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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구도 : 세심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인정과 도리에 맞게

글/당산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2월 3일】 박해를 폭로하고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나는 일부 ‘세부적인’ 문제를 체험했는데 대법제자들이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세부적인 것들은 우리 대법제자의 경지의 표현이며 또한 신의 지혜와 위력이 인간세상에서 재현되는 것이기에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최대한도로 현재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정의, 도덕, 천리(天理)의 기점에 서고 자아나 단체의 기점에 서지 말아야(사용하는 언어 문제)

근래에 한 동수의 문장에서 악경이 그에게 “당신은 당신 사부의 개다.”라고 욕할 때 그는 “내가 사부님의 개가 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아주 영광이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이 동수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었고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에게 일정한 계발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 각도에서 보자면 중생에 대해 책임지고 자비를 체현하려면 우리는 보다 지혜롭고 포용하는 방식을 채용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사악의 요소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세인과 악경을 포함해 일깨워줄 수 있고 최대한도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대법제자가 한 이 말은 개인의 각도에서 한 것이고 하나의 경지를 체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른 도리는 말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우리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眞善忍은 천리(天理)이다. 내가 만약 眞善忍을 수호하는 생명이 될 수 있고 정의를 수호하는 신이 될 수 있다면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이다!” 개인의 문제를 정의와 천리를 수호하는 각도로 승화시키면 설득력과 포용성이 더욱 커진다.

가령 사악한 당의 재앙(遭殃) 텔레비전(여러분이 교류 중에 ‘중앙 텔레비전’ 혹은 ‘CCTV’의 명칭을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승인하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에서 대법을 모욕하는 제목 중에 북경에 상방하러온 한 농촌 여인(수련생일 수 있다)에 대해 악경이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하자, 그녀는 “나는 우주 중에서 왔다.”라고 대답했다.(표정이 엄숙하지 않아 마치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것 같았다.)당시 사악한 당이 창궐하여 박해하던 시기에 사람들은 거의 판단능력이 없었기에 이 말은 속인들이 대법제자를 비웃는 말로 되었고 자신에게도 거대한 업력을 조성했다.

사실 이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며 그 경지에 도달하면 말 자체에도 신의 힘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모방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지에 있지 않기에 법의 내포가 없고 곧 이 말의 ‘틈’을 타 사악한 당이 주입하는 무슨 ‘하늘로 오른다.’,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선전을 가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곧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경지가 어떠하던지 막론한다.)

“나는 인민 대중 속에서 왔으며 무고하게 탄압당하는 가장 선량하고 성실한 백성 속에서 왔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의 도리에서는 물론이고 사악한 당도 틈을 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많은 동수들의 말을 우리가 그저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지가 있어야한다. 반대로 경지가 있을지라도 마땅히 속인 일면의 표현방식에 주의해야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신의 작용 때문에 성숙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은 작품이 됐다고 볼 수 없으며, 완벽한 작품에다 신을 더하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신성(神聖)한 것이다.”(『미술창작연구회 설법』)

이런 예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장쩌민이 대법을 박해하므로 나는 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당신에게 진상을 알려주어야 한다.”라는 표현은 “장쩌민이 眞善忍을 박해하므로 眞善忍을 신앙하는 한 선량한 공민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진상을 알려주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또 예를 들면, “내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 것은 잘못이 없다!”란 말은 “내가 자신의 신앙을 견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또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견지함은 잘못이 아니다!”로 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속인들도 “신앙자유는 옳은 것”이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표현 방식을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 같지만 사실 한 경지의 체현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관용하는가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체현되는 것이다. 한 차례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내가 갑자기 인식한 것인데, “우리가 파룬궁 진상을 말하는데 반나절이나 말했어도 사실 무엇이 진상이고 무엇이 본질인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바로 파룬궁이 곧 眞善忍 자체다!”라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마디 말은 한 생명, 가장 바른 한 생명의 위대한 기백을 체현해 낸 것으로 사람들은 하늘을 찌르는 듯한 가장 바르고 가장 바른 역량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악이 ‘만든’ 단어를 쓰지 않고 사악의 실질를 폭로

‘전화(轉化)’란 단어를 많은 동수들도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아주 불편한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악이 만들어낸 단어이기 때문에 단어 자체가 박해를 띠고 있고 법을 비방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인데, 사악은 하나의 명사를 이용해 실질적인 범죄를 은폐한 것이다. ‘전화’란 사실 “사람을 핍박하여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 사악한 당의 명사이다. 나는 속인과 담론하고 이 방면의 박해사실을 쓸 때 일반적으로 “××이 강제로 그를 전화시켰지만 그는 전화를 거절했다”처럼 쓰지 않는다. 대신 “××가 강제로 신앙을 포기하게 했지만 그는 자신의 眞善忍 신앙을 확고히 믿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와 같은 식으로 표현한다.

중생이 만약 우리가 바른 것을 안다면 곧 그렇게 많은 의문과 대립되는 정서가 없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최근《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중에서 “현실 사화와 대립하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체험은 우리가 진상을 말하는 중에서 역시 ‘대립’하지 않게 주의해야 하고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이 접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상을 말해야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가장 바른 것이고 더욱이 사회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가 진상을 말할 때의 말투, 태도는 사용하는 단어를 포함해 모두 가장 바른 것으로 사람들과 어떠한 대립도 없다.(사실 이는 사람 미래의 본보기이다) 내 생각에 이것 역시 일종의 진상이 아닌가?

절대화된 문제에서 우리는 절대적이지 않게 대답(세상이 널리 인정하는 것으로 도리를 설명)

동수의 문장에서 악경이 또 말하길 “당신의 사부는 한 점의 잘못도 없단 말인가?!”라고 했다. 우리가 접촉하는 속인들도 “당신들이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확한가?”라고 묻는다.

사람의 층차에서 우리가 만약 “우리 사부님은 절대적으로 정확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대륙에서 오랫동안 독해를 받아온 사람들은 “절대적인 언어(다년간 악당에게 기만당해 기만당할까 두려워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심리가 있다)를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일체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의 일체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신을 믿지 않고 무신론자라면 나는 당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관용을 대표하며 이런 경지는 그를 선량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정면으로 대답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신의 문제를 사람층면으로 낮춘 것이기 때문이다.(사람으로 말하면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오직 신의 층차로 승화되어야만 비로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신을 말하자면 사람이 신을 믿는 최저선이 너무 낮으므로 사람들이 이미 인정하는 신을 말해야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한번은 내가 아침을 먹을 때 한 할머니가 사악한 당을 욕하기에 나도 그의 말을 이어 사악한 당의 본질(그것의 정의를 내리고 절대적인 단어를 사용함)을 말하자 본래 감히 말을 하던 할머니가 재빨리 “젊은이 말하지 말게. 밖에서 말할 때는 주의해야 해.”라고 말했다.(놀라서 감히 듣지 못한 것이다) 내가 너무 노골적이고 절대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겁을 먹은 것이다. 마땅히 부드럽게 사실과 도리를 말해야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꼭 극단적이고 강렬한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상을 알릴 때도 온화함에 주의해야 한다.

‘인정(人情)’에 부합하게 진상을 말해야

속인이 평상시 자주하는 말이 “인정으로 보나 도리상, 당신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가 진상을 말하고 삼퇴를 권하는 것을 만약 그가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인정과 도리에 맞는’ 일이므로 곧 저촉하는 정서를 없앨 수 있다.

《9평》을 보기 싫어하고 듣기 싫어하는 중생에 대해 우리가 늘 억지로 그에게 말하거나 혹은 격동되어 그에게 권하면 효과는 그리 좋지 않으며 심지어 대립할 수 있다. 한 동수의 체험에서 말했다시피 《9평》을 보기 싫어하는 선배를 대할 때는 겸손하고 온화한 말투로 상대방을 존경하면서 말할 수 있다. “선생님 혹은 선배님, 당신의 연세가 저보다 많으시니 틀림없이 겪으신 것도 저보다 많을 겁니다. 이 책을 역사로 여기고 한번 보시지요!”

여기에는 이 동수의 ‘너그러움’, ‘관용’,아울러 억지로 사람을 강요하지 않고 인정과 도리가 있게 처리했다. 그럼에도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인격이 없는 것과 같다.

한 수련생은 “지금 사람들은 종종 감정이 제일이고 이성은 둘째이다. 당신을 받아들여야만 당신의 관점을 받아들인다. 당신이 말한 도리가 아무리 정확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고 당신의 표현 방식을 좋아하지 않으면 당신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헛수고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의 사람들은 아주 구하기 힘들다. 당신이 그의 관념에 부합되어야 그는 듣기를 원한다. 당신이 그의 마음에 따라 이야기해야만 그는 듣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그를 구하려면 또한 구하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2004년 뉴욕 국제법회 설법》)

법에서 제기한 사람의 집착에 근거하여 말한다는 것인데 사람의 가장 큰 집착은 바로 ‘정(情)’이다. 사람은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중시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억지로 무엇이든 내리 누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진상을 말할 때 남에게 강요하는데 특히 친한 사람과 가족에 대해 “당신의 그 인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이렇게 인식하는가?”라고 말하낟. 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결론을 내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체면이 서지 않게 한다. 한 노년 수련생이 자기 배우자에게 탈단을 권했지만 상대방은 아무리해도 동의하지 않았다(고집이 비교적 강함). 나중에 나는 이 노년수련생이 억지로 남에게 강요하면서 남의 관점을 강제했기 때문에 배우자가 아주 반감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반발 심리)

내가 그녀의 집에 가서는 우선 그녀의 남편과 한담을 하며 칭찬해주었다. “탈퇴하지 않는 것도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남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석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식견도 넓고 애호도 광범위하므로 저는 당신 같은 선배를 좋아합니다.” 노인은 내 말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그는 아주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이다)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악기를 들고 나에게 연주해 주면서 또 노래까지 불러주었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노인에게 말했다. “이모는 분명 당신을 위해 말하는 걸 꺼에요. 만약 정말로 당신을 위해 한 말이라면 인정을 봐서라도 단호하게 거절할 순 없지 않겠어요?……하물며 부패한 공산 사당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또 당신은 정말로 탈단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모 말대로 탈단 하세요?” 그는 내 말에 기뻐하면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좋아!”

우리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 때 우리는 마음이 섬세하면서도 넓어야 하며 사람의 방식과 방법에 부합하는 것을 많이 생각해내야 한다.(법이 우리에게 준 지혜이다), 예를 들면 미리 상대방을 몇 마디 칭찬해주면 뒤의 의사소통이 아주 쉽게 이뤄진다. 그와 관련된 일(그의 일, 생활, 학습, 자녀, 부모, 애호 등)을 많이 말하면 그는 당신이 자신에게 아주 관심이 있고 그를 중시한다고 여긴다. 특히 친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 때 자기만 말하고 상대방이 관심을 갖는 최근의 생활, 사업을 잊어버리는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인정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만약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접촉할 기회가 적다면 역시 적당한 화제를 찾아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상대방이 비교적 관심을 갖는 일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중에 곧 끊임없이 자신의 경지를 높여야 하는데 속인 사회에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갈수록 “인내심이 있고” 마음이 갈수록 세심하면서도 하는 말이 갈수록 ‘예술’적이고 갈수록 ‘듣기 좋은’ 것이다. 또 진상을 알리는 효과도 당연히 갈수록 좋은데, 왜냐하면 이것은 법의 위력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층차가 높을수록 그것의 밀도는 더욱 크고 더욱 섬세하며 위력은 더욱 크다”(《전법륜》)

문장발표:2008년 2월 3일
문장분류:수련마당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2/3/17166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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