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9월 2일】 어제 올림픽이 끝났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격동되어 보모에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중국은 드디어 자존심을 찾았어. 보아하니 그 외국인들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길 수 있겠어?” 보모 역시 옆에서 따라 말했다. 나는 속으로 반감이 생겨 그들 앞에 가서 한바탕 책망하는 어투로 “하루 종일 말씀만 하시는데 힘들지 않나요? 이것은 모두 공산당이 당신들에게 주입한 ‘투쟁철학’인데 투쟁할 대상을 찾아야만 즐거움을 느낍니다. 사실 그 외국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들 자신이 그들과 겨루고 있어요. 자신의 승리했다고 여겨 기뻐해도 안 되는데 정말 무의미해요.” 라고 하면서 또 한바탕 말다툼을 했다(이런 말다툼은 집에서 늘 밥먹 듯이 한다). 아버지는 또 사당을 수호하는 말을 적지 않게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은 나와 고집을 부리시지만 사당의 연극이 끝나는 그 날이 오면 풀이 죽어버리실 꺼야.”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조금 평온해 진후 나는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와 속인 사이에 모순이 있으면 모두 대법제자가 틀린 것이라는 말씀을 떠올렸다. 냉정하게 안에서 찾아보니 원래 나의 지긋지긋하게 없애지 못한 ‘쟁투심’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근원이 사당의 ‘투쟁철학’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이 ‘쟁투심’ 때문에 고뇌를 없애지 못하는데 이것은 여러 방면에서 체현된다. 더욱이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데 엄중한 영향을 주었다. 진상을 알릴 때 특히 가족들은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도전적인 어투가 나오면 바로 변론하기 시작하는데 어떤 자극을 받기만 하면 어떻게 말한다. 그럴 때는 ‘쟁투심’이 뛰쳐나와 자신이 그를 구해야 한다는 것마저 까먹는다.
오직 어떻게 해야 그를 설득시킬 것인지 생각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해를 악화시켰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아직 나의 진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에게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 방면에서 말을 하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는데 내가 말하기만 하면 그는 바로 악의적인 말로 내게 도전한다. 나는 화를 참지 못해 또 언성을 높인다. 이렇게 항상 떠들썩하다가 언짢게 헤어졌다. 매번 이런 일이 있는 후 나는 모두 후회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그때 당시는 바로 자신의 ‘쟁투심’을 통제하지 못한다.
다른 면에서 이 ‘쟁투심’은 또 사당이 일을 만드는 것을 기다리면서 나타난다. 특히 올림픽 기간에 내심 깊은 곳에서 늘 무슨 일이 발생하기를 기다린 것으로 체현되었다. 사당에 대해수련인으로써 마땅히 갖춰야 할 심태가 없었다. 도리어 원한, 쟁투가 있었다. 오만하게 굴면서 나의 진상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늘 자신도 모르게 이런 염두가 생긴다. ‘당신이 지금 분별하지 못하지만, 재앙이 임박하면 울어도 소용 없다.’
또 동수들과의 교류에서 나는 늘 많은 질문과 반문(反問)을 하는데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비판 투쟁하는 방식의 틀에 사로잡혀, 늘 말하다보면 언성이 높아진다. 동수들이 여러 번 내게 평온하게 말하라고 알려 주었고 나 자신도 의식하고 있기에 개변하고자 결심하지만 ‘쟁투’의 근원을 없애지 못하다 보니 늘 어떤 때는 좋았다 어떤 때는 나빴다 한다. 나는 평온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속삭이는 방식이 내게는 뜻밖에도 아주 생소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에야 나는 명백해졌다. 자신에게 깊이 뿌리박힌 ‘쟁투심’은 바로 어려서부터 사당의 ‘투쟁’이란 독소에 중독된 후유증이었다. 나는 줄곧 내심 사당에 대해 많은 반감이 있고, 내 몸에는 ‘당문화’의 물건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9평’ 역시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사당의 독소가 없는 곳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 울타리에서 생활했으니 사람마다 사당의 독소가 침투되지 않을 수 없다. 많건 적건 모두 ‘당문화’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다. 다행히 우리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우주대법을 지니고 세간에 내려오시어 일체 부정확한 요소를 바로잡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끊임없이 대법에 동화 해야만, 몸에 오염된 사당의 사악한 요소를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다.
이전에 나는 늘 왜 자비심을 수련하지 못할까 하고 자신을 원망해왔다. 지금 와서 보니 ‘쟁투심’을 제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비심이 나올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쟁투심을 버리지 않으면 또한 질투심이 생기기 쉽다.”(『전법륜』)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악자(惡者)는 질투심 탓으로 사(私)를 위하고, 화풀이를 위하며, 스스로 공평치 않다고 한다.”(『정진요지』「경지」)
그렇다면 나의 어느 방면에 아직도 악자의 표현이 있는 것이다. 수련을 이렇게 오랜 시간 했으면서도 자신이 이렇게 부족함이 있으니 정말로 사부님께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또 ‘투쟁’은 사악의 변태적인 유전자이다. 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사당의 일체 독소를 제거해야 하며 전혀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9평’과 ‘해체 당문화’를 잘 보아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시시각각 대법에 대조하고 자신의 그 마음에 공력을 기울여 내 몸에 숨어있는 모든 ‘쟁투’의 요소를 철저히 깨끗이 제거하고, 자비롭고 온화한 심태로 3가지일을 잘하여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층차의 한계로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완성:2008년9월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9/2/18512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