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변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4월 30일] 명혜망 2008년 3월 24일 문장 《억지로 짜 맞추는 식의 교류회는 진정으로 제고될 수 없다.》를 본 이후 원래 이 문장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와 같은 생각을 이미 써낸 수련생이 있었기에 이 방면에 대한 문장을 더 쓸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 방면에 대한 문장을 쓰려고 했던 것은 우리 지방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비교적 엄중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같이 억지로 짜 맞추는 식으로 사부님의 어느 한 단락의 법을 들고 오거나, 혹은 자신이 법 중에서 깨달은 어느 한 단락의 이치로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역 동수들이 함께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엄중한 간격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그 동수분이 쓴 것과 같이, 서로 교류할 때 우리 지역에 있는 일부 구체적인 현상을 말하려고 하면 누가 즉시 “동수 몸에 검은 물건을 던지지 말라! 누락이 있다 해도 구세력은 박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한다. “당신은 안으로 찾아보라”, ” 당신은 동수의 훌륭한 면을 봐야 한다.” 등의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말을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부동한 장소에서 동수끼리 서로 교류할 때 서로 쳐다보면서 감히 교류하지 못한다. 또 우리 정체에 엄격하게 존재하는 부족한 점을 보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했다가는 다른 사람에게서 “안으로 찾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면을 볼 줄 모른다.”는 모자를 쓰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이런 현상 역시 일종 사의 표현이다.
사실 이같이 깨달은 법은, 없는 곳에서 있는 데로, 유형적인 것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동수들이 이처럼 바르지 않는 것을 자양하는데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를 건드리기만 하면 즉각 인성의 부적인 일면으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수련생을 제압하고 배척한다. 이러한 구우주 중의 위사 한 일면과 당 문화중의 사유 방식이 오늘까지도 우리 일부 동수들을 엄중하게 교란하고, 동수간의 배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취중”(取中)과 ” 원용”이기에 어느 극단으로 가든 모두 옳지 않는 것이다.
《캐나다 법회 설법》중에 하나의 해법이 있다.
문 : 수련을 아주 잘한 한 사람이 유위도 무위 속에 있다고 한마디 말하였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부 : 이것이 바로 교란 받은 것이 아닌가? 대법에서 내가 한 말이 아니면 당신은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 설령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제자들이 말한 것도 아마 그가 자신의 부동한 상태에서 부동한 경지에서 깨달은 것이며 혹은 맞을 수도 있고 혹은 틀릴 수도 있으므로 상관하지 말라. 내가 어떻게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가서 하라. 마음과 생각을 법에 쓰고 남이 말한 무엇에 집착하지 말라. ”
그러므로 우리 동수 간에 무엇을 깨우쳤다 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사부님의 법과 같이 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법”이지만 우리가 한 말은 “법” 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부터 법을 수호해야 하며,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 환경 속으로 더는 사부님의 법 중의 “법”이 아닌 이런 것을 끌어 들이지 말아야 한다. 엄격하게 법을 스승으로 삼고 자신을 잘 수련하여 대법의 길을 바르게 걸어야 한다.
바르지 못한 곳이 있다면 동수께서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4월 3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4/30/1775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