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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하고도 이지적으로 법을 실증하자

글 /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6일】 수련과정 중에 우리 매 사람은 모두 이러한 선택에 부딪친다. “사부님을 따라 가고 법을 스승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맹목적으로 사람을 따라갈 것인가?” 물론 말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려면 쉽지 않다. 말재주가 좋은 수련생이 그의 이해를 막힘없이 이야기할 때 우리 일부 수련생들은 가능하게 이런 수련생에 대해 탄복한다. 일부 수련생은 한 점의 이치를 깨달으면 극단적으로 가서 행하여 기어코 강행한다. 아울러 남들도 따라하게 한다. 자신이 정법노정에 따라가지 못할까봐 두려워, 자신의 법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할까봐 두려워, 혹은 심태가 안정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거나, 혹은 수련 속에서 신기함을 뒤쫓는다. 거기에 일부 수련생은 조그마한 “지명도”가 있어도 말이 비교적 격정적이고 허황하다. 토론 혹은 교류 중에 쉽게 변명하는데, 일부분 수련생들은 가능하게 자신도 모르게 따라간다.

또 일부 수련생은 일이 있기만 하면 생각없이 덮어놓고 보도원에게 미룬다. “모모가 또 대법의 나쁜 말을 하는데 당신들이 가서 관리하시오.”, “우리 지역 수련생의 수련에 문제가 생겼는데, 당신이 가서 도와주고 해결해 주세요.” 마치 진상을 알리거나 수련하는 것이 남의 일인 것 같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어디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진상을 알려야 한다.” (<<2003년 미중법회 설법>>) 이 일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가능하게 이것은 바로 우리 수련의 일부분일 것이다.

우리 매 사람마다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 주신 수련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써 참조가 없고 본보기가 없다.

“수련이란 여전히 자신의 일로서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견정>>) 매 수련자들은 모두 법을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제자이고 동일한 한 부의 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보도원이 어느 문제에 대해 비교적 깊은 이해가 있다지만, 이 또한 그의 그 한 층차에서의 인식이다. 그의 방법이 맞고 어느 문제를 아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수련생 역시 얼버무리듯이 따라서 행하지 말아야 한다. 수련생이 사고와 이해가 없는 전제 하에서 이 일을 맞게 했다고 해도, 이 수련생은 이 일에서 또 자신을 수련하지 못하였고 보도원이 그를 도와서 수련했다. 객관적으로 이 보도원은 수련생으로 하여금 수련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잃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는 수련상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불리하다. 만약 이런 정황이 매우 보편적이라면 구세력 역시 수련생의 “사부님을 따라가지 않고 사람을 따라갔다”는 이 마음을 이용해 교란할 것이고 심지어 이 보도원을 훼멸시킬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정황이 있는데, 바로 일부 수련생들은 남과 다툼이 있을 때 전화를 걸어 보도원을 찾아 자신의 관점을 끝없이 이야기한다. 보도원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보도원이 주의하지 않고 몇 마디 맞장구를 쳤다면 그는 “어느 보도원도 나의 관점에 동의했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으로 다른 사람을 내리 누른다. 사실 우리 매개 수련생들이 깨달은 법리는 그의 경지에서 맞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생각도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때문에 수련에서는 사상을 통일할 필요가 없다. 정상적인 교류는 매우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자신의 부족점을 보아낼 수 있다. 남들에게 다른 생각이 있거나, 심지어 오해하고 자극적인 언어로 이야기해도 우리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의 심성은 제고될 수 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가 진상을 알릴 수 있는 시간이 다급하게 되어 일부 수련생들은 점차적으로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게 되었다. 모순이 올 때 안을 향해 찾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밀어낸다. 사실 우리의 제고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우리는 우리 수련의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상을 알릴 때도 똑같은 도리이고 이 또한 수련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늘 자기 말만 하지 말아야 하고 도리로 사람을 탄복시키는 동시에 상대방의 감당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 해외의 수련생들은 반드시 서양사회의 풍속 및 습관, 언어, 행동가짐을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한다. 대륙에서 온 수련생들은 늘 사실(fact)과 개인의 관점(opinion)을 섞어서 말하고 자신의 결론을 상대방에게 강제로 주입한다. 이것 또한 당문화가 우리에게 조성한 교란이다. 서방사회 사람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사고능력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남의 교육 혹은 주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심지어 반감한다). 우리가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사실을 똑똑히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세히 말할수록 좋은데 먼저 국제적 형세를 말하고, 국내 형세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로 상대방을 움직여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상을 알릴 때 너무 높게 말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을 결합하여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실제 효과 역시 이 한 점을 실증했다. 상대방은 수련을 해보지 않았기에 더 높은 층차의 법리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깨달은 법리를 한번에 상대방에게 말하면, 그것은 자칫 상대방을 놀라게 하여 그들을 밀어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데,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할 뿐만 아니라 고층차로 수련하는 대법이다. 수련생은 수련과정 중에 병을 없애야겠다는 집착심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초학자들을 놓고 말하면 우리는 가장 옅은 기공의 각도에서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진상을 알리는 효과는 좋아진다. 진상을 듣는 사람 역시 당신의 순결함과 사심없는 정념의 마당에 의해 감동받는다. 진상을 듣는 사람의 심태를 잘 알고 곳곳마다 타인을 위해 고려하여 사회적인 영향에 주의한다면 세인을 더 잘 구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공 고위급 관리 혹은 대표단이 왔을 때, 영사관 앞에서 우리는 모두 “파룬궁 박해를 중지하라!”, “파룬따파는 좋다!”, “장, 뤄, 저우, 류를 법에 따라 처벌하라!” 등의 표어와 현수막을 든다. 법리상에서 우리는 알고 있는데, 우리는 중공이 주동적으로 박해를 멈출 것을 구걸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이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기자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대법제자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데, 사악을 해체시키는 것은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는 부분이다. 중공은 단지 구세력이 오랜 연대 동안 배치하여 대법과 대법제자를 “고험”하는 사령(邪靈)에 불과하다. 그 당과 대마두가 “파룬궁을 전승(戰勝)하겠다”고 외친 그 시각부터 뭇 신들은 그것을 해체, 소멸한다고 판단하였다.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파룬궁 박해를 중지하라”고 쓴 현수막을 펼쳐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를 겨냥하여 “파룬궁 박해를 중지하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도리를 들겠다. 바로 사회에 대한 영향에 주의하지 않으면 세인을 구도할 수 없다. 기자, 경찰, 각급 정부 관원, 행인 및 전반 사회를 마주하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체 사회의 선량한 사람들이 모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함께 이번 박해를 제지하도록 호소해야 한다.

다른 한 면에서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우리는 사회의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을 호소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노력을 통해 더욱 많은 인연있는 사람들이 대법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구도받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국내 대법제자의 압력을 경감시킬 수 있다.

우리는 중공 이 사당에 대해 무슨 희망을 품고 있지 않지만, 중생을 널리 구도하는 것은 그 어떠한 단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겨냥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록 중공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진상을 알아듣고 대법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여 사당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구도된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중공과 그것의 부속 조직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대법제자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다.

명백하지 못할 때는 법공부를 많이 하여 시시각각 법을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토론하고 교류하는 과정 중에 우리는 남의 장점과 자신의 단점을 볼 수 있다. 한 가지 일념을 내보거나 혹은 마음이 매우 충동적일 때 우리 자신이 먼저 가늠해야 한다. 내가 자신을 실증하는가 아니면 대법을 실증하는가? 이 일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중생구도에 좋은 점이 있을까? 법리를 명백히 알고 제거해야 비로소 실질적인 것이다.

물론 우리 수련생들이 일을 할 때 서로 협조해야 한다. 어떠한 일이든지 모두 극단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항목과 활동에서 많은 수련생들을 움직여야 한다거나 혹은 큰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명혜망을 보아야 한다. 해외 또는 각 지역에 대법학회가 있는데, 모두 소통의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법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이지(理智)로써 법을 실증하고, 지혜로써 진상(眞象)을 똑똑히 말하고, 자비로써 홍법(洪法)하고 세인을 구도(救渡)하는 이것이 바로 각자(覺者)의 위덕(威德)을 세우는 것이다.” (<<정진요지2>> <이성>)

우리 대법제자가 이 특수한 역사 시기에 사부님을 따라 정법할 수 있음은 정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다. 우리가 청성하게 이지적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시초에 세운 서약을 실현할 수 있으며, 더욱 많은 세인들을 구도할 수 있다.

문장완성 : 2008년 10월 6일
문장발표 : 2008년 10월 6일
문장수정 : 2008년 10월 6일 10:19:01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0/6/187242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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