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3월 29일】많은 동수들이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지 못해 아주 고통스럽다고들 한다. 내게 집착심을 찾아내는 몇 가지 방법이 있어 이를 적어 내 동수들에게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
1. 가장 좋고 또 가장 근본적인 방법인데 바로 법(法)으로 대조해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법으로 대조하지 않는 가장 큰 문제는, 내 생각에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이 자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을 법속에 놓고 사존께서 말씀하신 각각의 법에 대해 자신에게 동일한 표현이 있는가 대조해 본다.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렇게 조성된 것으로 내게도 그렇게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중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옛이야기를 하나 하자. 『봉신연의(封神演義)』 중의 신공표(申公豹)가 강자아(姜子牙)를 보니 늙고 또 재간도 없었다. 그러나 원시천존(元始天尊)은 강자아에게 봉신(封神)하게 했다. 신공표의 마음속은 곧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어째서 그에게 봉신하게 하는가? 당신이 보라. 나 신공표는 얼마나 대단한가. 내 머리는 베어도 다시 돌아와 붙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봉신하게 하지 않는가?” 그는 몹시 질투하여 늘 강자아를 교란했다.”
개인적인 인식으로 사존께서 말씀하신 이 법에서 신공표가 수련인이라고 점화해 주셨는데 나 역시 수련인이다. 그럼 내게도 “늙고 또 재간도 없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있다. 나는 늘 다른 수련생을 마땅치 않게 보면서 그가 능력이 너무 없다고 여겼는데 이는 바로 집착심이 아닌가.
사존께서 말씀하신 이 법은 내게 이 한 가지를 점화해 주셨는데 나는 자신이 고명(高明)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가? 있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는 개공개오(開功開悟)했기에 비로소 집착이 생겼는데 나는 일을 성공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내가 남을 도울 때 사사로운 목적이 있지는 않았는가? 남을 도울 때 조건을 따지고 대가를 따지진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집착심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인데 일마다 법으로 대조하는 것이다.
2. 주동적으로 물어보기. 매 한 단락 시간을 두고 나는 주동적으로 신변의 동수들에게 묻곤 한다. “최근에 내게 어떤 마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어는 곳에 부족함이 있다면 내가 잘하도록 하겠다.” 중국 고대에 이런 말이 있다. “당사자는 미혹되지만 방관자는 분명히 본다.” 많은 마음은 자연히 형성된 것이라 자신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는데 중국 고대의 밝은 군주들은 모두 허심탄회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였다. 나는 주동적으로 동수들에게 묻는데 바로 언로를 널리 개방하는 것이다.
3.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나는 어떤 모순이 닥치든 모두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모두 나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밖의 것을 가져다가 안을 보는데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내게 쟁투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가족이 내 앞에서 정을 아주 중시하면 나도 이런 것이 아닌가? 수련생이 내 앞에서 색욕심(色慾心)을 드러냈다면 한편으로는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 이런 마음을 중시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파생되어 나온 집착이 아닌가?
세인이 ‘9평’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 내게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는데 단지 표현되는 방면이 다를 뿐이다. 세인이 ‘9평’에 관심을 갖지 않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내가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사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 아닌가! 우주 중생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데 참여하지 않는데 이는 내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내가 마음을 찾는 세 번째 방법이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지만 일을 거울로 삼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4.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
개인적인 이해로 사존께서 이 법에서 점화하신 것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이다. 그럼 일체 표현의 근본은 모두 ‘위아위사’이다. 만약 구체적으로 이 마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면 표현을 보지 않고 직접 사(私)․아(我)를 가리킨다. 즉 모든 것을 사(私)․아(我)를 사용해 대조해본다. 수련생이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사와 아가 아닌가? 세인에게 진상을 알릴 때 높낮이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사와 아가 아닌가? 나를 강조하는 것은 사와 아가 아닌가? 신체가 아프다고 느끼는 자체가 사와 아가 아닌가? 등등. 나는 이것이 근본적인 사람마음이라고 여기며 직접 여기에까지 이른다.
5. 나는 집을 떠나 떠도는 대법제자이다. 당초 박해받을 때 동수의 편지로 밤에 도망치다보니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점오(漸悟) 상태에 있는데 당시 구세력(舊勢力)에게 왜 내게 이 일체를 잃게 했는가 물었다. 그러자 구세력은 “당신에게 이 일체에 대한 집착이 있다. 당신이 무엇을 집착하면 우리는 당신에게 그것을 잃게 할 것이다. 당신이 안일을 집착하면 안일을 잃게 하고, 당신이 돈에 집착하면 돈이 없게 하며, 당신이 정에 집착하면 당신의 가족을 잡아가 정을 잃게 하고, 당신이 경서를 수색당할까 두려워하면 책을 빼앗아 갈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꼬투리를 잡힐까 두려워하면 우리는 일부러 당신의 진상자료가 수색 당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제거했다. 나의 제고를 위해 대법을 해치는 대가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마음을 찾는 일종의 피동적인 방법인데 바로 가상(假相)이 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잃을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잃게 된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이 도처로 다니며 나의 나쁜 점을 퍼뜨려 나의 명리(名利)를 잃게 했다. 이는 내게 명리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생은 나의 부족 때문에 여전히 절반의 사람을 찾아가 담화하며 내가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자 가상이 왔고 나는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이는 내가 사람 중의 일에 미련이 남고 생사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구세력은 대법제자를 고험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법으로 대조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상생상극의 이치로 대조해서도 안 되는데 부족을 바로 잡는 것은 정법의 수요이다.
사실 우리가 사람마음을 찾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됨에 있어 가장 큰 급소이다. 즉, 감히 정시하지 못하고 감히 건드리지 못하며 감히 승인하지 못한다. 어떤 수련생이 나는 집착이 없다고 말했다. 집착이 없다면 어찌 당신에게 집착을 생기게 하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집착심을 찾는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기에 조급한데 이 역시 집착이다. 그러므로 설사 찾았다 해도 또 결과에 대해 집착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당태종은 일찍이 “구리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정진요지』「집착을 더 없애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을 제도함에 오로지 바른 것을 구해야만 비로소 당신들의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다.”
내가 인식하기에 정말로 집착심을 제거하고 싶다면 반드시 법학습을 많이 하고 잘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정확한 사상으로 지도할 수 있고 비로소 법속에서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할 수 있다.
이상은 개인 경지에서의 인식이다. 여기에 인용된 사부님의 설법에는 보다 깊은 내포가 있으며 단지 몇 마디 얕은 말로 동수들이 참고하도록 제공할 뿐이다.
문장발표 : 2008년 3월 2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3/29/17535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