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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 사이의 십년 조와 팔년 겨

작가: 토론토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2월 13일】
수련인 사이에도 십년 조와 팔년 겨의 은혜와 원한이 아주 많다. 우리는 인간세상에서 몇 천 년 동안 연극을 공연하면서 서로 간에 맺은 은혜와 원한도 물론 적지 않다. 오늘날 수련을 하자면 속인 중에서도 빚을 갚아야 하며 우리 피차간에 역사상 진 빚들도 모두 청산해야 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아주 많은 것은 이미 다 사부님께서 가져가셨고 우리가 감당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정신적인 일부분에 불과하다. 정법수련 중에서 표현되는 것은 서로 간에 각종 정법항목을 하는 중의 심성마찰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일체를 이용하시어 우리 서로 간의 은혜와 원한을 해소하는 동시에 우리더러 법에 대조해 심성을 제고하게 하셨다.

현재 상황에서 보자면 우리 일부 동수들은 아직도 이 한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상대방의 언행에 아주 집착한다. “법을 파괴할지도 모른다”거나 “수련인 답지 않다”거나 “그는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다”는 등등. 늘 마음에 두고 분분히 불평하면서 어떤 때는 또 화가 나서 야단이다. 자신의 이런 상태야말로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란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우선 한 가지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바로 이 우주 중에서 진정으로 이 법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누가 움직일 수 있다면 그는 생명 중의 가장 큰 겁난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수련생이 잘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를 위해 조급해하고 걱정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그를 넘어뜨리지 못해 안달할 수 있겠는가?

어떤 때는 동수 역시 아주 무리한 거동을 하여 스스로 생각하기에 상대방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게 할 수도 있다. 나는 늘 이런 말을 듣곤 한다. “모모(某某) 수련생은 어떠어떠한데 정말로 속인만도 못하다.” 이럴 때 상대방 역시 수련인이기 때문에 기세등등하게 법리에 따라 그에게 요구하지만 도리어 그 어느 때든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않는” 것을 망각했고 수련인에겐 절대로 우연한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망각했다. 당신이 이런 것을 보고 듣는 것 역시 어쩌면 당신이 상대방에 대해 책임지고 선한 마음으로 동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고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업을 갚은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음에 자극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불편하게 해야만 한다. 가부좌 할 때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소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러므로 수련생이 “빚을 독촉”할 때는 반드시 우리 자신이 가장 큰 대가를 치른다고 느낄 때이다. 이때 상대방의 표현은 종종 아주 무리하고 아주 오만방자하며 아주 집착하는데 당신으로 하여금 비참하고 불공평하게 느끼게 하거나 심지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는 어떤 때 법에서 이런 문제들을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깊이 새기며 수련과정 중에서 동수간의 마찰을 쌓아둔다. 나중에는 각종 정법 항목 중에서 이 수련생이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그 동수에게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협력하고 협조해야만 잘 할 수 있는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속의 장애로 인해 미적거리고 주동적이지 못하다. 이런 문제는 지금 표를 파는 이 일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어떤 수련생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수련생은 확실히 법에서 분명하지 못하고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그에게 협력해야지 내가 왜 그에게 협력하는가 하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로 상대방에 대해 책임지고 법에 대해 책임지며 중생에 대해 책임진다면 절대 수수방관할 수 없다. 적극적이며 주동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선의(善意)적으로 법리상에서 교류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한 것이 정말로 법에 있다면 법은 자연히 신적(神迹)을 펼쳐 보일 것이며 곧 상대방이 그렇게 완고하고 개변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왜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음”을 믿지 못하는가?

정법이 전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진입한 오늘날 사존께서는 설법 중에서 거듭 협조 작용을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협조”하는 것을 닦아내지 못한다면 신우주(新宇宙)로 진입할 수 없다. 대법제자의 정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12월 10일 아침 약 20명의 동수들이 지하철 역 입구에서 신운(神韻) 공연 선전전에 참가했다. 효과는 정말이지 아주 좋았다. 대형 TV와 선녀들, 2미터짜리 대형포스터 4장, 십여 명의 붉은 모자를 쓴 수련생들이 한 시간 동안 2천여 장의 전단지를 배포했다.

온 동수들은 대부분 직업이 있는 젊은 동수들이었고 모두들 자발적으로 왔으며 즐겁게 동참했다. 전단지를 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모두들 아주 즐거워했다. 함께 참여한 동수들은 다시 한 번 정체의 힘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그 장은 아주 거대한 기세가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또 우리 공연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실 이 일을 협조하는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몇몇 동수들이 서로 상의해 시간과 장소를 정했고 일을 안배하는 사람이 큰 명단을 나누어주었다. 선녀 역할을 협조한 사람은 선녀들을 찾았고, TV를 관리하는 사람은 TV를 안배했다. 토론토에서는 약 60여명의 동수들이 뉴욕에 간 상황이라 따로 신청을 받거나 전화를 걸지도 않았지만, 월요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던 인파들은 모두 아름다운 ‘신운’을 보았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단지를 얻어갔다.

우리 여기서 협조하는 사람은 정말로 아주 운이 좋았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모두 아주 지지하고 협력했기 때문이다. 지금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원인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모두들 서로 간에 마음속으로 은혜와 원한이 아주 적었던 것도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요소였다. 속인들은 “원수는 풀어야지 맺어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일체를 해결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시는 오늘날 우리가 어찌 우리에게 존재하는 과거의 은혜와 원한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손을 맞잡고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도하는 이 일을 잘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이 시각에도 우리 마음속에 그 어떤 동수에 대해서건 불만이나 선입견, 원망을 품거나 배척하는 것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그것은 옛 일일뿐 오늘날의 인간관계 속에서 뛰쳐나오고 역사의 윤회 속에서 뛰쳐나와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하며 상대방도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려온 신(神)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많은 마음의 매듭들이 어쩌면 쉽게 풀어질지도 모른다.

협력과 협조를 잘하는 것은 우리 정법제자들의 수련에 있어 반드시 도달해야 할 경지이며 이는 개인 수련의 문제가 아니다. ‘소업’할 때는 마음이 아프기 마련이다. 우리가 처음에 가부좌를 할 때 아팠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아픈 것은 그래도 다리가 아픈 것만은 못하며 수련 역시 아주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십년 조와 팔년 겨를 쏟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일체 심성 마찰을 감당하려는 신심과 힘이 있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정체적으로 협조하는 수련과 중생을 구도하는 환경 속에 뛰어들어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개인의 체험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12월 1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7/12/13/168333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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