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학회에 협력하자

글/일본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16일】 작년 연말 사부님의 경문 『프랑스 법회에게』가 발표되었을 때, 우리 지역의 학회와 수련생들은 마침 아주 큰 모순에 처해 있었다. 나 자신도 모순의 일방이었다. 사부님의 경문을 보고 비록 학회의 통일적 안배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상대방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내가 옳은데 상대방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여겨 이 마음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이 모순은 협조하고 구체적인 일을 하는 많은 동수들과 관련되는데, 수련 중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동수에 대한 관념과 사람마음에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동수 역시 각종 관념을 품고 마음이 움직여 자신도 모르게 모순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정체 협조상의 누락은 2008년 만회 매표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

그 후 나는 줄곧 안을 향해 자신이 어디에서 틀렸는지 찾아 보았지만 모순 속에서 심한 오해를 받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역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2008년 뉴욕법회 때 나는 행운으로 사부님을 친견했고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나는 마음속이 즉시 밝아졌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법리임에도 나는 도리어 사람 이 방면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 하는 것에 빠져 여전히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법회에서도 동수들이 유사한 문제를 사부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종래로 이런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판단하지 않으셨으며 늘 법리를 말씀하시면서 수련인은 마땅히 어떠한 심태로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후에 또 사부님의『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dvd를 연속해서 보았고 모순이란 사실 모두 수련인이 자신을 견지하고 사람 마음으로 수련생을 대하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매 동수마다 법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일을 할 때 판단 역시 부동하기에 모두들 다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깨달은 것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자신이 깨달은 법리로 다른 사람을 요구하고 여기에 관념과 사람 마음이 가중되어 사악이 모순을 확대할 기회를 주었다. 곧 보면 볼수록 상대방의 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 논쟁하기 사작했다.

만약 논쟁하는 쌍방이 모두 상대방의 각도에서 고려해보고 한발 뒤로 양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수련인의 이상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수련 중에서 우리는 종종 사람마음을 지녀 가장 좋은 상태를 해내지 못한다. 쌍방이 견지하면 정체에 영향을 주게 되므로 이때는 필연적으로 일방이 한발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학회는 협조하는 일방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두 동수들이 양보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 양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회에 대해 원망하게 되고 학회 역시 동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다보니 동수들과 학회 사이에 견해가 형성되었다. 사실 이는 모두 내려놓지 못한 자신의 사람마음이 조성한 것이다.

많은 시기 우리는 동수들과의 모순 중에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법을 위해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렸기 때문에 반드시 상대방이 이 마음을 개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내려놓았다면 결과는 자신에게 사람의 관념과 집착이 있을 때처럼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체적으로 보고 계신다. 오직 매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고 마음을 착실하게 3가지 일을 하는데 놓으며,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거나 당신이 좋고 그가 틀렸다고 하는데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럼 이 지역의 정체는 잘못 걸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까지 수련하면서 법리에 대한 동수들의 인식이 똑같을 수는 없다. 만약 모두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자신을 견지한다면 그럼 정체는 사분오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논쟁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며 큰일에서 학회의 협조와 배치에 따라야 한다.

모순 속에서 나는 또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동수의 오해나 심지어 배척에 대해 그리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또 수련생을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수련은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구체적인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과 다퉈 당신이 옳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당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얼마나 많을 공을 세웠는가를 보는 것도 아니다. 수련이란 바로 당신이 그 마음을 얼마나 내려놓았는지 보는 것이다.

이틀 전에 다시 한 번 사부님의『정진요지』「경계」를 보고 갑자기 이 한수의 시에도 사람이 수련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악한 자(惡者)는 질투심 탓으로 사(私)적인 것을 위하고, 화풀이를 위하며, 스스로 공평치 않다고 하노라. 착한 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거니,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 깨달은 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노라.”

속인의 거꾸로 된 이치 속에서 걸어나와 바른 법리로 수련중의 일체를 보고 고생을 낙으로 삼으며 최후에 집착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수련해야 한다.

내가 이 심성관을 넘을 때 매 한걸음마다 사부님께서는 법리로 나를 이끌어 주셨다. 내가 다시 사부님의 초기 설법을 볼 때도 동일한 법리를 발견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아주 일찍부터 끊임없이 여러 차례 반복하셨다.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dvd에서도,사부님께서는 역시 그 법이셨고 앞으로도 또 이 법을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둔한 제자에게 한 번 또 한 번 반복해서 충고하신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에 대해 깊고 깊은 감사를 느낀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오직 노력하여 정진해야만 비로소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체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문장발표:2008년10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0/16/187812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