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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 고생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

글 / 치치하얼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월 23일】 1월 10일에 명혜망에 실린 동수의 교류문장 ‘수련과 고생에 대한 초보적 인식’을 보고 다른 측면으로 고생에 대한 나의 견해를 교류하고자 하오니 동수님들께서 지적해주기 바란다.

만약 동수님이 수련 중에서 업력을 제거하고 죄과를 없애고 심성을 제고하기 위해 고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셨다면 몰라도 만약 정법수련 중에서 구세력이 억지로 고생을 가중시킨 것이라면 나는 절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보며 부정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금방 자료점을 시작하였을 때 한 수련생이 나와 같이 하기로 했다. 소비되는 자료를 친히 먼 곳에 가서 사와야 했는데, 제일 어려운 것은 종이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려서 응석받이로 자랐기에 종이를 한 상자도 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 번은 종이를 층계 위로 나르는데, 종이 한 상자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때는 정념이 없었고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갑자기 사람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차! 이건 반 상자짜린데, 조금 후에 검사해보니 정말 반 상자 밖에 안 되어 그들을 찾아 결산해야 했다. 결과 도저히 층계 위로 올려갈 수 없었다.

후에 자료를 배송할 때 자신이 무거운 짐을 들 수 없다는 관념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힘들어 걸음을 내딛지 못할 때에는 사부님의 법을 외웠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 않거늘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으니 정법의 길은 평탄하여라”(《홍음2》〈정념정행〉) 앞으로 한 발자국만 내디딜 수 있어도 계속 나아갔고 지금은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런 개인수련 과정을 거쳐 심성과 층차가 제고되었으며 내가 수련 중에서 감당해야 할 고생임을 깨달았다. 어떤 동수들은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농촌으로 가 몇 개 마을을 다니면서 진상자료를 배부하고 또 돌아와야 하는데 정말 고생이 많다. 해외 동수님들이 영사관 앞에서 장시간 발정념을 하고 진상을 알리는데, 엄동설한에도 견지하면서 역시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법제자들이 위덕을 수립하는 과정으로 정말 대단하다. 그러나 정법수련 시기에 어떤 마난은 구세력이 억지로 강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승인하지 말아야 하고 감당하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본고장 한 수련생이 핍박에 의해 사처로 떠돌게 되어 세집을 맡게 되었다. 동수들은 갖은 노력을 다해 도와주려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부동한 인식이 있었다. 한 수련생이, “지금 파출소에서 세집을 조사 다니고 있기에 좋기는 수련생의 집을 찾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른 수련생이, “저의 친척집에 주택인 방이 있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수련생이 이 말을 듣더니,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다. 당신이 해야 할 고생이라면 응당 그만큼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수련생은, “내가 핍박에 의해 떠돌아다니는 것이 물론 나 자신의 심성에 누락이 있어 조성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으로 인해 사악이 나를 계속 박해하여 수련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구도하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 지금은 정법시기이기에 나는 주요 정력을 중생구도에 놓아야 하기에 응당 안정된 환경이 있어야 세 가지 일을 착실히 할 수 있다. 나더러 주택가에서 석탄을 사고 나무를 쪼개 난로를 피워 집을 덥혀야 하는 등의 집안 일로 내가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하는 시간을 점용하게 한다면 고생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하지 말아야 할 고생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악이 내가 법리를 잘 깨닫지 못하게 만들려 하고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계속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람과 신의 일념 차이였고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안배하신다. 수련생은 임시 거처로 돌아와 열심히 법공부를 하였다. 이틀 뒤, 그는 갑자기 한 곳에 집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밖을 나섰다. 한 작은 골목에 들어섰는데, 예쁜 까치 한 마리가 앞쪽 나뭇가지에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부님께서 자신을 격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객실이 달린 아파트를 찾아 계약을 맺었는데, 주민증도 보지 않았고 파출소도 찾아가지 않았다. 이튿날 정리하고 나서 3일 째에 입주하여 계속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이 객지에서 장사를 하는 한 수련생은 그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것을 알고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는 다른 동수와 교류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남편과의 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고 그가 돌아오면 계속 시중들어야 하며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선의적으로 남편과 제3자를 구도해야 할 것인지 고통스럽다고 하였다. 일이 발생한 후, 수련생은 구세력이 사부님의 정법에 대해, 자신의 정법수련에 대해, 자신이 중생을 구도하는 것에 대해 교란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남편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하여 막무가내로 감당해야 한다고 인식하면서 구세력이 가중시킨 개인수련의 마난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이 한 일은 이미 인류도덕이 부패한 후의 행위이며 속인의 각도에서 보더라도 아내로서 남편의 불충에 대해 나약함을 보이거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 된다. 속인의 나쁜 사상이 구세력의 요소에 의해 가강되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데 미치며 그의 남편과 제3자를 박해하는 목적에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2004년 시카고 법회에서의 설법》)라고 하셨다. 만약 대법제자가 이 한 점을 청성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강압된 마난을 자신이 넘어야 할 관이고 버려야 할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구세력이 설치한 틀에서 걸어나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고통은 자신이 구한 것이 아닌가? 동수의 문제가 오래전에 구세력과 맺은 어떤 서약일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승인할 때가 아니다. 대법제자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근본이다. 우선 이것은 자신이 수련을 제고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대한 교란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사상상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정념으로 이런 사악한 요소를 제거하는 동시에 법공부를 통해 심성을 제고한다면 당연히 정을 담담히 내려놓을 수 있다. 정법수련이라는 이 기점에서 강철을 용해시킬 수 있는 자비로 진정하게 친인을 구도할 수 있다.

문장발표 : 2008년 1월 23일
문장분류 : [수련중의 이성인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8/1/23/1708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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