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4.25” 진상의 질문과 답 (사진)

【명혜망 2008년 4월 27일】 파룬따파(法輪大法)가 1992년에 전해진 후 수련인의 숫자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나 1999년 7월에는 1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수련하고 있었다. 1995년 5월, 이홍지 선생님은 프랑스와 스웨덴의 요청을 받고 설법하셨으며, 해외에서의 대법홍전에 서막을 열어 놓았다. 99년 7월부터 시작된 중국대륙에서의 연속 8년 간의 공산사악의 멸절식 박해속에서 파룬궁은 쓰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으로 신속히 전파되어 80여 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주요저작인 《전법륜》은 이미 3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발행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각 나라의 인민으로 하여금 중국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더욱 추구하도록 하였으며 중국으로 하여금 거대한 국제적 영예를 갖도록 하였다. 2007년 말까지 해외 각국 정부 및 각계로부터 2천 8백여 개의 상장과 지지서한을 받았다. 또한 이홍지 선생님은 2000년부터 연속 네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이것은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민족과 국경과 시공을 초월한 거대한 위덕과 감화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은 “4.25”에 파룬궁이 중남해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사건으로 인해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진실한 정황을 알지 못하여 거짓말에 기만당한 것이다. 실제로 중공과 강택민은 파룬궁이 무엇인지 분명히 잘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 파룬궁은 너무나 바른 것이었기에, 중공의 본질 “거짓, 악, 투쟁”이 “진, 선, 인”과 공존할 수 없어서 꼭 소멸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의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세밀하게 모함한 사전에 모의된 행동이었다. “4.25”가 발생하기 3~4년 전, 강씨 집단은 파룬궁을 제재하기 위해 여러 번이나 포위하고 토벌하였으며 부단히 음모계책을 꾸몄는데, 연기할수록 더욱 강렬하였다. 천진사건을 사전에 모의하고 또 비밀리에 중남해사건을 연출하였다. 비록 당시 주용기 총리는 2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평화적으로 청원한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였으나 강씨집단은 마음에 내키지 않아 계속 음모계책을 꾸며내어 끝내 “7.20”에 암암리에 꾸민 음모를 공개하여 미친듯이 탄압하였다. “4.25”는 절대로 중공이 파룬궁을 멸절하려 한 이유가 아니며 파룬궁탄압의 시작도 아니며 오직 그들이 음모계책을 오랫동안 사전에 모의한 중요한 한 가지 절차였을 뿐이다.

문 : 무엇이 “4.25”인가?

9년전, 즉 1999년 4월 25일, 만 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북경에 가서 평화적으로 청원하였다. 중공 통치하에서 민중들이 대규모로 평화적으로 청원하는 이러한 현상은 세계를 진동시켰으며 중국 역사상 기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4.25” 사건이다. 파룬궁의 “4.25”사건은 돌발사건이 아니며 강택민이 떠들어대던 그런 정부요지를 포위한 정치적 시위가 아니었다. 아래는 이 일의 전후 일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간단히 서술한 것이다. 희망하건대 “4.25” 사건의 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참고하여 읽어보기 바란다.

문 : 왜 문제해결을 받으러 갔는가?
답 : 1999년 4월 11일, 허쭤슈는 천진교육학원 “청소년 과학기술박람회” 잡지에서 “청소년이 기공을 연마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문장에서는 사실을 날조하고 비방하며 모함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파룬궁을 질책하였고 파룬궁수련생의 형상을 추하게 묘사하였으며 파룬궁창시자를 비방하였다. 이 문장이 천진에서 발표된 후 천진의 일부 파룬궁수련생들은 유관 부문을 향해 사실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잡지의 편집부와 교섭하여 이 문장의 악영향을 제거하기 바랐다. 그리하여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일부 파룬궁 수련생들은 천진교육학원 및 기타 관련 기구에 실제정황을 반영하였다.

문 : 왜 중앙에 문제를 해결 받으러 갔는가?
답 : 99년 4월 23일 ~ 24일 이틀 동안, 천진시 공안국은 경찰을 불러서 정황을 반영하러 온 파룬궁수련생들을 구타하여 파룬궁수련생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게 하였으며 45명의 사람들이 붙잡혔다. 파룬궁수련생들이 사람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천진시 정부에서 소식을 들은 공안부도 이 사건에 참여하였다. 만약 북경으로부터의 권한위임이 없다면 붙잡혀간 파룬궁수련생들을 석방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천진공안국은 파룬궁수련생에게 건의하였다. “당신들은 북경에 가라, 북경에 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박해의 엄중성은 파룬궁수련생의 주목을 끌었다. 각지의 파룬궁수련생은 중앙정부에 대한 신임과 기대를 갖고 잇달아 자원적으로 문제해결을 하러 가서 국무원 청원소의 길을 거쳐 “천진사건”의 공평한 해결방안을 찾으려 하였다. 파룬궁을 박해한 것은 1999년에 시작되었다. 1996년 6월에 중국선전부에서는 각급에 파룬궁을 비판할 것을 지시하고 선전하였다. 광명일보는 파룬궁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신물출판사에서는 파룬궁서적을 출판하고 발행하고 판매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안부는 연속 2년 동안 봉건미신과 “비과학”적이란 모자를 덮어씌어 파룬궁을 조사하였고 사람을 파견하여 “내부에 들어가서” 감시하였다. 허쭤슈는 북경tv에서 파룬궁을 공격하였다. 파룬궁수련생들은 부단히 중앙과 지역의 각 영도에게 편지를 띄워 파룬궁은 나라와 국민에게 유리하며 인민의 심신건강에도 유리한 것이라는 진실한 정황을 반영하였다. 1999년 4월11일, 허쭤슈는 천진교육학원의 “청소년과학기술박람” 문장을 발표하여 파룬궁을 비방하였다. 천진의 일부 파룬궁수련생은 유관 방면에 사실의 진상을 밝히고 천진의 경찰이 사람을 붙잡는 것은 박해를 진일보로 승급시켰다.

문 : 청원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은 어떤 의견을 반영하였는가?
답 : 파룬궁수련생은 중앙영도에게 연공한 후 신체변화와 진선인을 수련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좋게 변한 사실을 말하여 영도들로 하여금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요해하게 하고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사람의 도덕을 반등하게 하였으며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라와 국민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문 : 청원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중남해를 포위공격한 것인가?
답 : 1999년 4월 25일, 만 명이 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연속으로 북경의 “푸유쩨” 부근에 집합하였다. 사람 숫자가 많았지만 사람들은 매우 조용하고 질서정연하였다.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들도 이때에는 할일이 없어서 이야기만 하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하게 청원하는 군중대오


한쪽에서 잡담하는 경찰들

중남해에 인접한 “서안문 대거리”는 당시 국무원청원국 소재지였다. 중국에서 청원제도를 설립한 취지는 군중들의 질고에, 아래에서 청원하면 위에서 해결해준다는 것이었다. 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직접 국가 최고 청원부문에 왔으며 이것은 중국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번에 대규모의 군중들이 평화적으로 청원한 것을 해외매체에서는 “4.25사건”이라고 불렀다. 그후 중국 전통문화의 기공수련 방법인 파룬궁은 국내외의 매체의 전파를 통해 신속하게 세계뉴스의 촛점이 되었다. 비록 그후 몇 년 내에 중국의 관방매체는 이 사건에 대해 국내외의 매체에 아주 다른 태도였지만, 우리는 그때의 중앙tv 뉴스화면과 현장사진에서 모두 볼 수 있다시피 청원하는 군중들의 뒤에는 중남해의 특유한 자금성 붉은벽(도면을 보십시오)이 아니라 청원 군중들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금성의 붉은색 담이었고 중남해의 서쪽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중남해의 정문은 장안거리에 있는 신화문을 향하였다. 사실상 4월 25일에 장안거리에는 청원군중이 집거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주요하게 “푸유쩨”와 “서안문 대거리”에 분포되었으며 중남해의 붉은 담벽쪽에는 사람이 집거해 있지 않았다.

문 : 주용기총리는 “천진사건”과 “4.25사건”을 타당하게 해결하였는가?
답 : 25일 오전 8시 15분 좌우, 당시 주용기총리 일행은 국무원의 정문(서쪽문)으로부터 나와서 거리를 지나 청원하는 수련생들 앞에 왔다. 수련생들 속에서 박수소리가 울려나왔다. 주총리는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러 왔는가? 누가 당신들더러 오게 하였는가?” 많은 수련생들은 대답하였다. “우리는 파룬궁문제를 반영하러 왔습니다. 누가 조직한 것이 아닙니다.” 주총리는 또 물으셨다. “왜 청원서를 쓰지 않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있는가?” 많은 수련생은 모두 대답하였다. 그중 한 수련생이 말하였다. “편지를 많이 쓰다못해 한마대씩 될 겁니다. 그러나 아직 회답이 없습니다.” 주총리는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의 문제에 회답하였다.” 수련생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주총리는 몇 명의 수련생 대표를 데리고 가서 정황을 진일보 설명하게 하였다. 4월 25일 점심시간에 파룬따파(法輪大法)연구회의 리창, 왕쯔원과 기타 세 명의 북경수련생을 파룬궁 대표로 국무원에 들어오게 하여 정부관원과 상담하였으며 파룬궁수련생의 세 가지 요구를 신청하여 호소하였다.

첫째) 천진에서 붙잡힌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할 것
둘째) 파룬궁수련 군중들에게 여유있는 수련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셋째) 파룬궁서적의 출판을 허용해야 한다

국무원 청원소의 책임자, 북경시의 책임자 그리고 천진시의 책임자 등 정부관원은 번갈아 회담에 참가하였다. 저녁시간에 천진은 중앙의 지시대로 감금한 파룬궁수련생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러자 수련생들은 조용히 떠났다. 모든 과정은 조용하고 상서로왔으며 질서정연하였다. 설명해야 할 것은 국무원 청원소의 위치가 바로 중남해의 서쪽문에 위치하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면 파룬궁수련생은 중남해부근에 근본상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99년 7월 박해가 시작되자 중공매체는 “중남해를 향해 공격했다”고 날조하였으며 이것은 파룬궁에 화를 전가하는 것이었다.

문 : 강택민은 무엇때문에 공공연히 총리의 결론을 뒤집고 탄압을 결정하였는가?
답 : 위조 출신이며 6.4 사건에서 학생을 탄압하여 일어선 중공 두목 강택민은 공포에 질렸다. 주용기가 원만하게 이 일을 처리하여 칭찬을 받자 질투하여 다른 여섯 명의 정치상무국의 반대도 마다하고 기어코 파룬궁을 탄압하기로 하였으며 중앙회의에서 공공연히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앙은 소련 사회주의제도가 멸망한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줄곧 의식형태 영역에서 한 번의 소독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파룬궁은 ‘진선인’을 불어대며 우리들에게 손을 써서 ‘소독’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탄압공작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앞으로 이 경험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다른 기공조직에도 이용할 것이다.” 여기에서 볼수 있다시피 중공이 탄압한 근본원인은 파룬궁이 “진,선.인”을 논하기 때문이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였으며 “명예상에서 더럽히고 경제상에서 단절시키며 육체상에서 소멸하며 때려죽여도 자살로 취급한다”는 등의 멸절정책을 실시하였다. 전국 매체에서는 하늘땅을 뒤덮을 듯한 날조와 각종 거짓말을 퍼뜨렸다. 마치 문화대혁명의 재현인 것 같았다. 삽시간에 피비린내가 중국대지를 뒤덮었다.

문 : 박해는 지금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는가?
답 :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불법으로 파룬궁을 탄압해서부터 지금까지 수천만 명의 견정한 신앙을 갖고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받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가정이 풍지박산되고 사망하였고 불법으로 판결받고 노동교양을 받거나 혹형으로 치사하였으며 생체장기적출을 당하는 등의 참혹한 박해…… 그 죄행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 8년 이래, 비록 중공이 엄밀하게 박해진상을 봉쇄하였지만 여전히 3,148명의 파룬궁수련인들이 박해받아 치사한 실례가 확인되고 실증되었다. (2008년 4월 25일까지) 치사한 실례는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파룬궁의 박해는 이미 끝났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사실은 중공의 모든 거짓말은 국내외의 강렬한 질책을 받았기에 감히 공개적으로 박해하지 못하고 암암리에서 더욱 은밀하게 지속적으로 멸절식으로 인성을 소멸하고 있다. 매년 견정하게 신앙하고 진상을 말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은 불법으로 판결받고 노동교양받으며 붙잡히거나 각종 박해를 당하며 혹형으로 치사되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현재 알고 있는 사항이라면 중공이 36개의 비밀집중지역에 200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파룬궁수련자들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여 판매하고 시체를 태워서 종적을 없앴다. 수만 명이 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사망하였으며, 그중에서 요녕성 심양시 쑤쟈툰 집중영 한 곳에서만 해도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세계를 진감시켰다!

문장완성 : 2008년 4월 26일
문장발표 : 2008년 4월 27일
문장수정 : 2008년 4월 27일 01:03:52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4/27/177302.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