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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것과 말을 듣는 것

글 / 태국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8월 4일】 “말을 하는 것과 말을 듣는 것”, 이것은 동수에게 부족함을 언급하는 것이고, 동수로부터 부족함을 지적당하는 것인데, 이 두 관계는 서로 융통되면서 또 서로 보충된다.

먼저 동수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는 것에 대하여 말해보자. 이전에 나는 한 가지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은 나에게 많은 인식의 개변이 있게 했다. 컴퓨터에 정통한 한 수련생이 있었다. 그는 자료점을 돌면서 컴퓨터에 기술상의 문제가 있으면 이를 고쳐주면서 기술을 전수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법공부와 연공이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 자료점에 왔었다. 동수의 법공부 부족 문제를 그에게 깨우쳐 주었는데, 그는 이 일의 엄중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한번은 그와 기타 동수들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중에 국보 특무가 뒤따라와 붙잡히게 되었고, 불법(不法)으로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마음속으로 줄곧 아주 큰 가책을 느꼈다. 동수의 부족함을 보고서도 쑥스러워 면전에서 말하지 못하였으며, 반대로 기계가 조금 고장이 나면 바로 수련생을 번거롭게 만드는 의뢰심이 형성되었다. 이 일에서 나는 하나의 정체가 되려면, 동수의 부족함을 보았을 때 마땅히 그를 위하여 책임지는 각도에서 선의로 언급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상대방이 일시적으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가 후에 실질을 알게 된다면 동수에 대해서는 유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선의적으로 동수의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역시 수련중에서의 한 항목이라고 깨달았다. 처음에 상대방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아주 강렬한 개인적인 관념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 표준으로, 어떤 때엔 비록 표면에는 선하고 언어가 평화로운 것 같지만 사실 아직 상대방과 함께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자신도 모두 감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한 것은 모두 도리가 있는데, 왜 듣지 않을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좋지 않아 하면서, 듣건 말건 어쨌든 나는 당신에게 도리를 이야기 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이 말한 것에 아주 도리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바로 강대한 개인의 인소가 속에 깊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는 진정으로 수련생을 도운 것이 아니었다. 동수와 평등하게 솔직하게 부족한 것의 출현을 교류하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자신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 의식하지 못하였다. 높은 사람이 지시하는 식의 관념에서 현시심, 쟁투심, 원망하는 마음, 자기를 실증하는 마음들이 안에 섞여 있다는 것을 모두 의식하지 못하였다. 이 방면에서 아직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수련생은 접수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자신이 먼저 이러한 부족한 것을 인식하게 되니, 동수 역시 반대로 천천히 변하여, 나의 말을 접수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있게 되었다. 자신이 말하는 중에 사람의 마음이 많았는데, 순정한가 순정하지 않은가를 의식하였으면 반드시 수련하여 없애야 한다. 그러나 아직 많은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사부님께서 바로 우리를 도와 이러한 마음과 물질을 밖으로 밀어내어 그것을 폭로하여, 속인중에 반영되어 나오게 하여, 바로 속인 혹은 동수의 언행에서 그것을 당신에게 되돌려 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사람의 마음을 수련해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다…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설법>>을 통해,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에게 요구하신 내용에 대해 가히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자비와 상서로움은 대법제자의 감수능력에 따라 체현되었다. 수련생이 선녀 복장 문제에 대해 언급했을 때, 사부님께서는 직접 경성(硬性)으로 규정하지 않고, 도리어 중생구도의 각도에서 상량한 어투로 이 문제를 이야기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설법>>과 기타 설법에서 여러 번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셨다. 이런 방면에서 볼때 <<오스트레일리아 설법>>을 여러 번 보아야 하며,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의 그러한 “어투, 자비, 이치”에서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혹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수련생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을 때 어떤 태도로 대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말한다면, 나는 부족한 수련생은 마땅히 자신을 일깨워준 수련생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출발점은 좋았다. 정체에서 매 하나의 입자로서 대법을 수호하고, 정체를 수호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하며, 이는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 비록 어떤 때에 개인적인 인소가 있지만, 우리는 가급적 자신을 그중에 놓아야 하며, 마음을 넓혀야 한다. 어떤 경우, 깨우침을 받은 수련생이 단지 체면 때문에, 마치 자신이 바로 상대방보다 수련이 잘 되지 못한 것을 겉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한다. 이것은 질투심이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연한 일은 없다. 관건은 우리들이 어떻게 수련생이 이번에 일깨워준 기회를 꼭잡고, 자신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능히 안에서 찾고, 제고하여 올라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늘 상대방의 입을 빌어서 대법제자에게 점화시켜 준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어떤 때에 어떤 수련생을 볼때 다른 수련생이 그에게 일깨워 주면 바로 “나는 알고 있으니 당신은 말하지 말라” 라고 한다… 이러한 말을 들었을때 나는 바로, “동수여, 진정으로 진상이 크게 나타날 때 당신은 자신을 위하여 한 이 말에 대해 부끄러움을 감촉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의 내용은 개인의 얕은 인식에 따른 말이므로 부족한 점이 있으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문장완성 : 2008년 8월 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8/4/18340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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