 수련의 길에서 장애이다.
또 한 수련생은, 협조인 수련생이 그에게 가정 자료점을 건립할 것을 건의하자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는가? 좀 안정적으로 하라.”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정적인 것인가? 대법제자는 모두 오직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수련의 길을 가는 것만이 제일 안전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수련생은 자신을 위해 프린터 설비를 사고서도 대법을 위해 지불했다고 여긴다. 우리의 목숨은 모두 대법이 준 것인데 우리가 누구를 위해 지불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동수여, 부디 육안으로 본 가상에 미혹되지 말라.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다. 우리가 수련의 길에서 정말로 우리가 잠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바로 우리가 책을 보며 법공부 할 때, 그 책의 불도신들이 보고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부디 사람마음이 자신을 장애하게 하여 수련제고에 영향 주지 말아야 한다.
또 연세가 비교적 많은 동수들은 대법이 당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었고, 자신의 일체는 모두 대법이 주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오히려 대법의 자원을 모두 가정의 속인한데 쓰고 있으면서도 세 가지 일을 할 시각에 쓸 자원은 도리어 ‘짜내지’ 못한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 대법의 보호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는 대법에 빚을 진 것과 같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가족들을 구하지 못했을 뿐더러 또 가족들이 대법에 빚지게 하고 있다. 당신은 아마 말할 것이다.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 그들이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내가 자비하지 못하다고 한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정에서 수련환경을 개창할 때 수련해야 할 한 방면이다. 왜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법리를 얘기해 주지 못하는가? 또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당신은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비로소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당신의 돈은 바로 대법의 자원이다. 당신 생활 중에 필요한 곳에 쓰는 외에 나머지 부분은 마땅히 중생구도에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동수여, 이 문제를 결코 작게 보지 말라.
다시 말해, 사람마음은 자비가 아니다. 대법제자의 자비는 중생구도를 위한 자비로서 속인 중의 가상에 이용될 수 없으며, 사악이 틈을 타게 해서는 안 된다. 한 수련생이 자기 컴퓨터는 아이가 가지고 놀아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아이더러 당신의 컴퓨터를 건드리게 했는가? 그건 당신의 법기인데.” 그가 말했다. “아이가 한사코 놀려 하기에 나는 ‘자비심’에서 아이더러 놀게 했다.” 이 말에 대해 나는 동수에게 곧장 말했다. “속인 중의 일에 이끌린 마음은 자비라 부르지 않으며, 이는 정념이 없는 것이다. 대법제자의 진정한 자비는 바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며, 악당에게 기만된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중생더러 파룬따파가 사람을 구하는 정법이란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무슨 마음이 있든 두려울 것이 없다. 오직 우리가 여전히 수련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두려운 것은 이런 마음이 나왔음에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사람마음인줄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고수하고 내려놓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진정으로 해내는 것만이 비로소 수련이다!
또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수도인의 제자가 사부를 따라 조롱박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만약 그 수도인의 제자에게 작은 사람마음이라도 있었다면 그가 조롱박 안에서 대천(大千)세계를 볼 수 있었겠는가?
물론 수련이란 개인의 일이므로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이런 것을 써 내는 것은 주로 안을 향해 자신을 찾아보는 동시에 우리 지역의 정체가 새롭게 한 단계 도약하게 하려는 데 있다.
부당한 말이 있다면 동수들이 양해해주고 아울러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1월 1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11/12/1896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