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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게 얻은 법연을 소중히 여기며 사명에 치욕이 되지 않게 하자

글 / 북경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5월 7일】 1996년 봄에 법을 얻어서 현재까지 눈깜박할 사이에 12년이 백구과극(교정주-白驹过隙, 세월과 인생이 빨리 지나가다)과 같이 지나갔다. 법을 얻은 초기의 무사태평함이든지 아니면 1999년4.25 이후의 끊임없는 풍파든지, 그리고 1999년 7.20 이후에 받은 박해든지, 정상 시기에 법을 얻고 배운 것도 좋고 정법시기에 대법을 실증하는 것도 좋고 비바람의 길에서 나는 굽은 길을 걸었던 적도 있었으며 방황할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 정법형세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비바람속에서 걸어나왔으며 나의 마음속에는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와 대법의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 금강불파가 남아 있어서 대법도의 무사무위무아(无私无畏无我)로 진선인 대법의 위대한 불후의 걸작을 실증하였다. 만약 나의 장점이 보이면 나의 모든 장점은 모두 파룬따파을 수련한 후 마음을 닦아서 정진한 것이며 만약 나의 결점이 보이면 그것은 내가 아직 법에 동화하지 못한 부분이며 나는 정진할 것이다. 정법과정의 정념정행은 모두 사존과 법이 부여한 것이다. 행운스럽게도 사부님을 따라 정법할 수 있는 것은 만고에도 만날 수 없는 영광이다. 나는 이 쉽지 않은 법연을 소중히 여겨 광범위하게 진상을 전하고 삼퇴를 권고하며 법에 동화되게 하며 법에 원용할 것이다. 희망하건대 내가 자비로운 사존을 만나뵈었을 때 마음에 좌책감이 없이 “사존님, 저는 사명의 기대에 먹칠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1996년 봄에 대학을 다닐 때 법을 얻었다. 사실 법을 얻기 전에 아랫배에서 무엇이 돌고 있음을 느꼈다. 자비하신 사존은 이미 그때부터 나를 관할하셨다. 법을 얻은 후 학교에서 작은 연공장소를 설립하였으며 우리는 매일 점심을 먹은 후 법을 읽고 법공부를 한 시간 이상 하였다. 저녁에는 동공을 한 시간 하였다. 그때 학교의 수업과정은 많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하고는 법공부 하거나 작은 법회에 참가하여 마음을 닦고 정진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으로 생명 중의 아름다운 한 단락 시간이었으며 단순하고 조용하였다. 그 떠들석한 도시에서도 학교에 이런 하나의 조용한 코너가 있었다. 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며 겨울이 오고 여름이 지나갔다. 작은 연공장소에서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모두 보냈다.

1. “4.25” 이후

세월은 덧없이 흘러 우리는 곧 졸업할 때가 되었다. 1999년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기 전에 파룬궁수련생의 “4.25” 평화적 청원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학교의 연공장소에서 몇 명의 수련생이 갔다. 나는 4월 24일 저녁에 가지 않았다. 그때 보도원이 명백하게 말하였다. 천진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붙잡아갔으며 북경에 정황을 반영하러 간다고 하면서 가고싶으면 가고 가고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당시 나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천진사태에 대해 잘 몰랐으며 단지 천진의 파룬궁수련생이 붙잡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나는 천진난만하게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는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에 부딪치면 자신의 부족점을 찾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또 무슨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4월 26일은 우리가 단체로 홍법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연공장소에는 동수들이 특별히 적었다. 물어보고 나서야 모두가 북경으로 갔다는걸 알았다. 우리 학교의 연공장소에서 북경에 간 수련생은 소식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 지도 한 장을 들고 석가장으로부터 북경에 갔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북경에 온 것이었다. 북경 서역에 도착하여 나는 도면대로 당시의 신방국 소재지를 찾아갔다. 서역에 가서 신방국의 위치를 물어볼 때 기사가 말하기를 25일에 거기에 많은 사람이 갔다고 하면서 이미 엄격히 계엄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부우거리(府右街)에 도착했을 때 수련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신방국은 나의 맞은편에 있었다. 내가 신방부문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려하고 있는데, 나의 옆으로 두 명의 여자가 지나갔다. 그녀들은 나를 보며 어디에 가느냐고 하였다. 나는 내가 파룬궁수련생이며 북경에 정황을 반영하러 왔다고 하였다. 천진의 파룬궁수련생이 불법으로 붙잡혀 우리는 신방부문에 가서 진실한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정황은 이미 해결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고 하였으며 나에게도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를 타고 석가장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은 나에게 나쁜 사람을 만날까봐 두렵지도 않느냐고 하였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근본상 나쁜 사람을 만날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주요하게 나의 마음속에는 나쁜 사람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생각으로는 일에 부딪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겼다. 일에 부딪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수련제고와 관련된 것이다. 일에 부딪치면 안을 행해 찾는 것이, 우리가 시시각각 마음에 새기면서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돌아온 후 계(系)의 영도들은 나를 찾아와서 담화하였다. 그때 우리 반급에 수련하는 학생이 4~5명 되었다. 반급에 절반 이상되는 학생이 연공장소에 갔으며 사존의 설법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때 우리는 대법진상을 계에 있는 영도들에게 알려주었다. 파룬궁은 조직이 없으며 “4.25” 평화적상방도 정치적 목적이 없다고 하였다. 영도들이 어떤 정황을 요해하려 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정황을 말하였다. 계에 있는 당위서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유신론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람이 아주 높은 공간에서 떨어져 내려왔다는 이 점을 접수할 수 없었다. 우리도 더 많이 말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도 우리가 법공부하고 연공하는데 더 많이 간섭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법공부하는 교실을 이상하게 점용당하였다. 본래부터 그 교실에 몇 명 안 되는 사람이 갔으며 하나의 매우 낡은 큰 교실이었다. 그들이 교란하는 방식은 사람을 파견하여 거기에 가서 자습을 하게 하였는데, 목적은 우리를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매일 점심식사 후에 그 교실에서 법을 읽거나 혹은 사존의 설법을 들었다. 점심식사후는 본래부터 휴식시간이었다. 누가 점심식사후에 가서 자습을 하겠는가? 후에 우리는 우리를 간섭하는 사람에게 진상을 이야기하였다. 마지막에 교실은 여전히 우리가 계속 법공부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만 유지하였다. 1999년 6월 말에 졸업한 후 새 학기가 아직 개학하지 않았을 때 중공은 대법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였다.

“4.25” 이후, 연공장소에는 자주 외부의 사람이 왔으며 젊은 사람도 있고 늙은 사람도 있었다. 학교의 영도같기도 한 사람이 우리에게 대법의 진상을 물었다. 나는 한 아주머니에게 《전법륜》을 드린 적이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그 한 단락 시간에도 새로운 수련생이 부단히 수련의 행열로 걸어 들어왔다. 그후 광풍과 비바람이 오자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당시 우리는 와서 요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이야기하였다. 파룬궁은 진선인으로 사람의 수련을 지도해주며 “4.25” 평화적 청원시에는 늙은 노인도 있었고 어린 아이도 있었으며 파룬궁제자가 중남해를 떠나갈 때 경찰들이 버린 담배꽁초도 다 갖고 떠나갔다. 바닥에는 종이 한조각도 없었다. 내가 한 쌍의 중년부부에게 진상을 이야기한 후, 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혼자말을 하였다. “정말 잘한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벌써 9년이다. 물론 우리는 계속 이야기할것이다. 박해가 끝나고 법정인간의 그 시각이 올때까지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2. 박해중에서 걸어나와 대법을 실증하다

졸업한 후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중학교 교원으로 일하였다. 나는 나의 짧은 교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내가 정식으로 수업을 가르치기 전에 중공은 대법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비록 나는 원래 학교의 연공장소를 떠났고 자료내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대법이 광범하게 전해져서 일찍부터 이미 전국 각지에 분포되었다. 나는 고향의 연공장소로부터 경문과 사존의 설법을 얻어올 수 있었다. 고향에 온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현에서 열린 한 차례 법회에 참가하여 한 단락의 연분을 맺었으며 이 부분은 다음 문장에서 서술할 것이다. 그때 순박한 사람들은 모두 법을 얻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곧 닥쳐올 피비린내나는 박해를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1999년 7월 19일 저녁에 나는 한 가지 꿈을 꾸었다. 꿈에 사존께서 매우 예의 없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질책하였다. 사존은 다만 나를 보시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날 저녁에 비바람이 불어 7.20 저녁에 대법의 보도원들이 불법으로 붙잡힌 것을 몰랐다. 단지 1999년 7월 20일 내가 연공장소에 갔더니 동수들은 나에게 대량으로 체포하는 소식을 알려주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북경에 갔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동수에게서 돈을 50원 빌려 《전법륜》 책을 한 권 갖고 차를 타고 북경에 갔다. 길에는 경찰들이 이미 파룬궁수련생이 청원하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나의 가방에는 《전법륜》 보배책이 한 권 있었다. 그리고 나의 가방 안에는 꽃천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나는 길을 가던 도중에 꽃천을 펼쳐 책을 쌌다. 경찰이 검사할 때 《전법륜》 보배책은 그것들의 눈꺼풀 아래에 있었는데 겁난을 하나 피했다. 후에 생각해보니 사실은 모두 사부님이 보호하고 가지해주신 것이었다.

북경에 도착한 후 나는 신체의 원인으로 신방부문에 처음엔 가지 않았다. 그냥 중남해 부근에서 돌았다. 나는 매우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이 중남해에서 돌아온 후 길에서 tv로 대법과 사존을 미친듯이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만 그날 오후에 암담한 하루를 보냈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후 출근하였다. 내가 가르친것은 고등학교 정치과목이었다. 학교안의 신문에는 모두 대법과 사존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에서 하늘땅을 뒤덮을 듯이 비방하고 날조하는 것을 도저히 대면할 수 없었다. 자주 혼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1999년 12월 중공의 대법에 대한 박해는 일보일보 승진하였다. 나는 도저히 수업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매일 사부님의 법을 배우고 매일 연공해야 하지만 나의 사존과 대법은 중공당국의 악독한 비방과 멸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단락의 수업을 강의한 후 각 반급의 수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혼자 북경에 갔다. 북경에서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동수들을 만났다. 당시 북경에 도착한 후 선후로 동수들과 교류하였다. 어떤 수련생은 이미 몇 번 붙잡혔다. 그러나 의지를 굳히지 않았다. 종래로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마음을 개변하지 않았다. 대법제자가 법을 수호하는 결심은 나에게 이미 오랫동안 감동을 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느 날 동수들과 교류하는 중에 모모는 특무라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법공부하지 않고 동수와 교류하지 않으며 일반적인 동수와 아주 다르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를 욕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선의적으로 그가 수련생들과 지낼 때 우리는 선념의 장으로 그로 하여금 명백히 알게 하였으며 더욱이 동수들의 정념의 장이 그를 감화시켜 더는 악을 행하지 않게 되길 바랬다. 내가 명혜문장을 볼 때 그는 내곁에 있었다. 당시 나는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나에게 감동을 주어 눈물을 흘리게 한 문장이 당신도 감동시키길 바란다. 나의 눈물이 아마 당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감동을 얻게 할 것이다.

동수들과 짧은 시간동안 교류한 후 나는 더이상 고려하지 않고 천안문광장으로 갔다. 우리 일행은 20명이었는데, 광장의 기념비 부근에서 제2장공법을 연공하였다. 그리고 다른 동수들도 “파룬따파연공장”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진선인은 틀린것이 없다. 우리가 연공하는 것은 착오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신앙의 기본권리를 요구한 것일 뿐이다. 정부의 파룬궁에 대한 보도는 진실을 떠나 먹칠한 보도이다. 파룬궁의 결백을 돌려달라. 우리 사존의 청백함을 되찾는 것이 당시 우리 모든 수련제자의 공동의 마음속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북경에 상방하러 온 후과를 알고 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 매개 사회의 일반적인 일원의 신분으로 같지 않은 직업계층의 하나의 대표로서 파룬궁수련생의 진정한 정신풍모였으며 tv에서처럼 요귀화한 선전처럼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려 하였다. 나는 천안문광장에서 불법으로 체포되어 차에 올라갈 때에 악경에게 한발 차였다. 내가 신분과 직업을 말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바로 자신의 수련과 직업으로 법을 실증하려 한다. 진정한 파룬궁수련생은 절대로 tv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 당시 북경에 주재한 성 판사처의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내가 나의 학력을 말하자 그들은 한 명의 대학생을 데리고 왔다. 내가 정치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하자 그들은 더욱 놀랐다. 당신이 어떻게 정치를 가르치는가? 정치를 가르치는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또 북경에 청원하러 온단 말인가? 나는 조용히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다.”

천안문에서 불법으로 잡혀 현지로 돌아온 후, 계속 불법으로 감금당하였다. 불법으로 감금당하는 기간에 어머니는 뒷문 거래로 나를 보러 간수소에 왔다. 마침 학교에서 온 나의 동료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나더러 대법을 포기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속으로 법을 암송하였다. 어머니가 권고해도 아무 효과가 없으니 한 방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꿇어앉았다. 내가 그녀를 부추겨 일으키자 어머니는 나의 입을 가로 째려는 듯 달려들었다. 내가 입으로 죄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수소에서 나온 후 중공악당 무리들과 협조하지 않자, 나는 면직당하였으며 나의 학생들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학교 영도들도 연루되어 사흘이 되도록 구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악당의 현위 서기도 성에 가서 검사받았다. 내가 받은 정황은 아직도 부단히 악화되었다. 그것은 내가 농촌출신이며 집안의 유일한 대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면직당한 사실을 접수할 수 없었으며 나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그녀는 재삼 나더러 교육위원에게 가서 머리를 숙일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최후의 통첩을 내렸다. 나더러 교육위원에게 결렬서와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하였다. 나는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가출하였다. 나는 저녁밥을 지은 후 돈을 좀 들고 쪽지를 하나 남기고 떠났다.

나는 차를 타고 동수의 집에 갔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동수의 집은 300여 리 떨어져있었다. 그녀의 집에 도차하자 밤 8시가 넘었다. 나는 동수의 집에서 사존의 경문 《심자명(心自明)》과 《원만을 향해 나가다(走向圆满)》를 보았다. 나는 기뻤다. 이것은 1999년 7.20 이후에 처음으로 사존의 경문을 보았던 것이다. 아마 나의 업력이 크기에 오직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법을 얻을 수 있다고 당시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가출하지 않으면 나는 사존의 경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엔 많은 일들이 보기엔 나쁜 것 같지만 많은 시기에 또 천기가 숨어 있다. 어머니는 나의 다른 학생들과 연락한 후 동수의 집주소를 물어서 나를 찾아오셨다. 당시 동수의 곤경도 좋지 않았다. 현지 파출소로부터 불법으로 감금당하였다. 오직 밀을 거둘 때에야 집에 돌아오게 하였으며 며칠 지난 후 또 불법으로 감금당하게 된다. 동수의 집에서 돌아간 후 어머니는 죽음으로 나를 핍박하였다. 나는 그때 발정념을 몰랐다. 단지 어머니가 사악에게 매우 엄격하게 조종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꿇어앉았으며 벽에 부딪치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으며 연하고 강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였다. 목적은 하나 뿐이었다. 나로 하여금 대법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였다. 가족에게 진상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나는 5일 간 단식하였다. 남동생은 오직 한 주일내에 내가 단식하는 것은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대법을 믿고 있다. 단식할 때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당시 단식하면서도 밥을 하고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지체하지 않았다. 매우 더울 때 일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자비로운 사존이 나를 고무하고 가지해주시는 것을 알았다.

국내외 대법제자들이 공동으로 진상을 이야기하여 반박해하면서 초보적으로 성과를 거둠에 따라 대법의 형세는 나날이 좋아졌다. 강씨 귀신을 두목으로 한 사악한 정치 깡패집단은 한쪽으로는 천안문자살분실위조사건을 제작하여 삽시간에 먹장구름을 드리웠으며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탄압은 극도로 사악하였으며 그 어떤 후과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날뛰었다. 전국은 또다시 들썩거렸다. 그러나 더욱 간고할수록 대법제자들이 더욱 잘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사적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힘이 닿는 범위내에서 대법진상을 이야기하였다. 그때 진상자료도 없었으며 자료내원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법에 대한 이해로, 수련하는 사람은 자살하고 분신하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학생에게 이야기하고 동료에게 이야기하였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였다. 후에는 자료내원이 있게 되었다. 계통적으로 사존의 설법을 공부한 후 마음속으로 밝아졌다.

그러나 집에서는 여전히 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도 모두 대법을 인정한다. 다만 중공의 폭정이 두려워 악당의 잔혹한 박해를 받을까봐 천방백계로 나를 저지하였다. 한번은 그들이 나의 가방을 들추었다. 가방안에서 진상자료 한부를 발견하였다. 또 나에게 통첩을 내렸다. 집에 남아있든지 아니면 영원히 이 집에 들어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간단히 행낭을 정리하여 또다시 가출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필로써 더욱 많이 누구를 질책하지 않겠다.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륜의 비극을 자아냈는가.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불효하는 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많은 때에 나는 마치 불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악당이 조성한 것이다. 중공이 만들어낸 적색테러와 그것의 엄밀히 사상을 조종하는 계통은 집이 아닌 집으로, 나라가 아닌 나라로 생령에 먹칠하였다. 나는 가출한 후 여전히 법공부하며 진상하였다. 회사의 동료에게 이야기하며 총경리에게 이야기하였다. 비록 그들의 접수하는 정도는 같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대법에 대해 경의와 이번 박해에 대해 청성한 인식을 표현하였다.

내가 두번째로 가출하였을 때 한 수련생이 번거로운 일에 부딪쳤다. 나는 매일 아침에 연공하고 법공부한다. 왕왕 내가 당일에 배운 법으로 동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후에 수련생은 나와 함께 잊지 못할 아주 아름다운 짧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수련생은 갓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녀는 그 가정으로부터 깊은 상해를 받았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반대되었다. 그녀의 시부모님들은 그녀를 학교에 고발하였으며 현지의 “610” 사무실에 고발하였다. 당시 동수의 학교`영도들은 그녀더러 학교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이 수상쩍어 동수더러 일이 없으면 돌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동수도 이렇게 학교 영도와 말하였다. 동수의 태도가 견결하자 마지막에 학교 영도들은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녀의 시부모님들이 그녀를 “610”과 학교에 고발하였다는 것이었다. 당시 “610”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시부모님들이 며느리를 고발하기 때문에 이 일은 시위원에 전해져서 시위원에서 조사해보니 이 사람은 아주 좋았다. 그래서 교육위원에 넘기자 교육위원은 권한 하에서 동수의 인사관계를 전근시켰다. 이때 나는 《정념으로 악행을 제지하라》에서 “대법제자가 현재 하는 일체는 모두 세상 사람과 중생을 구도하고 있으며, 모두 박해를 폭로하고 있고, 모두 박해를 제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악의 각종 박해 행위를 인정해서는 안 되며, 박해 중에서 사악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대법제자를 박해하게 해서는 더욱 안 된다.”를 보았다. 나의 마음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구세력의 동수에 대한 박해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마음속의 안개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나는 반드시 정념으로 수련생을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경황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동수에게 핸드폰이 없어서 나는 그녀와 연락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녀와 연락되지 않자 나는 그녀가 남겨놓은 전화연락 방식으로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그녀의 친구에게 갔는지 알아보았다. 나는 한 명 또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결국 실망하였다. 동수의 소식이 없었다. 생각밖에 며칠이 지나자 그녀는 정말로 돌아왔다. 알고보니 사실은 이러하였다. 그날 다른 사람더러 그 편지를 학교 영도에게 갖다주라고 한 후 그녀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보니 마땅치 않아서 그녀의 학교 영도들과 또 만났다. 만난 후 사실을 모두 명백하게 말하자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일하던 단위에 돌아가서 청가를 냈다. 수련생은 한 동료더러 그녀가 며칠 후에 돌아온다고 나에게 전달하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수련생을 도와주는 것을 제외하고 공작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대법을 원용하였다. 공작하는 중에서 어떤 때엔 법을 비방하는 문장을 보게 된다. 만약 내가 책임진 것이라면 직접 바꾸어버린다. 만약 내가 책임지는 일이 아니면 책임자를 찾아서 진상을 이야기하여 법을 박해하는 문장을 바꾸게 하였다. 최근까지 이런 문장은 거의 볼수 없다. 그러나 나는 책에서 당문화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매 한권의 책마다 나는 모두 매우 자세하게 검사한다. 오직 당문화의 그림자를 보면 삭제한다. 그것들로 하여금 발을 디딜 자리를 없게 한다. 그리고 두 번 정념으로 악당의 현수막 표어를 해체한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차를 타고 원래는 그곳에 가려 하지 않았는데, 차를 잘못 탔던 것이었다. 도착해보니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도착한 그곳은 악당의 표어가 크게 한 줄 있었다. 나는 즉시 발정념하여 표어 배후의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해체시켰다. 후에 우연히 그곳을 또 지나가게 되었는데 표어가 이미 상업광고로 변한 것을 발견하였다. 또 한번은 외식하게 되었다. 평소에 그 길을 아주 적게 걸었다. 그러나 그날 어쩐 일인지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대법을 비방하는 사악한 현수막이 불쑥 눈에 띄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발정념하여 사악을 제거하였다. 시간이 있으면 발하였다. 현수막소재지의 부근에 파출소가 있기에 다음번에 그 길을 걸을 때에 다시는 그 사악한 현수막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정념은 위력이 있다.

후에 나와 이 수련생이 합작한 적이 있었다.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동수 갑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동수 갑은 내가 1999년 이후에 고향의 법회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동수에게 200여 권의 보배책인 《전법륜》을 가져다 주었다. 동수 갑은 매우 엄혹하게 박해받았으며 자신의 고향에서 있을 수 없게 되어 타향으로 나왔으며 타향에서도 있지 못하였다. 우리는 동수 갑을 타당하게 안치하였다. 어떤 수련생은 돈을 내고 어떤 수련생은 힘을 내고 어떤 수련생은 주숙을 제공하였다. 당시 정말로 모두가 하나의 정체를 이룬 느낌이었다. 생각한 것이라면 사악이 수련생을 박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련생이 자료점을 설립한 이유로 후에 불법으로 체포되었다. 현재 수련생은 석가장 여자감옥에서 박해받고 있다. 동수와 함께 있던 동수 갑이 피해가자 후에 또 불법으로 체포되어 판결받았다. 나는 이 일에 연루되어 출근할 때 국보로부터 납치당하여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겪었다.

납치당한 후 나에게 다른 동수들의 연락방식이 있기에 당시 두 개의 핸드폰은 수색당하였으며 “610”에 납치당한 그날 저녁에 나는 모든 핸드폰번호 (그날 저녁에 그것들은 핸드폰을 모두 나에게 돌려주었다.)를 모두 삭제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의 핸드폰에 손을 썼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다른 동수들의 안전을 위하여 나의 핸드폰 카드를 버렸다. 나는 그것이 번호를 눌러 하나하나 배열하여 검사할까봐 근심되었다. 외계와 연락을 끊고 있을 때 나는 독사가 나의 손에 있는 느낌이 들었으며 장사가 팔이 끊어지는 듯한 비장함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에게 연루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더러 가도록 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나를 추종해올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에게서 그것들이 가지려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에 가면 가능하게 그것들도 어디로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지 않았다. 그후에 동수들이 불법으로 판결받고 감시당하는 절망적인 일들만 따라왔다. 나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무거운 비애를 느꼈다. 내가 자신을 깊이 고독속에 빠지게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외계의 일체와 연락을 단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납치한 사람은 국보이기에 그것들이 어떤 비열한 수단으로 사람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악을 행하는 데는 최저한계가 없는 것이다. 나는 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존의 교훈은 아직 마음속에 있다. 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느꼈으며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갔다.

3. 진상을 밝혀 중생을 구도하다

2006년 7월의 어느 날, 나는 공작이 바쁘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대법 진상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결과 이 일념으로 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침에 외출하려 하는데 문옆에 있는 신궤짝에 하나의 플라스틱 주문지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명혜주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내 눈이 잘못되어서 잘못 보았다고 여겼다. 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세하게 눈을 비비고 보니 잘못 보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꿈을 꾸지 않았다는 걸 알고 급히 주간을 나의 가방에 넣었다. 외출한 후 또 층계에서 한 부의 명혜주간을 주웠다. 나는 기뻐 어쩔줄 몰랐다. 이 신문을 자세히 몇 번 본 후 명혜주간이 제공한 방법대로 친구에게 나대신 해외 이메일을 신청하도록 하였으며 나는 또 신문에 제시한 메일주소대로 발신하였다. 이렇게 되어 인터넷봉쇄를 뚫는 세계통을 얻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하에 나는 또 설치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명혜망 사이트를 열자 나는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나는 사존의 제남설법을 다운로드한 후 이어폰을 걸고 법을 들으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나는 연고없이 통곡할 수 없다. 생각해보니 불법으로 박해받는 이 몇 년 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청원하였을 때 불법적으로 면직당하였을 때, 사랑하는 학생들을 떠났을 때,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묵묵히 먼 타향으로 떠나가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천안문광장에서 연공하여 사악에게 조폭당할 때, 비록 날씨가 춥고 땅이 얼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가족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가출했을 때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국보에게 불법으로 시달릴 때 불법으로 심문당하며 강박하여 나를 꿇어앉게 했을 때, 나를 핍박하여 비밀번호와 자료내원을 물었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동수,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진 후 번거로운 시내에서 고독하고 처량할 때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세간의 고생은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사존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마음이 뜨거워지며 더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으며 눈물이 흘러 내렸다. 비록 크게 울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솟아나는 눈물이었다. 옷이 한 폭 한 폭씩 젖었다. 사존의 자비하심은 나의 심령속의 아픔을 용화시켰으며 내가 7년 간 비바람속에서 겪은 피곤함을 위로해주셨다. 사존의 모든 설법을 다운로드한 후 나는 갈증을 느낀 사람처럼 밤에 낮을 이어 책을 보며 법공부하였다. 출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퇴근한 후 모든 시간을 법공부하는 데 사용하였다. 법공부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mp3를 샀다. 전자책을 볼 수 있으며 사존의 설법녹음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일부 천국악단의 연주곡도 다운로드하였다.

계통적으로 사존의 설법을 배운 후 나는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고하였다. 공작관계로 인해 나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삼퇴를 권고하고 진상을 하는데 있어서 편리하였다. 현재 몇 가지 예만 들겠다. 처음 컴퓨터를 접촉할 때 나는 아무런 지식도 몰랐다. 컴퓨터에 qq가 설치되어 있었다. 컴퓨터는 여러 번 “트로이목마 바이러스”에 중독되었으며 몇 번이나 번호를 도난당하였다. 위험한 일이라면 그때 나는 이런 컴퓨터에서 대법사이트에 올랐다. 어떤 때에는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시도한 후 그래도 인터넷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번은 삼퇴를 권고하는데 qq에서였다. 친구가 탈퇴하려 하면서 qq에서 악당이 나쁘다는 것을 말하였다. 나는 qq에서 그의 말을 복제하여 악당의 사이트에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우습게 여겨진다. 정말 모르는 자는 무서운 것이 없다. 물론 진정한 정황하에서는 사존의 보호를 떠날 수 없다. 후에 인터넷 봉쇄돌파 소프트웨어는 올라가지 못하였다. 단지 발정념을 할줄 밖에 몰랐다. 컴퓨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근본상 생각하지 않았다.

한 동수의 도움하에 다운로드 받고 삭제하거나 하며 시스템의 누락을 보충하였다. 방화벽을 설치하였고 이후에 인터넷을 하는데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동료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놀러 오셨다. 우리는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나도 삼퇴를 권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떼야 할지 몰랐다. 마침 노인은 이화원에서 돌아오셔서 고대 건축과 문화를 이야기하였다. 나는 악당이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신운예술단이 순정문화를 발양하고 있는데로 화제를 전이하였다. 방금 말을 하는데 노인은 식사하러 갔다. 일은 이렇게 여기에서 놓게 되었다. 며칠 지난 후 나는 휴식하였다. 마침 노인이 있었다. 나는 노인과 함께 일상생활을 이야기하였다. 신운예술단의 공연으로부터 악당이 정권을 빼앗은 후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것 및 문화대혁명 때 종교를 훼멸하던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노인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었기에 내 말에 매우 동감을 표시하였다. 나는 천천히 “6.4”와 파룬궁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노인은 조금도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노인과 대략 반 나절 이야기하자 노인은 매우 통쾌하게 동의하였다. 나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갔다. 내가 사이트에서 노인에게 삼퇴성명을 발표하고 주숙처로 돌아오자 노인은 이튿날에 곧 떠나려 하였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삼퇴한 후에야 양어머님은 길을 떠나시구나. 노인은 천리를 마다하고 여기까지 오셔서 바로 진상을 들으러 오신 것이었다. 삼퇴를 위해 오셨구나. 세인은 모두 대법을 위해 왔다. 세인은 모두 구도받으러 온 것이다.

면담으로 진상하여 삼퇴를 권고하는 것을 제외하고 나는 진상편지를 썼다. 당시 명혜망사이트에서 박해소식이 아주 많은 것을 보았다. 매일 볼 수 있었다. 나는 일부 박해가 엄중한 소식을 수집하여 명혜주간 혹은 명혜책자 혹은 기타 진상자료를 인쇄하였다. 그들의 부동한 직업에 따라 부동한 자료를 배포하였다. 만약 소년이면 명혜주간의 청소년판을 배포하고 만약 도시사람들이면 도시녹조판의 명혜주간을 배포하였다. 만약 청년학생이면 그들에게 국내외 대학관찰을 준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에 견주어 자료를 배포한다. 후에 느꼈는데 편지를 쓰는 것이 좀 늦는 것 같아서 나는 핸드폰을 하나 샀다. 핸드폰을 이용하여 메시지를 보냈다. 매일 그렇게 많은 박해소식을 매 하나의 연락전화로 나는 모두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나쁜 사람들을 도와 나쁜 일을 하지 말도록 알려주고 싶었다. 핸드폰메시지는 일반적으로 선을 권고하는 가사를 보낸다. “구평”의 마지막 가사도 있으며 “진상을 찾다”라는 가사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다”, “부단히 탈당하는 열풍이 일다”, “천안문광장”, “알려주세요” 등 한 번에 열 몇 개씩 보냈다. 보낸 후 즉시 전지를 꺼낸 후 한 단락 시간이 지난 후에 또 배포한다.

나는 또 공작기회를 빌어 이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수집하였다. 일반적으로 전화번호는 명혜망사이트에 보낸다. 이메일주소도 명혜망에 보내는 것이 있다. 한번은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인터넷봉쇄를 돌파하는 소프트웨어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컴퓨터에 바이러스 방지 프로그램이 국산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국외의 바이러스 방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건의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메일에는 자주 대법 진상자료를 받게 된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그녀에게 주문하여준 것이었다. 진상자료를 주문할 때 한 가지 일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때 전화번호와 이메일이 있는 광고를 보면 나는 가져온다. 퇴근할 때 이메일을 수집하여 명혜망에 보낸다. 어느날 나는 몇 사람에게 주문한 후 그 몇사람의 사진을 보았다. 갑자기 이 몇 사람은 마치 살아있는 듯 하였다. 그들은 얼굴이 매우 생동하게 나의 눈앞에 나타났는데 눈에는 감격이 넘쳤다. 나는 알고 있다. 진상자료는 중생이 모두 찾고 있는 호신부이다. 내가 명혜사이트를 볼 때 한 지역에 불법으로 심문당한 대법제자가 있었다. 아주 많은 수련생이 가서 들었다. 진상을 알지 못하는 한 경찰이 말하였다. 당신들 파룬궁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하루 빨리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불법적인 박해가 중지되기를 바란다. 최대한 빨리 더욱 많은 중생이 진상을 알고 악당의 거짓말과 기편에 속아 넘어가지 말도록 해야 한다. 나도 화폐를 사용하여 진상을 광범하게 전파하였다. 나는 일반적으로 1원, 5원, 10원, 20원짜리 지폐에 진상내용을 쓴다.

진상자료는 대부분이 모두 명혜망에서 찾은 것이다. 탈당전화도 있고 최신 탈당인수, 동태망사이트 주소, 구평과 삼퇴인 수, 진선인은 좋다. 그리고 대법이 세계에 홍전되는 소식 등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탈퇴를 권고하는 대련(교정주-한 쌍의 대구(對句)의 글귀를 종이나 천에 쓰거나 대나무·나무·기둥 따위에 새긴 대구. 특히 설날에 쓰이는 것을 ‘春联(儿)’이라고 함)도 있다. 그러나 현재 어떤 대련의 내용은 잊어버렸다. 그때 한편으로는 명혜망을 보고 한편으로는 종이화폐에 쓴다. 자신이 창작한 글도 있고 직접 다른 수련생이 쓴 구절들도 있다. 우리가 한 일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의 진상을 밝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지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공간과 사고방식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대법이 홍전할 때 살아오면서 또 행운스럽게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만고에도 만나기 힘든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사존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역사적 책임과 사전의 서약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인터넷봉쇄를 돌파한 후 명혜망사이트 보도에서 수련생이 매우 엄혹하게 박해당한 사실을 보고 자신이 법을 배워 께달은 층차에서 문장을 써내어 동수에게 일부 건의를 제기하였다. 일부 문장도 잇달아 명혜망에서 발표되었다. 문장을 써도 좋고 건의를 제기해도 좋다. 출발점은 오직 한 가지이다. 사악의 동수에 대한 박해를 감소시키며 정념으로 사악의 동수에 대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이며 박해받는 수련생을 위하여 발정념하는 것이다. 나는 매일 정각에 수련생을 위해 발정념하는 외에 하루는 단위에 출근하지 않았다. 나는 북경여자노동교양소 부근에 가서 근거리발정념을 하였다. 거기에는 불법으로 감금된 나의 좋은 수련생이 있다. 사존의 경문 《사악을 철저히 해체시키자》가 발표된 후 나는 한 편의 문장을 써서 명혜망에 발표하였다. 문장에서는 조건이 있는 수련생은 감옥과 노동교양소 부근에 가서 근거리발정념을 하여 사악의 동수에 대한 박해를 감소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나는 평소에 발정념할 때 북경여자감옥, 북경여자노동교양소, 북경단하노동교양소, 노동교야파견소를 정하였다. 그것은 동수의 문장에서 그곳이 극히 사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친구에게 진상을 이야기하고 삼퇴를 권고할 때 식사하는 중에 한 사람이 소찬을 먹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진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만났으며 다른 사람도 있는 것을 고려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아마 일생에 우리는 단지 한번만 만날지도 모른다. 이튿날 친구는 나에게 그 사람의 어머님이 파룬궁수련생이라고 하였다. 말할 때 금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후에 또 계속 친구네 집에 가서 몇 명의 연분있는 사람을 권고하여 탈퇴시켰다. 소찬을 먹는 친구도 차츰차츰 익숙하게 되어서 파룬궁 진상도 비교적 많이 이야기하였다. 당시 신운예술단의 공연성황이 비교적 많았다. 소찬을 먹는 이 친구는 대법에 찬동하였고, 그녀의 형제자매들도 기본상 모두 찬동하였다. 집에는 오직 형님만 삼퇴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탈퇴하였다. 그녀는 이전에 《전법륜》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법수련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비하신 사존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들에게 합작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번 합작중에서 그녀는 일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대로 자신이 깨달은 층차에서 해답해주었다. 더욱 많은 때에 그녀가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전법륜》으로 관련 내용을 대답하였다.

그때 한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친구는 수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5월 13일, 나는 mp4를 사서 그녀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사존이 제남에서 하신 설법녹음과 다른 일부 대법자료도 있었다. 대법 노래, 천국악단 연주곡 그리고 신운예술단의 공연곡 등이 있었다. 해놓은 다음 나는 다른 친구더러 그녀에게 갖다주라고 하였다. 그녀가 mp4의 성능을 익숙히 잘 알게된 후 이미 사존의 설법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재삼 그녀에게 들을려면 한꺼번에 모두 들어야 한다고 부탁하였다. 중간에 정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많은 미혹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가 대법수련에 들어온 데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기뻤다. 현재 이 수련생은 상태가 매우 좋다. 법을 얻은 후 그녀는 공작단위를 떠났다. 나는 사존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대법을 위해 왔다.”

문장작성:2008년 5월 6일
원고발표:2008년 5월 7일
문장수정:2008년 5월 7일 09:29:46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5/7/1779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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