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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속에서 조사 행 (风雨兼程助师行)

글; 대륙대법제자 우영

【명혜망2008년04월30일】우리는 사악의 박해와 피비린내 나는 세월 속에서 오늘도 여전히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하에 당당하게 사부님을 도와 정법의 거센 흐름 속에서 행복하게 정진하며 승화하고 있다.

나는 올해 41세이다. 95년 12월 23일 3개월간 냉정하게 판단하여 명백하게 수련의 길을 선택했다. 일찍 법을 얻었기에 당연히 우리 집은 연공 장소가 되었다. 96년 여름, 현지에서 제1차 심득교류회를 개최하였다. 내가 썼던《나는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체험 문장에서 이렇게 썼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상 길이 얼마나 멀든지 얼마나 간고 하든지 간에 나는 꼭 후회하지 않고 걸어 갈 것이다.” 그때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정법이 오늘까지 지나서야 나는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줄곧 시초의 서언을 위해 노력했으며 어떤 곤란 속에서도 지금까지 나의 선택을 포기한 적이 없다.

99년 ”7.20”, 나는 성정부에 청원하러 갔다가 8월에 불법으로 감금되었다. 그때 나는 법리상에서 똑똑히 깨닫지 못해 비록 법을 위해 일체를 희생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만법에 부합되는 줄 몰랐다. 줄곧 2000년 말, 외지에서 온 두 동수와 북경에서 법을 실증하던 심득을 교류했으며 서양수련생이 쓴《마성을 제거하다》는 문장을 읽고나서야 나는 철저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걸은 굽은 길은 현지 동수의 제고에 보충할 수 없는 손실을 가져다주었으며, 나 자신의 수련의 길에ㅛ서 영원히 깊은 고통과 후회로 남겨졌다. 2000년 12월 말, 북경에 법을 실증하러 가기로 결정하고 현지 연공 장소에는 열 몇 명만 남았다. 북경으로는 아홉 명이 떠났다. 천안문으로 가는 길에 마음속에는 오직 두려움이 없다면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 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没有了怕,也就不存在叫你怕的因素了

”마음 하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만 가지 움직임을 제지시킬 수 있다“一个心不动,能制万动”(《정진요지 2》〈去掉最后的执著〉)아직 광장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함께 동행하던 두 명의 수련생은 순찰하고 있던 경찰한테 불려갔다. 이어 땅에 넘어뜨리더니…… 함께 갔던 두 수련생은 서쪽 켠의 기념비석 앞으로 다가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나는 바로 법을 실증하기 위해 온 것이다. 나는 솜저고리 속에서 현수막을 꺼내어 들고 천만년동안 기다려온 “파룬따파 하오 !” 를 외쳤다.

북경에 머물러 있는 9일동안 나는 천안문에 네 번 갔다. 처음 두 번은 현수막을 가방에 숨겨두었지만 후에는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네 번째 갈 때에는 웃옷 호주머니에 넣고 마치 사람이 없듯이 게양식 하는 곳에 가서 현수막을 들었다. 그런데 글자가 거꾸로 들려 있었지만 발견한 후 당황하지 않고 다시 바로 들었다. 정말 마치 사부님의 말씀처럼 두려움이 없다면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 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没有了怕,也就不存在叫你怕的因素了”였다. 사악이 나에게 네 차례나 협박해도 나의 사상 속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았으며 붙잡히거나 감금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매번 나에게 심문하는 경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서 그 어떤 쓸데없는 걸 알려고 애쓰지 말라(당신 그들은 나를 통하여 나의 동수들의 주소와 이름을 알려고 하였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당신이 나를 놓아주면 나는 꼭 또다시 천안문에 갈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천안문 파출소 복도에서 만난 6,7세 되는 사내아이를 데려온 남자동수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당시 어린 사내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로 사부님의 “논어”를 외웠으며 그 시각 나는 경찰이 나에게 심문하면 진실한 말을 할 것인가 곤혹스러웠는데 이 수련생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다. 나는 마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을 보고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당신은 동으로 가야 한다. 이 한 마디 말은 나를 동반하여 장기간 법을 실증하는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나는 악명이 높은 한 노동 교양소에 불법으로 16개월간 감금되었으며 그 기간에 사악이 나의 정신과 육체에 대한 각종 학대를 해 매 일분간이 마치 일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부님께 대한 견정한 신념에 의거하여 사악이 나에게 가하는 불법감금과 박해를 성공적으로 부정하고 사악한 자가 밤낮으로 둘러싸고 공격해도 나는 시간을 내어《최후의 집착을 버려라》와 《홍음》 도중〈道中〉

보고도 보지 못한 듯하니
미혹되지 않노라
듣고도 듣지 못한 듯하니
마음이 어지럽지 않노라

“视而不见 不迷不惑 听而不闻 难乱其心”를 외웠다.

사악이 독하게 때릴 때면 끊임없이 외친다. 사악을 질식시키자! 잔혹한 음식주입에 대하여 나는 사부님의 《홍음》위덕 중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거니
진선인(眞善忍)이 마음속에 있네
세상에 대나한을
귀신도 굉장히 두려워하네

“大法不离身 心存真善忍 世间大罗汉 神鬼惧十分”이 생각났다.

사악한 자가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할 때 나는 나서서 제지하였다. 만약 가만 있다면 나는 그것이 대법제자로서 치욕이라고 느꼈다. 새로 온 수련생에게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한 이야기를 했더니 사악한 자에게 뺨을 맞았으며 사오한 자의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폭로하자 그들은 나에게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시종 모든 사람에게 내가 혹형박해를 받았던 진상을 알려주는 것을 견지했다. 나는 경찰 (管教)에게 편지를 썼고, 소위 심리전문가에게 편지를 썼으며, 노동교양소의 지도원을 청하여 성영도에게 자신이 박해받은 진상을 반영했다. 대장과 소장을 찾아 자신이 박해받은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얼마나 강한 정념 (正念)이 있으면 얼마나 큰 위력(威力)이 있는 것이다. “有多强的正念,有多大的威力。”(《精進要旨二》〈也三言两语〉)

한 번은 천여명이 악당대회를 칭송하는 대회에서 나는 원장을 불렀다. 그는 감히 나를 정시하지 못하고 풀이죽어 주석대를 향해 걸어갔다. 이때 모든 경찰은 모두 당황하여 다시는 나에게 프로그램을 보라고 핍박하지 않았고 나를 속여서 다른 방에서 원장을 기다리게 했다. 내가 세 번째로 거절하고 떠나자 사악이 욱 몰려와 나를 회의장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만회하라고 떠벌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치가 정당하고 언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위협하여 기한을 가하고 판결하는 것은 무섭지 않다. 회의 후 소장인 가성성은 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당신을 도와 될수록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결과 한주일 후 나는 풀려나와 집에 돌아왔다.

출옥한 후 신체의 원인으로, 그리고 사악이 가족에게 협박을 해 집사람은 반년동안 문을 잠그고 다른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집사람은 내가 동수와 또다시 접촉하여 사악에게 박해 당할까봐 걱정했다. 수련생이 도와주고 일깨워줘 8개월 후에야 나는 진정으로 현지법을 실증하는 노정에 들어섰다. 법공부와 실천을 통해 사악이 장기적인 박해로 동수와 간격을 둔 것을 극복해갔다. 04년 현지 수련생은 매 주 월요일마다 단체로 법공부하고 교류하게 되었다. 이것은 현지 수련생이 수련의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걸어가도록 일정한 촉진작용을 일으켰다.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추진함에 따라 자료점이 도처에서 꽃이 피도록 하는 것은 현지 매개 동수들은 반드시 정면적으로 대해야 할 일이다. 법리상에서 청성하게 인식하는 것은 사부님이 천백년이래 우리를 육성한 목적이며 오늘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데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정법은 이미 이 일보에까지 걸어왔다. 사부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대법이 나를 수요한다면 나는 오직 무조건적으로 원용하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 곤란이라면 자신이 관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이런 일념을 가졌다. 된다고 해도 되고 안 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실천중에서 행할 때에는 사부님의 태산에 오르다 《登泰山》중의 몇 구절이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난다.

나는 호미를 사용하거나 마우스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하든 언제나 왼손잡이였다. 처음으로 마우스를 잡았을 때 왼손으로 들었다. 수련생은 나에게 오른손을 쓰라고 일깨워주었다. 나는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당시 나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느끼지 못했다.) 처음 정식으로 인터넷을 할 때 수련생은 나에게 간단하게 몇 가지 절차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에 나보고 연습하라고 하였다. 점심무렵 그가 퇴근하면 그의 집에 오라고 했다. 점심 때가 되어도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컴퓨터를 들고 그의 집 아래에서 돌아다니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수련하면서 지금까지 이런 난관은 만나 적이 없다! 후에 나는 할 수 없이 층집에 올라갔다. 수련생은 나보고 어떤 순서를 모르겠는지 물었다. 나는 머리가 벌써 공백이 되었다. 자신을 둔하다고 말할까봐 두려워할 수록 나는 더욱 기억하지 못했다. 수련생이 하나씩, 두개씩 가르쳐주면 그나마 괜찮았다. 네 번째 다섯 번째에 이르자 나는 또 눈앞이 캄캄하였다. 당시의 심정은 지금까지도 언어로 똑똑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아마 나같은 경험을 한 동수만이 그 고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당시 가장 쉽지 않은 일념이 있었다. 나는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아무리 어렵고 고생스러워도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렇게 가끔씩 전화로 인터넷을 하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인터넷카드 등 여러 가지 난관을 거쳐 끝내 성공적으로 인터넷을 할 수 있고 다운하는 것을 배웠다. 현재 매 번 자유문의 나뭇가지를 물은 비둘기를 보면 언제나 특별한 한 가지 느낌이 든다.

수련이 승화됨에 따라 우리는 각 방면에서 모두 점차 성숙되고 있다. 비록 아직 컴퓨터 작동의 많은 기술을 돌파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독립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회고해 보면 문득, 어떤 관이나 어떤 난이나 이곳에서는 하나의 산이지만 건너간 후에 다시 보면 단지 한 장의 종이 일 뿐이라고, 모든 장애는 사실 모두 사람 마음인 것이다.

3년동안 어떤 때엔 바빠서 해결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일하는 속에 빠져 들어간다. 이것은 이미 수련을 벗어난 것이다. 많은 동수들로 말하면 이러한 한도를 잘 장악하는 게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오직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워주고 법공부를 많이 하고 실제적으로 수련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는아직 사회와 가정의 관계를 잘 평형시켜야 하며 책임이 매우 많고 매우 크다.

비바람 속에서,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몇 년간 수련의 길을 걸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기쁘고 안심되는 게 있다면 이것은 사부님께서 줄곧 많이 보호해 주셨고 무척 아껴 주시고 고생스럽게 구도하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남지 않은 수련의 기연을 배로 소중히 여기며 자신이 해야 할 일체를 바르게 하려 한다. 다시 한 번 사부님의 호은 불당과 자비로운 고도에 감사 드린다!

师恩重

一路艰辛一路苦,
不堪回首证法路;
几番风雨几番阻,
方明师徒恩深重。

문장작성:2008년04월29일
원고발표:2008년04월30일
문장갱신:2008년04월30일 03:44:22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4/30/17753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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