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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의 기점에 서고 정법의 기점에 서자

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월 25일】 1999년 7.20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시종 일부 문제를 투철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을지 몰랐다. 일부 문제들은 정말로 옳은 듯 하지만 옳지 않았다. 나는 또 동수들이 많은 문제들에 대한 이해에서 견해가 아주 많이 갈리는 것을 보았다. 1999년 이전에는 법에 대한 이해라도 좋고 자신이 부딪힌 거의 모든 문제나 동수들이 제출한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대법 중에서 비교적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1999년 이후 자신은 사악의 박해 문제에 있어서나, 동수들이 사악에게 박해당하는 문제에 있어 아주 큰 견해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사실 1999년 이전에 내가 동수들과 동일한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은 처한 층차가 다르기 때문이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일치된 답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인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한 층차가 다르기 때문에 견해도 자연 다르기 마련이며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층차를 제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9년 이후에 나타난 많은 견해차이, 특히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는 이 문제에서 나타난 견해차이는 층차의 문제가 아니라 기점의 문제이다. 이는 층차를 제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만약 기점이 정확하지 못하다면 층차를 제고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8년여 동안 나는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는 문제에 대해 정말로 아주 많은 우여곡절과 인식과정을 거쳤다. 처음에 나는 이것을 자신의 업력이 초래한 것으로 인정했고 이것은 자신의 수련에 누락이 있어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수련을 제고하고 고통스럽게 소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사악이 어떻게 박해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의식의 지도하에 진상을 알리거나 사악을 폭로할 때 나는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었으며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심태로 했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셨고, 많은 동수들이 모두 이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따라서 하긴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왜 진상을 알리고 사악을 폭로해야 하는지 인식이 분명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적지 않은 동수들이 이런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이런 의식의 지도하에서 나는 사악에게 틈을 타게 되었고 줄곧 사악의 엄혹한 박해를 받았다. 여러 차례 납치, 판결을 받았고 나는 자신의 수련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비할 바 없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한 것은 더욱 부족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큰 유감으로 느끼며 늘 큰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고 여겼다.

법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나는 점차 사악에 대한 견해를 개변했다. 끊임없이 사존(師尊)의 최신 설법을 학습함을 통해 나는 끝내 대법은 일체를 창조한 근본이며 그 어떤 생명도 질의하거나 평가, 고험할 자격이 없고, 신 우주의 대궁(大穹)은 완전히 대법이 개창한 것이고, 대법은 구우주의 일체 중생들에게 신우주로 나아갈 희망과 기회를 주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대법이 없으면 일체가 없고 이번 정법이 없으면 곧 구(舊)우주 중생의 미래는 사라진다. 다시 말해 구우주의 중생이 새 생명으로 걸어갈 기회가 없는 것이다. 대법은 일체의 가장 근본이며 정법은 우주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심지어 정법은 우주 역사가 오늘까지 발전해 오면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그 어떤 일도, 만약 정법 이 일을 떠나서 말한다면, 모두 조금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대법은 우리에게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을 성취하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완전히 남을 위하는 고상한 생명이 되어야 하며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남을 위하’는가? 대법은 일체의 근본으로 대법이 없으면 우주와 중생은 없다. 그럼 우리는 일마다 늘 대법을 위해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법은 구우주의 중생을 구도하는 유일한 큰일이며 구우주의 무량한 중생들이 구도될 수 있는가, 좋은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곳곳에서 정법을 위해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대법과 정법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선적인 위치에 놓고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늘 대법에 입각하고 정법의 기점에 입각해 문제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는 바로 기점문제이며 이는 바로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가령 전에 “사악의 박해는 우리의 수련제고를 돕는다”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그렇다. 사악의 박해는 우리가 소업 하는 것을 돕고 심성을 제고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수련의 기점에서 문제를 본 것이다. 지금은 정법 이 일이 가장 큰 일이며 이는 구우주의 중생이 구도 받는데 관계되는 가장 큰 문제이다. 이런 큰일은 개인 수련과 과위의 문제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며 개인의 득실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여전히 개인 수련이 기점에 서서 사악이 정법을 교란하고 박해하는 것을 대한다면 그럼 곧 단지 개인의 득실만을 따질 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또 가령 ‘사악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은 자비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사실 대법의 ‘眞善忍’은 개인의 자비와 선량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법은 표준이 있는 것이며 자비와 위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대법의 기점에 서고 정법의 기점에 선다면 그럼 개인의 자비를 멀리 멀리 뛰어넘게 되며 개인의 동정심을 초월하고 생명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초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이 없으면 우주의 일체 중생이 없고, 정법이 순조롭게 완성되지 않으면 구우주의 무량한 중생들이 훼멸될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기점에서 본다면 그럼 대법을 파괴하고 정법을 교란하는 것은 가장 큰 죄가 아닌가? 구우주의 중생이 순조롭게 구도되는 것을 교란하는 이런 사악한 생명에 대해 마땅히 즉각 깨끗이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돌이켜보니 나는 사실 기점문제에서 모호했고 또 시종 ‘자아’의 범위에서 맴돌며 문제를 고려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늘 ‘나’의 범위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에 대법의 무한히 수승(殊勝)하고 비할 바 없는 위엄(威嚴)을 보지 못했으며, 정법의 무한하고 거대한 의의가 있는 곳을 보지 못했다. 만약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대법에 대한 무한한 숭경(崇敬)이 나올 것이며 정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을 것이다. 그럼 개인의 관념, 개인의 견해, 개인의 자비, 개인의 호오(好惡)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개인의 각도에 선다면 자연 발생한 일체 박해를 개인수련의 제고를 위해 온 고험으로 이해한다. 만약 정법의 각도에 서서 본다면 곧 현재 발생하는 박해는 사실 정법에 대한 심각한 교란임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구세력은 ‘고험’을 구실로 이런 일들을 한다. 그러나 정법수련자는 구세력의 이념 각도에 입각해서 문제를 볼 수 없으며 대법의 각도에 입각하고, 정법의 각도에 입각하며, 사부님의 각도에 입각해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 사부님의 각도에 선다면 그 어떤 사람이든 모두 어렵지 않게 이번 박해는 완전히 사부님의 정법에 대한 가장 심각한 교란임을 알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 죄는 극히 사악한 것이다.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볼 수 없다면 그럼 마땅히 어떤 각도에 입각해 문제를 보겠는가? 사부님의 각도에 입각해 문제를 보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사부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사악이 계속 존재하는 것은 결국 우리 대법제자들이 아직도 그것의 존재를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사상이 정말로 그것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능력이 충분하며 우리는 대법을 수련하는 것으로 대법은 “건곤(乾坤)을 바로잡을 수 있으므로, 물론 사악한 것을 짓누르고 난잡한 것을 소멸하며, 원용(圓容), 불패(不敗)의 법력(法力)이 있게 마련이다.”(『정진요지』「정론(定論)」)

그러므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대법제자 정체의 인식문제이다. 만약 정체적으로 모두 정확한 기점에 도달한다면 모든 사악은 다 깡그리 소멸될 것이다.

대법은 무한한 위엄이 있고 수승한 것이며 정법은 현재 우주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대법제자는 가장 정정당당하고, 부동한 층차에서 모두 가장 바르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위엄 있고 가장 정정당당한 것으로 세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세간에서 받는 박해와 제한은 완전히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대륙의 이런 사회에서 ‘천민(賤民)’ 형상을 갖는 것은 불공정한 것으로 이는 대법이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대법은 이런 박해를 승인하지 않고 사부님께서도 이런 박해를 승인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왜 승인한단 말인가? 왜 아직도 이런 박해에 소위 ‘좋은 점’이 있다고 여기는가? 이는 대법과 대립면의 각도에 선 것이 아닌가? 이는 사부님과 대립면에 선 것이 아닌가? 이는 기점의 문제가 아닌가?

정법의 대립면의 각도에 선다면 아주 위험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개인 수련에 매몰되고 개인수련을 구실로 두려운 마음을 덮어 감추는 그런 동수들에게 기점을 바로 잡고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일체 좋지 않은 관념들을 제거하여 우리 정체를 제고시킬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문장발표 : 2008년 1월 25일
문장분류 : 수련문장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25/17103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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