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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관을 넘은 체험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14일】 수련을 시작한 이래 나는 동수 사이에 관을 넘을 때 넘지 못한 적이 아주 적었다. 수련생은 이 때문에 늘 나더러 씬씽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와 어머니(수련인)과의 관은 오히려 넘긴 적이 아주 드물다. 바로 호주 수련생들에게 모순이 발생한 것처럼 나와 어머니 사이도 장기간 이러했다. 주요하게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집착이 이미 일종의 관념으로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형수 사이의 관은 몇 년이 지나도록 넘기지 못하였다. 비록 어미니 역시 자신을 많이 억제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진정으로 원망도 미움도 없는 수련인의 표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속인과 한담을 할 때면 집에서나 남들에게 우선 아들에 대해 말하고는 며느리가 어떠어떠하게 나쁘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듣기만 하면 화가 불끈 치솟았다. ‘이것이 법을 실증하는 것인가? 하는 말이라고는 모두 내려놓지 못한 자신의 집착이다. 속인에게 진상을 알리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따위 더러운 말만 하다니, 장차 어떻게 사람들에게 진상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구세력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내가 모친의 집착에 집착할수록 그녀는 내 앞에서 더욱 표현했다. 당신의 말을 들어 줄 속인이 없으면 나를 찾아와 말했다. 날마다 자질구레한 가정 일에 파묻혀 바삐 지내면서, 아무 쓸모도 없는 낡아빠진 물건들을 만지며 버리기가 아까워 쓸데없이 시간 낭비만 하면서도 자신은 법에 있다고 여긴다. 꿈에 사부님께서 여러 번 점화해 주셨어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다. 어쩌다 시간이 있으면 법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를 보면서 형세의 변화에 집착한다. 또 무슨 회의를 연다거나, 형세가 긴박해 지진 않을까? 하는데 법공부를 하기만 하면 졸고, 책을 내려놓으면 정신이 든다. 아울러 공산사령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다. 내가 진상을 말하기만 하면 그녀는 곧 방해했다. 내가 주의식이 모호하니 주의식이 강해야 한다는 사부님의 그 단락 법을 외우라고 말하면 자신은 주의식이 강하다면서 외우지 않는다. 내가 모친에게 공산사령에 대해 아직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문화를 타파하는 시디를 보라고 하면 그녀는 시간이 없다면서 그런 걸 볼 시간이 있으면 법공부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동수간에 씬씽관을 넘을 때 종래로 이렇게 나쁠 때가 없었다. 나는 내가 잘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모친의 속인적인 표현을 보고 듣기만 하면 여전히 화가 치미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해도, 그 속인적인 말을 듣기만 하면 화가 치밀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원래는 바로 법공부 하고 있어 마음이 아주 조용한데 어머니가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집착을 말하기만 하면 나는 내가 끝장이란 것을 알며 이날 하루는 법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때는 아무 말도 하지는 않지만 이미 화가 나서 앉아있지 못할 정도였고, 머릿속으로 어머니를 비난한 지 몇 시간이나 된다. 참을 수 없을 때면 사납게 그녀를 수련인 답지 않다고 질책한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아주 정당하고 엄숙한 것 같았지만 실은 마성의 대 발작이었다. 장기간 이랬다. 그리하여 속인 식구들도 “네가 수련하기 전에는 사람이 참 좋았는데 왜 점점 거칠어지는 거니? 엄마를 보렴. 수련을 얼마나 잘했어. 전에는 그렇게 나쁘던 성격이 지금은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아무 대꾸도 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때 내가 어머니와 한마디 말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며 다툴 때면 속인들이 말한다. “당신들이 그러고도 수련인이라고 자칭하는가. 당신들 두 사람이 수련하는 것은 속인인 나보다도 못해.”

나는 내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속인을 장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모친의 말을 듣기만 하면 여전히 화가 치미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고, 심한 교란을 받았다. 또 어머니와의 간격도 갈수록 커지기만 하여 내가 무슨 말만 해도 가버리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모순이 갈수록 첨예해져 관을 넘을 수 없을 때면 정말로 아주 고통스러웠다. 사존의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보기 전까지 줄곧 그랬다. 사부님의 설법을 십여 번, 이십여 번 보았을 때 나는 그런 물질이 사존에 의해 청리되고 환골탈태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때 되돌아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찾았더니 참으로 자신의 많은 부족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자신은 모친에 대해 가족이란 관념으로 대했고 남에게 강요했을 뿐 모친을 진정한 동수로 대하지 않았으며 엄중하게 자아에 집착했다.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만 바삐 움직이면서 모친과 정체를 이루어 함께 법공부 하지 못했으며, 많은 집안 일을 떠맡겨 어머니가 바쁘게 만들었다. 문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곧 구세력의 표현처럼 그녀를 타격하기에 급급했는데 이는 내가 사악과 같은 편에 서서 그녀를 박해한 것이 아닌가?

그녀가 정말로 관을 넘기지 못할 때 나는 먼저 법리상에서 이 문제를 분명히 인식했고 우선 이지적인 심리상태를 만든 후 상화하고 솔직하게 의견을 제출했다. 그녀의 과거 표현에 집착하지 않았고 잘못을 고쳤는가 하는 것도 집착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아무 말도 없었고 심지어 웃으면서 자신은 이미 그 일을 다 잊었다고 변명했다. 지나간 후 어머니는 나에게 “네가 한 말이 맞더구나. 나는 안으로 찾아보았다.”라고 했다. 자신이 바로 잡힌 후 다시 그녀와 말해보니 그녀의 변화가 아주 커서 나마저도 의외의 일이었다. 동시에 대법의 신기함을 견증하였다.

노교소에 있을 때, 한 수련생은 각 방면의 관을 파악함이 모두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한 동수와의 관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 두 사람은 같은 고향사람으로 원래 감정이 아주 좋았다. 나는 그때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사실 동수간의 관을 잘 넘기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정”을 잘 넘기지 못한 데 있다. 사랑, 미움은 모두 정 속에 있다. 이 정이란 것은 모두 “동수”라는 이 신성한 신분에 감추어져 있고, 특히 평소에 늘 접촉하게 되는 수련생을 속인의 관념으로 대하고 자신은 외인이 아니라고 느끼면서 쉽사리 정서에 이끌려 말하고 일하게 된다. 왜냐하면 “안도 바깥도 없이” 남에게 강요하기 때문에 법에 부합되지 않아도 스스로는 알지 못하며, 머릿속 관념은 정의 지배하에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동수와의 관을 잘 넘길 수 있는 것은 동수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모두 수련인이다. 수련인은 반드시 수련인의 규범에 따라 일해야 한다.’라는 긴장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수와 함께 있으면 나는 정이란 관념을 적게 섞어 넣는다. 그러므로 수련인의 신분에 따라 제때에 자신에게 위치를 지정해 줌으로써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제때에 자신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친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족이란 관념에 따르게 되었다. 첫 번째 생각은, 당신은 대법제자이므로 반드시 어떠어떠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잠재의식 가운데 당신은 내 어머니(혹은 당신은 나의 동수, 혹은 당신은 대법제자)이고, 나는 당신을 위한 것이니 당신은 표준에 도달하도록 수련을 잘해야 한다! 마치 속인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심태와도 같은 것으로 자신의 요구, 자신의 관념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곧 미워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면 두 사람은 이미 닭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표면적인 원인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누가 누구를 좋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지만 실은 정이라는 이 마(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정을 누구도 놓지 못한다면 마난 중 모두 상처 입은 감을 느끼게 된다. 법리가 좀 분명하고 좀 이지적이라면 동수의 집착을 집착하는 이 마음, 이 정을 내려놓을 것이고, 그를 대신하는 것은 자비일 것이다. 정과 정 사이엔 제약 작용이 없으며 반대로 모두 버려야 할 것들이다. 자비로운 심태로 수련생을 대하면 다를 뿐만 아니라 이때의 마음은 상대방의 집착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고쳤는지, 결과를 접수하는지 안하는지 하는 결과를 구하지 않게 되었고 심태도 순정해져 그녀가 도리어 개변된 것이다.

이 문장을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더 계속해서 써내려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이 관을 아직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 있거나 자신의 집착을 아직도 뿌리 뽑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은은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달 사이에 또 모친과 몇 차례의 관을 넘은 적이 있다. 어떤 때는 마지막까지 고수하고 있다가도 이제 곧 넘길 수 있을 그 최후에 역시 사나운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만다. 나는 어떤 때 아주 궁금하다. 난 무엇 때문에 모친의 집착을 보면 그토록 화를 내는가? 이 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 질투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단지 정(情)만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친은 어떤 땐 고의적인 듯하다. 물론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표현하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때로 어머니는 내 앞에서 아주 즐거운 모양으로 내가 집착이라고 여기는 일을 하는데 마치 두 부대가 싸움을 하는 것 같고 그녀는 이미 진을 펼쳤다. 만약 내가 이것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본 척 만 척 했을 것이다.

바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예를 배우는 사람이 쟁투심을 버리지 않으면 마가 그를 찾아와서 무예를 비기며 싸우려 할 것이다. 사실 어떤 마음이든 모두 이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루는 내가 포룬을 하는데 모친은 나의 마음을 겨냥하여 남이 들을 수 있으니 연공음악을 낮추라고 했다. 원래 아주 조용하던 머리가 단번에 불평으로 넘어갔다. ‘누가 들으면 그건 그에게 좋은 점이 있다. 당신이 그렇게 두려운 마음이 중하고서야 수련을 해선 뭘 하는가?’ 내 마음이 뒤집어졌다. 반나절 생각한 끝에야 나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교란이 아닌가? 이런 염두를 배척해 버렸으나 여전히 조용해 지지 않자 참으로 실망이 컸다. 후에 나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무엇이 또 있는가, 어디 모두 와봐라! 그저 화를 참지 못한 것뿐이 아니냐? 내 오늘은 기어코 참아 볼 테다. 수련이란 고생하는 것이 아니냐? 난 꼭 명명백백하게 업을 갚을 테다. 나는 꼭 어머니에게 대 자비심을 수련해 낼 테다. 나도 단숨에 사부님의 『고기심지(苦其心志)』중의 “고생을 낙으로 삼다”란 나의 이 한 층에서의 함의를 알게 되었다. 마음을 모질게 먹은 후에 조용해질 수 있었다.

내가 모친과의 관을 넘은지도 반년이 다가 온다. 그날에야 나도 왜 모친의 집착을 보면 내가 그렇듯 화를 내고 마성이 그렇게도 컸는지 비로소 명백해졌다. 가령 내가 참으로 모친의 집착을 보아냈어도 나에게는 없다면, 다시 말해서 고층 각자가 한 층 낮은 신을 보면 자비만 있을 것인데 어찌 마성이 있겠는가? 오직 동등한 층차의 같은 물질만이 비로소 서로 상극일 것이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모친에게 있는 집착이 나에게 모두 있기 때문이며, 모친이 바로 나의 거울이다. 나는 모친의 중한 두려운 마음을 보고 나에게도 사부님 설법녹화를 볼 때 남이 들을까 봐 소리를 낮게 놓은 일이 있지 않는가? 나는 모친과 형수가 관을 넘지 못한 것을 보았지만 사실 나도 형수가 식구들을 잘 대해 주지 않는다고 의견이 많지 않았던가? 나는 모친이 집안 일에 집착해 구세력에게 코를 꿰여 끌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나 역시 바빠서 날마다 법공부 할 시간조차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자세히 안으로 찾아본다면 모친의 몸에 있는 것이면 나에게도 모두 있었다. 이 도리를 알게 된 후 응당 동수(모친)에게 감사 드려야 할 것이었는데 어쩌면 성이 나서 야단이었단 말인가?!

이 몇 차례의 관을 넘기는 과정에 나는 개인 층차에서 깨닫게 되었다. 관을 넘을 때,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표준에 도달 했다고 할 수 있는가? 관을 넘는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속인이든 간에, 상대방 표현이 어떻게 대법제자답지 못하든 간에 만약 결국국 안으로 찾는 것에 도달 못하고 승화된 후 안으로부터 바깥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에 감사드리지 못한다면, 이 관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도리이다.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은 사부님의 한마디 말씀이지만 그것은 수련경지의 표준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또 한 달이 지난 때였다. 이때에는 이미 원망이 전혀 없어졌고, 내 생명을 구성한 물질이 이미 근본상으로 개변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심지어 예전에 불성과 마성이 서로 대항하던 자신의 상태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나의 입이 헐어서 말을 할 수 없었고 모친을 비난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철저히 깨닫고 따라서 할 수 있었을 때 입은 또 신기하게도 나았다.

내가 진정으로 안으로 찾고 따라서 자신 몸의 변이를 바로잡았을 때 어머니도 근본적인 개변을 하고 계셨다. 나는 모친에게 mp4를 사드려 일하실 때 법공부를 지체하지 않게 하였다. 하루는 모친께서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와 나에게 특별히 알려 주었다. “내가 방금 사부님의 호주 설법을 듣고 갑자기 나와 네 형수의 일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했다. 난 예전에 줄곧 나에겐 잘못이 없다고만 여겼지만 사부님께서는 이 설법에서 말씀하시기를 오로지 당신이 수련인 이기만 하면 꼭 착오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아마 원 말씀이 아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잘못이야….” 또 한 달이 지난 후 법공부를 늘린 후 어머니는 정념이 아주 족해 내가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고 먼저 자신을 개변한 후에 법공부를 한 후의 모친도 점점 더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변했는데 이는 예전에 내가 감히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로 하여 나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이런 일과 자기 몸의 수련 동화는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며, 우리가 얼마만큼 동화돼 가면 외부에서도 얼마만큼 크게 들어오는 것이다.

개인 층차의 깨달음이다.

문장발표 : 2008년 10월 1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0/14/18767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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