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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집착에 따라 진상을 말해야 한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8월 19일] 오늘 한 시골스러운 모습의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한가하게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진상을 하고자 했다.

그의 집 상황을 물어보니 생활은 괜찮다고 했다. 집은 부유하고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으며 수확도 괜찮다고 했다. 장춘에는 왜 왔느냐고 물으니, 부인의 병원 치료를 받으러 함께 왔다고 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파룬따파 하오! 쩐(眞),싼(善),런(忍) 하오!”를 외우면 병이 낫는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은 부처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장에서는 파룬궁을 감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파룬궁은 주화입마한다고 하면서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쩐싼런은 좋다. 정부에서 말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 있다. 문화대혁명 때에도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동이라고 했다. 그러면 지식도 좋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단번에 “파룬궁은 나쁘다. 정부에서 잡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발정념을 하면서 미신을 타파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농촌 아주머니가 당(黨)의 호소에 따라 조왕신의 상을 내리고 눈알을 파냈다. 그 결과 아주머니는 2년 후 장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 하라는 일이 꼭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여전히 나쁘다고 했다. 나는 인내심이 없어지면서 몇 가지 가정사를 물어보다가 기분을 완화시키고 자리를 떴다. 그 할아버지는 혼자 거기에 앉아 중얼거렸다. “나쁘다. 천만에라도 믿지 말라. 손해를 본다.” 나는 한편으로 발정념을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길을 가면서 나는 생각을 했다. 왜 믿지 않을까? 정부를 미신하고 박해를 두려워해서일까? 그렇지 않다면 주변에 연공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서일까? 그러나 진상은 바로 사악한 당의 중생들에 대한 독해를 청리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중생을 만나 응당 전심전력을 다하여 해야 했다. 그러나 시끄럽기만 하면 돌아서 간다. 진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고 만다. 이 어찌 수련인의 심태란 말인가?

당시 처음 그 할아버지를 봤을 때, 주동적으로 나에게 말을 하고 선한 모습이기에 말하기 좋다고 여겼다. 이 역시 관념이고 집착이었다. 구세력은 바로 이 틈을 탔다. 그에게 듣지 않게 하고 말하기 쉽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 또 하나는 그의 각도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문제를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대응되는 사실을 도리로 설명하지 못했고 자신의 말에만 집착했던 것 같았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의 듣기 싫어하는 모습이 나왔다. 또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좌우를 살피면서 정정당당하게 하지 못했다. 특히 그가 “파룬따파 하오”를 말할 때 발음도 정확했고 목소리도 컸다, 나는 속으로,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정정당당하게 해야 했는데, 사람들이 못볼 것이 없다고 암시해주는 것이었다.

또 그가 파룬궁은 법을 위반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정부가 법을 어기고 사람을 잡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의 이 말은 노인에 대하여 소홀히 한 논리가 너무 많은 것이었다. 노인은 연세가 많고 지식이 없어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좀 높기 때문에 허풍떠는 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가 따라오지 못했다. 도리어 내가 고집스러워 보이고 말다툼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또 “위법”이라고 했다. 나는 또 금방 한 말을 강조했다. 이것은 분명히 쟁투의 뜻이 들어 있었다. 만약 내가 그의 뜻에 순종하여 “범한 것이 어느 조목의 법률인가?” 라고 물었다면, 그렇다면 다른 답변이 있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음속의 매듭을 똑똑히 알게되었을 것이고, 나는 침착하게 그 매듭을 풀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갑자기 생각난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설법중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집착에 따라 말해야 한다.” 똑똑하게 말씀하셨지만 제자가 참답게 읽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서글프기만 했다.

사실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구도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저 말하기 좋으니 시험삼아 말한 것이다. 마음은 자비하지 않았고 의지는 강하지 않았다. 강철을 녹일만한 자비심이 없이 어찌 되겠는가? 얼굴은 줄곳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따뜻하게 보살펴주지는 않고 그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대충 하면서 착실히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나는, 이 모두는 수련의 일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당신의 마음이 순정한가? 순정하지 않은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중생구도를 할 수 없다. 표면상에는 사실을 말하고 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진(眞)과 선(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인(忍)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법중에 있지 않으면 도리가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이전에 나는 진상을 알리는 가운데 참답게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평소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수련을 잘한다고 느끼고는 하였다. 배우는 법은 같은데 왜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누워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자신을 질책했다. 매 한 가지 사건을 통하여 착실하게 또 진정하게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았다.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은 것이다. 수련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안으로 찾는다는 단어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연을 중히 여기지 않은 것이었다. 엄숙하지 못했고, 수련을 참답게 대하지 않았다.

자비하신 사부님은 모든 일을 법 중에 쓰셨다. 제자들이 믿지 않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는 헛된 제자이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문장발표 : 2008년 8월 1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8/19/1843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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