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토론토(多伦多)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6월 12일] 나는 나의 수련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항상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상에 대해 반대의견이 있는 사람들과 대법을 적대시하는 화인들을 내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법리상으로는 마땅히 그들에게 말할 때나 행동에 있어서 될수 있는한 선하게 대하여야 했다. 그러나 내심으로 그들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나의 친척이 있는데, “삼퇴”에 대해 아주 반감을 가졌다. 그리고 또 내가 우편으로 보낸 “9평”도 찢어버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 매우 냉담한 정서를 보이게 되었다.
최근 명혜망에서 동수들의 교류문장들을 보았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내가 말하면 실제상 속인사회의 일체 일은, 오늘도,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으로 조성된 것이다. 비록 구세력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당신들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이들을 불러오지 못한다.” (《각지역설법2》, ) 라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우리들의 두려움이 바로 박해를 초래한 것이다. 우리들의 원망하는 마음 역시 속인들로 하여금 대법을 적대시하도록 초래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생각해보면, 수련하기 전에는 쉽게 남을 미워하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언어와 행위를 너무 중하게 보았으므로 마음이 또 너그럽지 못하였다. 일단, 남들이 무의식중에 나에게 함부로 말하면 그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사람을 일종 나쁜 사람으로 보고 원수처럼 여기면서 자신은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문화 중에 “애정이 분명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또 그에 따른 것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어 이 몇 년 간 나는 내심 깊이, 대법을 반대하는 속인들에게 대립적인 인상을 주었다. 오직 강한 표현이 숨어 있을 따름이었다.
명혜망에서 또 한 동수의 문장을 보았는데, 그 동수의 회사에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늘 대법을 반대하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말하는 것이 아주 듣기 거북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이 수련생은 용기를 내어 그 사람에게 진상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한번은 그 사람이 사악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주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생은 발정념을 하면서 “이 사람에게 용기 있는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려, 이 사람을 구도함과 동시에 그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게 해주세요.”라고 했다. 그 결과 나중에 이 사람을 만났을때, 이 사람은 다시는 대법을 반대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수들에 대해서도 아주 존중하였다. 태도가 180도로 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주동으로 동수들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 문장을 보고,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수련인은 선(善)을 수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선은 일종 경지의 체현이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은 표준이 아니다. 나는 많은 말로 진상을 하였다. 그러나 수련하면서 선을 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대법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진상의 기점이 모두 순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욱이 상대방에서 마치 도리가 있는 것처럼 변론하면, 자신도 모르게 쟁투심이 나오면서 화가 났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하여 말하고 행한 것이 아니었다.
명혜망 대륙 동수들의 문장에 있는, 과거에 일부 표현이 아주 견정했던 옛 수련생이 무엇 때문에 나중에 전화된 후 배반자가 되었는가? 사실 일부는 옛적부터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일을 함에 있어서 속인식의 심태로 박해를 반대하였다. 비록 보기에는 견결히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기점이 틀렸다.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였다.
어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한 2살 정도 되는 남자 어린 아이가 몇 명의 큰 어린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몇 명의 큰 어린이들은 이 작은 어린이를, 눈길로나 언어로도 모두 우호적이 아닌 태도로 대하였다. 남자 어린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자기 아이를 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나쁜 아이들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 남자 어린 아이는 조금도 개의치않고 줄곧 가서 그곳의 몇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놀기 위해 아주 선한 마음과 쾌활한 모습으로 대하였다. 아주 빨리 그 몇몇 큰 어린이들이 이 작은 남자 아이를 좋게 대하였다. 이들은 마치 좋은 친구처럼 놀고 있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우리 마음속에 ‘원수’라는 관념이 없을 때, 선한 마음으로 남을 개변시키는 것이 아주 쉽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인간세상 이 층차의 이치도 역시 이러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뉴욕지역법회설법》에서 “모두들 생각해보라, 법을 배우기 전에 중병 혹은 불치의 병을 얻었던 많은 사람들이 법을 배운 후 모두 좋아졌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일부 수련생은 도리어 안 되는가? 설마 대법이 중생에 대해 차별이 있는가? 나 사부로서 수련생에 대해 부동했단 말인가? 나는 정말로 당신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진정으로 수련했는가? 당신이 진정으로 대법의 요구에 따라 했는가? 진상을 하는 중에서 파룬궁 박해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그런 속인의 마음으로 일을 하였는가, 아니면 진정 대법제자의 각도에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했는가?” 하고 말씀하셨다.
최근 나는 이 몇 년 동안, 나의 심태의 기점이 모두 아직 완전히 개변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때는 부딪치기고 하고, 혹은 듣기도 하는데, 일부 화인 직원들이 외국회사에서 중공의 요언을 전파하여 일부 서양인들에게 대법에 대한 편견을 초래할때, 나는 진심으로 이런 화인들을 미워했다. 그들은 서방사회에서라면 매우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나는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의 심태는 도리어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옳지 않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최근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이 문제의 엄중함을 느꼈다. 나는 여태껏 이 마음을 제거하는데 중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문제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수련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선한 사람은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이 없고 미워하지 않고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정진요지》, ) 보아하니 원망의 마음이 있으면 바로 악한 자의 범위에 속한다. 수련인이 선(善)을 수련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다.
이상은 최근 나의 조그마한 인식이다. 부당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문장완성 : 2008년 6월 1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6/12/18011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