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6월23일] 국내 어떤 동수들은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정도가 풀과 나무가 모두 병사로 보이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일종 “선종”식의 쇠뿔을 파고드는 사유 방식으로 과격하게 대한다. 그 표현은 박해를 제기 할 수 없는 데 박해를 제기 하기만 하면 곧 낡은 세력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데, 안전에 대한 주의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곧바로 낡은 세력을 승인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악이 약점을 잡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곧 박해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등이다. 이는 법 학습이 부족하고 법리에 대한 인식이 똑똑하지 못한 표현으로, 역시 두려워하는 마음의 변상적인 표현이다.
어떤 동수들은 “우리가 법에 따라하고 박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하며 안전 문제는 제기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 자신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게 강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실질로 그가 두려워 제기하지 못하면 곧 박해를 불러오게 된다. 아울러 이런 논조는 앞뒤가 모순된다. 우리는 법에 따라해야 하지 않는가?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바르게 하여 사악이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피면해야 한다고 여러 번 알려주셨으며, 사부님께서는 안전에 유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찌 이 점을 잊을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 이런 문제를 말씀하신 이상 우리는 반드시 광명정대하게 사고하고 교류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사부님께서 하신 설법마저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찌 법에 따라 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가장 좋기는 자신의 길을 바르게 걷는 것으로 사악이 박해의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북미순회설법》)
“또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줄곧 청성하지 못하고 냉정하지 못하며 자신이 안전에 주의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안전은 더욱 주의하지 않는다 .”(《2004년시카코법회설법》)
“일부 수련생들은 안전에 너무 주의하지 않는다. 마치 방금 사악에게 풀려났고 죽도록 박해를 받았는데도 며칠 만에 잊은 듯 하다. 당신의 안전은 또한 다른 대법제자의 안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 방면에 반드시 주의해야하며 중시해야한다. 낡은 세력의 요소에게 빈 틈을 타게 해서는 안 된다.” ( 《로스앤젤레스시설법》)
우리가 박해를 피면해야 하고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담론하는 것은 절대로 낡은 세력을 승인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박해는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보고도 보지 못한 것처럼 할 수 있는가? 안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동수들이 바르게 하지 못했거나 안전에 주의하지 않아 박해를 받고 있는가! 되도록 손실을 감소하는 이것을 응당 해야 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조성되기 전에 극단으로 가는 원인을 말하는 것은 무엇이 “낡은 세력을 부정하다” 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근본적으로 낡은 세력의 출현은 잘못된 것으로, 박해도 출현하지 말아야했고 낡은 세력이 정법의 모든 안배와 진정으로 정법하는 것을 좌우지 하는 것은 대법 수련과는 격차가 심해서 서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사부님의 정법과 우리들의 수련에 대해서는 모두 교란이고 모두 파괴이다. 그 관념과 작법은 모두 낡은 우주의 선천 부족과 무너진 후의 표현으로서 절대 새로운 우주의 대법에 부합되지 않으며 미래에 의해 부정될 것이며 절대로 미래 중생에게 남겨 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법 중에서 철저하게 그것들을 부정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낡은 세력이 우리 매 개인에 대한 안배와 교란을 부정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알려 주셨다. “당신이 바르게 걸을 수 있다면 곧 당신의 정념이 매우 충족하며 대법의 요구에 따라하고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하면 당신은 낡은 세력을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당신 역시 당신의 길을 바르게 걷는 것이다 .” ( 《2003년 정월 대보름서법》 )
그렇다면 무엇이 낡은 세력을 승인하는 것인가? 그것은 곧 바로 낡은 세력과 사부님의 정법의 관계, 박해와 중생 구도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들이 세인을 구도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거대한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의 수련을 첫 자리에 놓고 마난을 수련의 환경으로 간주 한다. 물론 이렇게 인식하는 동수들은 박해가 시작 될 때는 비교적 많았으나 지금은 이미 매우 적다. 또 한 가지 상황은 곧 정념이 부족한 것으로 사부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데 이 역시 낡은 세력을 부정하지 못한 것이다.
박해를 받게 된 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이 과중하고 혹은 극단적이고 이성적이 되지 못했거나 혹은 대법에 손실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나는 한 수련생이 평소 늘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낡은 세력을 승인하지 않는다. 낡은 세력을 승인 하지 않는다 …….” “낡은 세력을 생각 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완전히 없다” “나의 마음속에는 박해란 개념이 없다 .” “나의 마음속에는 박해의 개념이 없으며 박해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등등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이렇게 하면 낡은 세력을 부정하여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집착이 점점 팽창된 것으로, 기타 동수들에게 적지 않는 손실을 주게 되고 큰 착오를 범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집착이 확대되어 이지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정법에 손상되게 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데, 이 본신이 이미 사악의 교란과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악은 우리들의 집착과 부족한 점을 찾아 틈을 타고 기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입으로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여 혹은 마음속으로 말한다 하여 틈을 타고 기어들지 않는 게 아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낡은 세력을 부정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이 표면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으로 정념정행 하라는 것이다. 박해를 받는 그런 동수들이 낡은 세력을 부정할 줄 몰라서 인가? 아니다, 나의 신변에 한 수련생이 있는데 그는 법리에 대한 인식은 매우 똑똑하지만 한 시기 법학습을 중시하지 않았고 집착이 비교적 중하며 정념이 부족해 누차 악인의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바르게 하는 게 관건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모두가 그 무슨 집착도 없다면 낡은 세력도 약점을 잡지 못할 것이며 방법이 없을 것이다 .” (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에서의 설법》 ) 정념정행 할 수 있으면 교란과 박해를 충분히 피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절대 우리가 하는 일체 모두 교란과 박해를 피면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상을 알리는 문제를 놓고 말하더라도 진상을 알리는 것은 교란과 박해를 피면하기 위해서인가 ? 당연히 아니다 ! 진상을 알리는 것은 사람을 구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이다. 법공부를 잘하는 것은 사람을 구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이다 .
또 손실과 불필요한 시끄러움을 피면하기 위함도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보장을 제공한다. 우리는 반드시 낡은 세력을 부정하여야 하지만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본신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다만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보장임을 똑똑히 해야 한다.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사명이며 비로소 우리들이 도달해야할 최후의 목적이다. 만약 주차를 분별하지 못하고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것을 첫자리로 생각하고 최종 목적으로 간주하고 사상 정력을 완전히 여기에 놓고 도리어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착오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관계를 분명히 하고 큰 곳에 착안하며 시간을 다그쳐 중생을 구도하는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냥 문구만 따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이따금 박해를 생각하다가도 두려워 죽을 지경인데 엄중하게 정력을 소모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 견주어 동수들은 법공부를 많이 하며 법리를 독똑히 인식하며 낡은 세력의 박해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기를 희망 한다. 우리들의 정념정행은 이마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시시각각 정신이 긴장됨이 요구 되지 않는다. 반드시 정력을 사람을 구하는데 쏟아 부어야 한다.
여기에서 말 나온 김에 나는 일부 대륙 동수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자신에게 있는 사당의 영향으로 산생된 사상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쟁투심이 매우 강하여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자극 시키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고명하다고 과시 한다. 늘 다른 사람과 쟁론을 즐겨하며 또 사부님의 설법의 일부만을 절취하여서 저자의 본의와는 달리 제멋대로 사용하면서 다툰다. 나는 이 모두 “정”의 표현으로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한 인식이 좋을 것을 희망 하며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하며 아울러 이에 도취되는 데 속인은 이 자그마한 정을 위해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시심, 질투심, 쟁투심, 환희심 등등은 모두 여기에서 생기게 된다. 고층차에서 보면 이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다른 사람이 정말 당신을 숭배한다 한들 또 어찌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이 것인가 ? 이 것이 다 무엇인가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와 비긴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
동수들이 함께 교류하는 목적은 공동으로 제고하기 위한 것인데 자신을 과시하고 다투는 것이 또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 단지 자기의 조그만 집착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일뿐 도리어 교란과 파괴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동수들 모두가 수련 중에 있기에 아무런 사람 마음도 모두 없을 수 없다. 만약 쟁투심에서 나오고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자극한다면 그가 말한 것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접수하기 어렵고 다른 사람의 정서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하물며 그 인식이 반드시 정확 할 수도 없다. 만약 정말 마음이 매우 바르고 동수의 제고를 추진하기 위해서이고 또 부드럽게 교류한다면 우리들이 얻게 되는 것은또 무엇인가 ? 어느 것이 중요한가를 이지적으로 고려해 보면 곧 명백할 것이다 .모든 동수들이 모두 큰 국면을 중하게 여기면서 전력으로 사람을 구할 것을 희망 한다 .
개인인식이니 부당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 주시 희망한다.
성문 :2008년 6월21일
발고 :2008년 6월23일
갱신 :2008년 6월27일 00:25:14
http://minghui.ca/mh/articles/2008/6/23/1807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