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법제자 일력(一瓅)
【명혜망 2008년 4월 20일】 최근 명혜망에 안전, 기술 및 정념에 대한 문장이 비교적 많이 올라오는데 나 역시 자신의 인식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전법륜』을 외우는 과정에 한 가지 체험이 있다. 바로 한 단락 안에 있는 문장에 대해 내가 숙독한 것과 앞뒤 단락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것은, 지식인으로서 내가 문자로 서술하는 사상에 대해 그리 낯선 것도 아닌데, 『전법륜』을 외울 때 단락의 앞뒤 구절의 연결과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에 대해 종종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지식’에 따라 기억을 돕는다는 점이다.
내가 놀란 것은 법을 암송할 때 때로는 글자를 빠뜨리거나 혹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거나 혹은 고정된 사유로 한 구절을 누락시킨다는 점이다. 이렇게 누락된 글자나 단어, 문장은 대수롭지 않게 단락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것 같고, 마치 현대어법과 문장의 언어구조 규범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다지 주의하지 않는다. 마치 경서에서도 이렇게 쓴 것 같다. 나는 ‘논어(論語)’를 암송할 때부터 이런 정황을 발견했기 때문에 한 단락을 외우고 나면 반드시 한 글자 한 구절씩 일일이 대조해보았고 한 절(節)을 암송하면 매 단락을 다시 대조해보았다.
한 단락의 내용을 외운 후에는 실수나 누락된 현상을 바로 잡았고, 한 시기 지난 후 다시 같은 내용을 외울 때 또 다른 글자나 단어를 실수하거나 누락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암송을 강화했다. 이렇게 해나가자 나는 내가 빠뜨린 글자, 단어, 구절이 문장이나 단락 중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며 뒤바뀐 글자나 단어로는 절대 경문 중에 나오는 글자나 단어가 표현하는 그 한 구절, 그 한 단락의 법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반딧불로 가장 홍대한 대법을 엿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안을 향해 찾고 대법제자의 각도에서 대법 경문 중에서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짓는 것에서부터 그 속에 함축된 법리의 층층 법(法)의 표현을 깨달았다. 아울러 이 속에서 자신이 바로 잡히고 깨끗해진 것을 느꼈고 번티(本體)와 공(功)의 연화 및 제고를 느꼈으며, 마음속으로 사존과 대법에 대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호한한 은혜를 느꼈다. 이 감동은 온 생명을 감싸는 것으로 극히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극히 거시적인 것까지 이르렀다.
처음 법을 읽을 때 확실히 발음이 까다로운 글자를 만나는데 어떤 곳은 호흡이 불편하다고 느낀다. 내가 겸손한 태도로 경서를 암송한 후 다시 경서를 읽을 때 술술 잘 읽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한 대법제자이자 바로 잡힌 생명으로서, 법을 읽을 때 정말이지 사존의 경문이 가장 현오(玄奧)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내가 빠뜨린 글자를 넣어서 읽었을 때 나는 그 속의 공(功)이 비로소 아주 섬세해진 것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지 가장 표면적이고 가장 거친 것 위에 들떠있을 뿐이다. 사존께서 사용하신 글자와 단어로 바꾸자 단번에 막히고 쌓였던 곳이 열리는 것을 느꼈고 마치 별천지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기타 그 어떤 단어도 대체할 수 없었다. 빠뜨렸던 문장을 보완하자 생명 속의 거시적인 대궁(大穹)도 부동한 층차의 부동한 세계를 원용했고 치우치거나 누락됨이 없었다.
독서하는 방식으로 경문을 보면 ‘아 보기만 하면 무슨 의미인지 한다.’고 느낀다. 이렇게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보물 창고 깊이 들어가 빈손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 진정으로 수련하는 경건하고 겸손한 상태로 마치 물처럼 법을 배운다면 한 글자도 누락되지 않고 한 단어도 차이나지 않으며 한 구절도 실수하지 않는다. 발음이 어려웠던 곳도 원래 자기 사유 중에 좋지 않은 관념이 있었던 것이며, 호흡이 불편하거나 숨이 가쁜 곳도 원래 자신의 그 세계가 혼탁하여 밝지 않으며 그 공간이 굽어있기 때문이다. 일부 글자, 단어, 구절은 종종 한 번에 외울 수 없는데 그렇다면 필경 자신의 대궁 중에 결함이 있고 원용하지 못한 것이다. 법학습과 수련은 바로 파룬따파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며, 지혜가 충분하지 못하고 원용하지 못한 일체를 보완해 원용불멸(圓容不滅)의 자신을 새로 만들고 보다 아름다운 새로운 우주 대궁을 만드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치를 따지길 좋아하며 구체적인 일은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동수들도 이와 유사한 애호가 있다. 그러나 『전법륜』 에서 사존께서 말씀하신 많은 일들은 그 속에 아주 오묘한 것들이 있다.
모(某) 지역의 대법제자가 하는 말을 들으니 모두들 법리에 명석하다고 인정하는 한 수련생이 그를 시험하면서 “한 단어로 『전법륜』을 개괄할 수 있는가? 만약 이런 단어가 있다면 이 단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놀라 ‘대법을 어찌 한 단어나 한 글자로 개괄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글자이다. 바로 이런 생각을 움직이기만 해도 대법제자의 본분을 위배한 것으로 모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교류 중에서 우리는 종종 인간의 단어로는 마음속의 깨달음을 분명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고심 끝에 적당한 어구를 찾아내거나 혹은 자신의 인식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어구를 찾았을 때에도 절대 자신의 한 단어나 구절로 사존의 어느 단락 설법을 개괄하거나 혹은 새로운 단어로 사존께서 이미 언급하신 법을 정의내리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한 단어나 한 글자로 어느 부분 사존의 경서를 포괄할 수는 없다.
다시 앞의 화제로 돌아가 동수들이 정념, 안전, 두려운 마음, 기술을 교류할 때 나는 정념이란 단지 두렵지 않는 것만이 아니며 안전 역시 단지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우리의 기술은 더욱이 속인의 기술이 아니며 물질과 정신은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일찍이 악당의 당문화에 의해 어릴 때부터 독해되었고 우리는 또한 충분히 원용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낡은 우주 중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정체를 따로 떼어 일을 보는 고질병은 우리가 법을 학습할 때 글자를 빠뜨리거나, 단어를 누락시키거나, 구절을 틀리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 명사에 대한 인식이 치우침을 피할 수 없으며 천박함을 면할 수 없다. 비록 우리 역시 이치를 깨달았다고 느끼겠지만 정법노정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법에 대한 인식은 이보다 훨씬 정심(精深)하고 원용한 것이 아닌가.
나는 최근 각지에서 박해가 빈번히 발생하는 원인도 여전히 대법제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체적으로 법공부가 부족해서 조성된 것이다. 여기서 좋은 의견을 끌어내고자 자신의 거친 의견을 제시했으니 동수들의 아낌없는 지적을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4월 2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4/20/176813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